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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산운고 (霽山雲皐)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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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편집실 1986년 08월 54호
옛날의 어떤 사람은 홀로 넓은 들에 살면서, 그 형상은 덤덤하여 마치 초목과 같으며, 발은 땅을 밟지 않고 입은 맛을 모르며, 해에는 밤과 낮이 없고, 때에는 추위와 더위가 없으며, 모든 것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편안히 적묵(寂默)의 경지에서 스스로 깨끗하며 미묘한 말과 상냥한 이야기는 아무도 듣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집에서는 오거(五車)의 책을 읽고, 나와서는 삼장(三藏)의 이치를 궁구(窮究)하여 비단과 같은 아름다운 마음과 말의 순수함은 안에서 밝고, 용과 호랑이 같은 문장과 의리의 떠받들림은 밖에서 떠들썩하며, 그 배운 바를 서술할 때는 그 말을 얻고 그 뭇을 비유하여 그것을 풀어 확대시키면 만언(萬言)을 넘지마는 번거롭지 않고, 그것을 모아 한데 묶으면 조각밀을 세워도 남기지 않으며 현하(縣河)의 웅변을 쏟아 실상(寶相)의 묘한 법문을 연설하고 자유자재하게 만물에 응하여 사실과 이치에 모두 평등하다.
또 어떤 사람은 참 지혜가 안으로 밝고 슬기로운 믿음이 스스로 피어나, 신령스런 뿌리와 은혜로운 싹을 심지도 않고 매지도 않지마는 원인의 꽃과 결과의 덕이 안으로는 하나 뿐이나 밖으로 융통하며, 그 가장 요긴함을 잡아 바로 끊으면서 원만히 응하고, 그 바른 영(令)에 의거하여 격식을 벗어나면서 이끌어 보살피니, 바람을 따르고 해를 쫓는 발이 어떤 사람의 말을 향하겠는가. 부처를 꾸짖고 조사(祖師)를 나무라는 솜씨가 원래 자기 집의 방침이다.
위의 세 사랍은 각기 그 방면에만 정통했지마는 우리 대사는 그 모두를 겸해 가졌으니 마치 저 바다가 모든 뱃물을 다 마시고 저 대지가 모든 산을 다 떠받든 것과 같다.
또 그 따라 번거로움을 씻고 뒤집힘을 바루며, 근원을 끌어내고 흐름을 밝혀 그 경계의 멀고 가까움을 건너고, 그 근기의 뛰어나고 모자람을 따라 모두 그 정(情)을 돌리고 성품을 회복하며 생각을 덜고 정신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간사함을 힘써 믿음을 뒤엎고 거짓을 부채질해서 순박함을 흩어 버리는 것으로써 자기 임무로 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사의 말 한마디에 후회하고 반성하여 지금까지의 버릇을 고치고는 그 정(情)을 천인(天人)의 끝에 나아가게 하고, 그 자취를 연하(烟霞)의 밖에 두게 하거늘 하물며 본업(本業)을 일삼으면서 갈래 길에 걸린 사람으로서 어찌 기름이 국수에서 나오지 않음을 염려하겠는가.
지금 여기 수록(收錄)한 것은 나그네들의 귀와 눈으로 보고 들은 것들 중에서 특히 현저한 그 말과 자취이다. 그러므로 명운(冥運)을 미형(未形)에 간직하고 현기(玄機)를 무제(無際)에 운전하여 도물(道物)의 극치에 이르고 언묵(言默)으로 적을 수 없는 그 경지에 이르러서는 나도 또한 듣지 못하였다. 어찌 나만 듣지 못했겠는가. 그 당시에 옥주(玉 )의 꼬리를 친히 잡고 금사(金獅)의 곁을 항상 모시던 제자들도 또한 듣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제자들만이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사도 또한 말하지 못했던 것이니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은 참 말이요 참 들음이다. 참말은 말이 없는 데서 말하고 말이 없는 말함은 치연(熾然)히 항상 말하여 그 말함이 간단이 없으며, 참 들음은 소리 없는 데서 듣고, 소리 없는 데서 들음은 응연(凝然)히 항상 들어 그 들음이 간단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사는 상척광(常寂光) 가운데서 말하지 않는 때가 없고 사람을 비로계(咽二毘盧界) 안에서 듣지 않는 때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떠나 말함을 구하고 소리를 떠나 들음을 구하는 것도 또한 될 수 없는 일이다.
대개 말에 나아가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말, 말이 참 말함이요, 소리에 나아가 이치를 얻어 소리를 잊으면 소리 소리가 참 들음이다. 이로써 본다면 위에 척은 l7가지의 말과 행적은 그
낱낱이 다 언묵(言默)을 떠난 도리로서 어느 것 하나 대사의 참 말 아닌 것이 없으며 대사의 말은 부처님의 도에서 멀지 않은 것이니 그래서 오늘날 그 기록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임인년 겨울에 은고 김공(隱  金公)을 완산(完山)서 만났는데, 김공은 말하기를 「대사의 행적이 심히 자세하다」하고 또 말하기를「마침 두어 섬 쌀을 마련하여 한 두 사람의 동지와 마음을 모아 봉서사에서 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산문에 보전하고야 말겠다」하였으니, 그것은 그 도가 후세에 길이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6년이 지난 정미년 봄에 봉서사의 어떤 스님이 내가 거처하는 조그마한 선방(輝房)으로 찾아 와서 내게 그 기문(紀文)올 청하였다. 나는 이미 김공의 뜻에 느낀 바가 있었고, 또 그 청하는 것을 저버리기 어려워 그 전하는바 구비(口陣)의 사실을 간단히 적고는 운고스님에게 전하여 김공의 고명(高明)함으로 다시 바루어 주기를 청하였다.

2 나는 일찍 석가의 현기 (縣記)를 읽었는데,

거기 말하기를「내가 멸도한 뒤에 나옹(懶翁)이라는 비구가 세상에 나올 것이니 그가 바로 내 몸이며, 또 진묵(震默)이라는 비구가 나올 것이니 그도 또한 바로 내 몸이다」하였으니, 이 두 법로(法老)는 바로 우리 본사(本師)석가 부처님의 작은 화신(化身)으로서 천억으로 몸을 나누어 티끌 수 같은 적자(赤子)를 염부제의 고해(苦海)에서 구제하려 하심을 이로써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정술년 봄에 나는 구름처럼 노는 지팡이와 신을 잠깐 동안 전주 봉서사(全州 鳳棲寺)에 머물렀는데, 그 절은 곧 나용이 지었고 진묵이 항상 머물던 곳이다. 나는 벽에다 한 폭의 영정 (影願)올 걸고 향을 사르고 정례(頂禮)한 뒤에 찬탄하기를,「참으로 미증유(未曾有)의 일이다. 내가 이런 인연을 만났었구나, 나는 이 절에서 늙다가 목숨을 마치리라」하였었다.
그 뒤 얼마 안되어 초의장로(草衣長老)가 해양(悔陽) 천리길을 지나다가 나를 찾아 그 소매에서 책 한 권을 내게 보이면서「이것이 진묵조사의 유사(遺事)요」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그 유적을 보지 못한 것을 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은고 김 선생은 완산(完山)의 망사(望士)로서 내게 이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나로 하여금 행장을 쓰라 하면서「그대는 한 번 보시오」 하였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펴서 보고는 속으로 의심하기를,
「세상에 공자(孔子)를 배우는 사람으로 부처를 비방하는 사람이 옛부터 하많은 데 지금 은고공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비록 유교와 불교가 같지 않고 옛날과 지금이 멀리 떨어져 있지마는 거기에는 말없는 사이에 기미 (氣味)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장차 한 번 김공을 찾아 뵈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편지로 나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중이요 진묵은 그대의 스승이 아닌가. 지난번에 초의 스님을 시켜 그 행장을 지어 그것을 출간하여 그가 머물던 절에 간직하려 하는데 그대는 왜 말이 없는가」 또
「우리 유교에서는 불교를 좋아하지 않지마는 오직 진묵스님에 대해서만 나는 사모하는 정을 금할 길이 없소 . 그런데 그대는 자기 일을 모른 체하니 매우 이상하오」 하였다.
나도 오랫동안 의아해 하다가 당신의 전형(典型) 과 침묵과 보고 들음을 가만히 생각하면 마치 저 진묵 조사와 7분의 기상을 닮았으니 저 왕양명(王陽明)의 이른바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문을 닫는 사람이다」라는 글귀가 그대에게서 증명되는 것이오」 하면서 서로 웃고 헤어졌었다. 그리고 이럭저럭 지내는 동안에 공의 무덤의 풀도 이미 우거졌었다.
그 뒤 8년이 지난 정사년에 공의 맏아들 사마 영곤(司馬 永坤)씨가 그 선고(先考)의 뭇을 받들어 비로소 출판하려고 내게 그 발문(跋文)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못난 사람의 욕심이 이 책을 더럽히는 것은 마치 화첩(畵帖)의 가난한 그림 재료나 솜씨와 같을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법로(法老)가 자취를 응해 화현한 것이 과거 부처님의 다른 몸이 아니라면 어찌 선비와 중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만드는 것도 금생의 깨끗한 인연인데 은고 공으로부터 한 두번 글의 청을 받은 인연이 있었으니 지금과 옛을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현대(玄對)의 슬픔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감히 이 글을 써서 바치는 것이니, 만일 그 꼬리에 불으면 영광이겠고 장독 뚜껑이 되어도 또한 다행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