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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신행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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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의 문 - 무관 1986년 08월 54호
신행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신행해야 할 것인가? 불교는 이런 문제에 근본적인 해답을 주고 있다. 만일 그런 기능이 없다면 종교로서 그 존립의 의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 불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누구나 잘 알고 있는듯이 말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많은 주장과 방법론이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사회화에 주력하고 내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소흘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가 결정되지 않고 불교의 사회화와 포교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
다.
믿음은 한마디로 삼보에게 귀의한다는 것이다. 즉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부처님인 석존을 개조로서 높이 받들고 그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이다.
부처님이란 인도말로 Buddha를 음역한 것으로 그 뜻은 깨달은 사람, 눈뜬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극-만상의 이치를 참답게 깨닫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자(無上正等覺)를 부처라 한다.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알고 제거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즉 참 진리를 자기가 깨쳐서, 그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그 지혜와 복덕이 한량없이 원만하고 안으로 삿되고 미혹함이 없고 밖으로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이 없는 자를 말한다. 또한 그 진리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맑고 깨끗하고 평둥하여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곧 불교이다. 이러한 부처가 되고자 믿고 행하는 뜻은 우리가 강을 건널 때는 배를 필요로 하고 높은 곳을 오를 때는 사다리를 의지하듯이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성불의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할 때는 의지할 곳이 있어야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세가지 의지할 보배의 뭇으로 삼보라 한다. 불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삼보가 있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교를 믿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불가결한 요건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가장 중요하며, 불교를 신행하는 이들에게는 최초이자 최후로 중요한 것이다. 신행하는 사람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것인가? 불
교에서는 선과 악이 인간의 마음의 의지력에 의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본래 죄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람의 마음이 밝지 못하고 어둡기 때문에 미혹한 행위는 무명에서 인한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선악의 기준점은 없으나 이를 구분한다면 크게 열가지로 나눌 수도 있다. 사십이 장경 중에서 중생을 열가지 일로서 선을 이루기도 하고 악을 쫓기도 한다. 그 열가지란 몸의 세가지 말의 네가지, 뜻의 세가지이다.
몸의 세가지는 산목숨을 죽이는 일과 남의 물건을 홈치는 일과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이다. 말의 네 가지는 거짓말과 발림 말과 이간질한 말과 악담이며 뜻으로 짓는 세 가지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이 열가지 일은 성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열 가지 악한 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면 곧 열 가지 착한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이 많은 허물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뉘우치지 않고 그대로 지나버리면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 점점 깊고 넓게 되듯이 죄가 무겁게 쌓일 것이다. 그러나 허물이 있을 때 스스로 그릇된 줄 알고 악을 그쳐 선을 행하면 죄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병자가 땀을 내고 차차 회복되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참회라는 것도 공한 이치이고 지혜의 경지에서 본다면 한 생각 일으키지 않고 선정에 들면 일체가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삼보에의 귀의와 참회로서 신심과 발심을 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진리를 믿고 진리에 따라 생활하는 가운데 행복과 보람이 있음을 굳게 철저하게 믿는 것이 신심이다.
이 신심이 있을 때 이루지 못할 것을 이룰 수가 있으며 따분한 가운데서도 기쁨을 어려운 가운데서는 쉽게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신심은 어디까지나 의지하는 마음이므로 스스로의 자발적인 마음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발심이라고 하며 이 자발적인 마음이 자신의 반성과 각오에 의해서 확실하게 인식되어지고 이 확실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가짐과 의 생활관이 확립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순간적인 것이 있는 동시에 또 영원한 것도 있다. 우리는 영원한 것 참된 것 분명한 것올 구분하고 선택하여 해탈을 얻고자 하는 생활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의 부모이다. 법화경 비유품 중에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사리불이여 나는 모든 성인 중에서 가장 높으며 세상의 아버지이다. 모든 중생을 다 나의 아들이다. 지금의 세상은 고통이 많다. 오직 나 한사람이 그 고통을 구제할 수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보통 사람의 마음은 의존심이 많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스승에게 의존하고 선배에 의존하고 이렇듯 주위에 의존하게 된다. 이리하여 자기 스스로 무엇을 베풀려고 하는 감정보다 다른 사람이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다. 이는 깊이 사물을 보고 이해하여 바르게 수행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베풀려고 하는 마음을 깊이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자비는 현실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고, 어두운 현상을 밝게 만들 수 있는 강한 실천력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소원을 갖는다. 이를 원력이라고 한다. 자비의 실천과 미래의 원력을 가지고 꾸준한 정진의 생활이 신행인의 자세인 것이다.
이러한 자세와 방법으로 참된 간경, 기도, 염불 등을 하여야 함은 물론, 이러한 귀의와 참회와 발원이 늘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종교심에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불어넣어 훌륭한 정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