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라면 잘못 찾아오셨네. 차나 한 잔 하고 가시게.”
삼배 올리고 마주앉으니 삭발날 하루 앞둔 스님의 얼굴은 수염과 무명초가 자라 원만한 자연이었다. 맑고 고요한 얼굴이었으나 그렇게 단호할 수가 없다. 마주 대하기 이토록 편안한 스님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단단한 분도 처음이었다. 말 아닌 길 말로 물어 글로 적어 보려 하는 일이 이렇게도 민망했던 일은 없었다.
햇살 아래 눈 부릅뜨고 서 있어 보라. 풀 한 포기 한 순간도 제가 자라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을 터였다.한 순간 모든 마음 놓아 버렸다.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리라. 스님은 오히려 말을 묻는 중생에게 되묻고 당부한다.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 거두는 일말고 견성하려 어떻게 애를 씁니까. 누구든 성불해야 할 것 아닙니까. 재가자나 출가자나 걸리는 시간 차이일 뿐이지요.
전념하기 힘들기는 해도 생업을 해결하며 열심히 사는 게 훨씬 낫지.
백련암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느냐 물었더니 석축 아래서 우북 잡초 사이에 낑겨 자라고 있는 복숭아 그루를 가리킨다. 나와 같이 자랐습니다.
나무는 저절로 자라, 제 목숨 명해 받은대로 거기서 자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열매를 달고 있었다. 좀스런 크기, 사람의 혀를 즐겁게 해 주지 못할 크기의 풋것을 왜 달고 있는지 분별치 말 일이었다.
봉암사가 봉암사이게 하는 선방 입구에 내걸린 글귀도 못 보았더냐.
“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알음알이 두지 마라.(入此門內 莫存知解)”
들락거리기도 했다지만 이 곳과 인연을 맺은 지 삼십 년, 동암의 정광스님과 함께 가장 오래 봉암사를 지키고 있다. “게을러서” 한번 틀고 앉은 자리, 쉬 옮기지 못한다 했다. 도감이라는 소임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러나 싸리울 단정히 쳐진 염화실 조실방은 비어 있으니, 봉암사에서 스님이 노릇해 줄 바 은연중에 짚어진다. \"법당法廳을 내걸고 제 주장 내세우는 따위는 비단위에 꽃을 까는 짓”일 터이므로, “스스로 굴레를 벗고 짐을 풀어 놓으니 그 마음 그지없이 고요하고 태평하다.”
법연스님 , 그렇게 이 우람한 봉암사 지키고 있다.
안거 때 봉암사의 대중 스님의 수효는 여든이 넘는데, 그 가운데 선방에 방부들인 스님의 수효를 따져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터였다. 피할 길 없는 바깥 일 아니면 주지 스님도 선방에서 척량골 곧추세워 앉고, 원주 또한 한해에 적어도 네 번이 걸린다니, 스님들이 돌올한 회양산 그늘 아래 깃들이려 함은 오로지 공부하려는 뜻뿐인 까닭에서이다. 유일한 종립선원인 이 곳이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된 것은 82년도였다. 납자들은 싸리울로써 선방만 출입을 단속하다가, 속리산과 월악산을 묶어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는 계획이 서자, 그 틈새에 자리한 봉암사의 전 대중이 한사 반대를 하고 나서 스스로 산문을 굳게 걸어 잠가 알반인의 출입을 믹았다. 특별 수도원 지정은 공원 지역에 편입됨을 막아주는 명분이 되었던 것이다.
유서 깊고 터가 양양한 선방이라고는 하나, 삼십 년 전만해도 이 곳에 상주하는 대중은 서넛이 고작이었다. 법당과 요사채 또한 퇴락하여 맘 놓고 공부자리를 틀 형편이 못 되었다. 69년도 어느 날에, 산내 암자에서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은 스님 한 분이 원주를 찾아 한 철 지낼 양식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럴 형편도 못 되었던지 차라리 주지를 맡아 와서 공부하라 일렀다. 이 스님 그 말에 김용사로 달려가 도반들을 모았다.
권선대에서 정진중이던 법연, 고우스님과, 정광, 법화 등 여덟이 봉암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선방을 마련할 뜻을 세우니, 그 무리가 정진과 수행이 한결같이 추상 같던 면면인지라, 직지사 본사에서도 딴 뜻을둘 수가 없었다.
자급자족을 목표로, 아니,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을 수 없다는 백장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혹독한 세월이 몇 년에 걸쳐 이어졌다.
“요 정도 도량 가꾸는 데도 삼십 년이 걸린 택이라. 나라 안 온 절이 놀이터가 되어 있으니, 요런 데가 암만 못 돼도 여남은 데는 돼야 하는데…, 살아 보면 이 곳은 까라지고 하는 법 없이 힘찬 데라. 지난해나 올해나 여기서 용맹정진한 스님도 열 분쯤 돼요.”
경북 선산이 속향인 법연스님이 산문에 든 것은 열살을 갓 넘긴 때였다. “제 정신이 없을때” 들어오긴 했으나 숙연이 없지 않았던지 절이 좋기만 했다. 올로써 속랍이 쉰다섯이니 승랍이 사십을 넘는다.
그 긴 세월 동안, “처음과 끝이 그렇게 한결 같을 수는 없는 분”이라는 것이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던 고우스님의 말이다. 좌선을 하는 스님들은 일쑤 울력을 피하거도 하련만, 봉암사의 터를 닦는 호된 세월 보내는 동안 그리 된 것인지, 땅에 씨 뿌려 스스로 먹거리를 마련하되, 모종내는 일, 김 매는 일 등때를 넘길 수 없는 울력은 피해 본적이 없다.
“참선에 동선이니 행선이니 뭐 따로 있습니까. 이름을 갖다붙이니 그런 거지. 무얼 하든 생각 그 자체를여일하게 두는 것이 참선이지.”
지금은 그 옛날과 같이 울력에 몸을 내던지지 않는다고는 하나, 몸체에 비해 큰 손이 그의 지난 날을 짐작하게 했다. 백련암 혼자 있는 일도, 두 손발이 자신을 잘 시봉하고 있으니 따로 시봉 둘 일이 무어냐고 심상히 말했다.
선림고경총서, 열반경, 불교의 사상, 화염경, 열하일기, 경봉대선사 일기, 조주어록, 실상묘법연화경 해설서 등, 책상 주위로 책이 한가득이었으나, 지나는 말에도 그 책 속에 담겼을 어구 한번 섞는 일이 없었다. 횃대에는 겨울 털옷까지 한 벌 내걸려 있고, 새벽 행선중 걸치는 옷은 얼마나 입어 낸 것인지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낡은 것이었다. 특별히 스스로를 경책하는 바가 없다고 했다. 무서운 말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견성 성불하기 전에는 부처님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란 있을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이면, 부처님 법에 의존해 사는 사람이면 검소란 기본적으로 갖출 바이니 치켜들 것도 없다고 했다. 남한테 폐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엄격히 가두는 바 없이 산다고 하나, 법연스님 몸에 선기禪氣가 가득하니 이미 무작묘용無作妙用에 가까이 간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새벽에 어떤 기척에 잠을 깼다.
열엿새 달만큼은 못되어도, 찰만큼은 찬 열나흘 달이 창호를 시리게 밝혀 주었던 탓이다. 아니다. 누군가 뜰을 거닐고 었었다. 일정하고도 균일한 보행, 사박사박 마사석 밟히는 소리가 들린 지 꽤 오래 되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물매가 급한 산속의 좁은 터에 마련된 도량이다.
이리로 오던 발걸음 끝나면, 되돌아 저리로 다시 발걸음 이어진다. 백련암 도량석이었다.
“오줌 누실라우?”
“…….”
“마당에 불을 키고 내려와요.”
저만큼 떨어진 해우소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자지러진다. 스님과 함께 행선중이었나, 굵지 않은 독뱀 한 마리, 길 위에서 제 몸을 비추는 느닷없는 불빛에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스님은 축담끝에 뉘어 둔 지팡이로 그 축생을 걷어 길 아래 풀숲으로 던져 넣는다.
“멀리가서 살이라이. 나랑 이 산중에서 같이 살라믄 가까이는 오지 말아라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보여지도 않는 축생한테 타이른다. 이 곳에는 혼자 머무르시나 했더니 아니라 했다. 산토끼 두 마리, 불두화 나무 밑둥치에서 기어 나오는 개미를 먹고 사는 두꺼비 두 마리, 그리고 반딧불 네 마리와 함께 산다했다. 집채 밑에는 두 마리, 그리고 축대 밑에 한 마리 밀뱀도 있다 했다. 그것들은 봄, 가을 두 철로 허물을 벗어 제가 있음을 알리기는 하나, 몸을 숨겨 자중하니 눈에 띄지 않는다 했다.
과객 한 마리가 지나친 모양이었다. 무엇이 미묘입니까. 송나라 지홍스님은 “바람이 물소리를 베갯머리로 실어다 주고, 달이 산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다 준다”고 대답했었다.
구름사이로, 나뭇잎 사이로 지나는 달, 아기 손톱처럼 맑고 여린 달 떠 있다. 스님 행선에 방해가 되거나말거나, 솜털 일찍 세우는 새벽 한기도 잊고, 마당끝에 오래 쪼그려고 앉아 있었다. 산은 낮보다 훨씬 산다와, 그 품에 온전히 안길 만한 시간이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