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해인사를 일러 법보종찰이라고 해 왔다. 이 말은 우리나라의 삼보(三寶) 사찰을 불·법·승(佛·法·借) 삼보의 가장 중요하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로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고 있는 통도사를 불보(佛寶) 사찰로, 고려시대 불일보조(佛日普照) 국사 이후 16 국사(國師)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借寶)사찰로 그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온데 비해 해인사는 부처님의 근본 교설(敎說)인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온 연유(緣由)로 법보(法寶)사찰로 받들어져 왔다.
모든 사찰이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가르치는 곳이기 때문에 모두 성지(聖地)이기는 하지만 특히 삼보사찰은 모든 불교도에게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성지로써 또한 정신적인 귀의처로써 숭앙받아 왔던 것이다.
법보란 부처님의 가르치신 이치 즉 진리의 말씀을 말하는데 그 속에는 부처님의 재세시(在世時)의 가르치심 즉 원시불교(原時佛敎)는 물론 불교교리(佛敎敎理)의 발달사(發達史)와 함께 일어난 대승불교의 사상과 불교도의 생활관인 계율과 새로운 시대마다 새로운 경(經)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등 그 양과 풍부한 문헌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도 영원한 이상과 구제의 길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실로 이는 영원한 진리의 보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멸(佛滅) 이후 많은 수와 양의 불전(佛典)이 간행되어졌으며 또한 각기 다른 언어로 간행되어졌지만 그러나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고려대장경처럼 우수하고 방대한 량의 대장경이 한 곳에 보관되어져 있는 곳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는 부처님의 설법 내용을 담은 불전이 극히 일부분 밖에는 남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도의 정통사상임을 주장하는 브라만교 승려들의 횡포와 타종교를 신용했던 지배자들의 불교 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몇 차례로 나누어 성립된 부처님의 말씀은 인도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인도 남단의 섬 스리랑카로 넘어간 파알리(pali)어로 되어진 성전이 남아 있어서 그 성전이 전세기(前世紀) 말에 서구학자들에게 발굴되어져 불교 연구에 새로운 학문적 연구가 진행되어졌으며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지만 다만 아쉬운 점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의 불교적 상황에 국한되어 있을 뿐 대승불교의 방대한 사상을 알 수가 없어 불교연구에 충분한 자료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 불교가 점차로 동점(東漸)함에 따라 많은 수의 인도 승려들의 중국 방문과 또한 중국인들의 열열한 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손수 수많은 불전들을 중국으로 가져와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여 목판에 새기거나 서사(書寫)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곧 중국에서 이방종교였던 불교사상의 지평(地平)을 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서기 1세기경 부터 시작하여 4세기 이래 매우 활발해진 산스그리트 불전의 한역은 8세기 초에 와서야 겨우 그 기본적인 경전의 번역이 마무리 되고, 8세기 전반에 걸친 밀교(密敎)의 도래(到來)로 밀교경전(密敎經典)의 번역이 활발하게 전개된 후 일단의 대장경번역 사업은 일단락 짓게 된다.
오랜 세월에 걸친 불전의 번역 사업은 우선 양(量)에 있어서 방대하였는데 때로는 개인의 발원으로 때로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다.
대장경이라는 말은 다분히 중국적 어휘인데 이는 수나라 시대인 6세기 말에 대장경(大藏經)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여졌다.
인도에서는 원래-대장경이란 말은 삼장(三藏)이란 말로 삼장이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으로 불리던 불전(佛典)의 집대성(集大成)을 중국에서는 대장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만들어졌던 불교성전에 비해 중국의 대장경은 그 수와 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이미 만들어졌던 삼장(三藏)에 비해 엄청나게 다른 성전(聖典)이었다.
다른 성전에서 볼 수 없는 반야(般若), 해심(解深), 법화(法華), 열반(涅盤), 화엄(華嚴)등의 중요한 대승경전 천사백여종과 백여종의 대승론서(大乘論書)는 파알리에 삼장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중국과 한국의 고승(高借)들이 붙인 경론(經論)의 주(註)와 소(疏)와 어록(語錄) 전기(傳記), 목록, 사전류(사典類)등이 차례로 포함되어졌다.
처음에는 어느 곳에서나 그러했듯이 서사(書寫)되어 오다가 인쇄술의 효시인 목판(木板)에 새겨진 대장경판이 송나라 태평흥국(太乎興國) 8년 서기 983년에 나왔다. 이것을 흔히 촉판대장경(蜀板大藏經)이라 부른다. 이 대장경은 왕의 칙명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의 소산으로 1076부 5048권이 수록된 것이었다. 이 뒤를 이어 1011년 고려의 현종(顯宗)이 대장경판을 새겨 부인사(符仁寺)에 둔 것이 우리나라에서 대장경판을 새긴 최초의 예(例)였다.
이렇게 대장경 간행사업이 국가적 사업이 된 데에는 호국(護國)의 중요한 불사(佛事)였던 까닭으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 국가적 안정을 위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각국에서, 그리고 중국의 몇몇 사찰에서는 앞을 다투어 주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대장경의 역사는 중국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으며 최초로 만들어진 대장경은 중국 최초의 대장경인 촉판(蜀版) 대장경에 이은 세계의 두번째로 이루어진 한역대장경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장경은 현종 2년 서기 1011년에 시작하여 선종 4년 1087년에 흥왕사(興王寺)의 대장전(大藏殿)이 낙성될 때까지 6대 76년에 걸쳐서 진행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때 완성된 대장경의 규모는 확실한 부수는 알 수 없지만 고종때의 명신(名臣) 이규보(李奎報)가 1237년에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의하면 570질(帙) 5924권(卷)에 달하며 송나라 장경보다 876권이나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군신(君臣)과 온 백성의 정성으로 만들어졌던 초판본 대장경은 고종(高宗) 19년 서기 1233년 몽고병이 와서 불살라 버리기까지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되어 있었음이 고려 대각국사의 문집에 기록되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