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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편집실 1986년 08월 54호
·신령 (神靈)한 탑(塔)들

요동성의 아육왕탑

불교 문화사(文化史)에서 탑은 일찍부터 숭앙(崇仰)되어졌다.
본래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던 장소로써 무불상(無佛像)시대부터 불교 내(內)의 가장 신성한 신앙의 대상이었음이 불교 미술사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탑의 신앙은 불교 신앙에서도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불상이 나타난 이후에도 계속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음은 물론 자연히 탑에 대한 신령스러운 이야기가 많이 전해졌는데 「삼보감통록(三齊感通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날 고구려 요동성 곁에 있는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고구려의 성왕(聖王)이 국경 순행차 이 성에 이르렀다. 왕 일행은 오색 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서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한 기이하게 생긴 스님이 석장(錫杖)올 짚고 서 있었다. 그러나 왕 일행이 가까이 가려 하자 그 스님은 홀련히 사라져 버렸다. 다시‘물러나와 멀리에서 바라보니 스님은 도로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3충의
흙탑이 솟아 있었는데 그 윗 부분은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 같았다.
성왕과 그 신하들이 그런 탑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음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를 못했다.
다시 그 스님을 찾아 다가갔으나 스님은 사라지고 단지 거친 풀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었다. 왕과 신하들이 이상히 여기고 그 자리를 한 길 가량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 한 켤레와 그리고 명(銘)이나왔다.
명(銘)은 범어(梵語)로 씌어 있었다. 왕을 모신 한 신하가 그 명을 해독하고서 그것은 불탑(佛塔)이라고 왕에게 알려 줬다. 왕은 좀 더 그것을 자세히 알려고 하자 신하는 그것은 지난날 한나라의 소유로서 휴부왕제천금인(休浮王祭天金人)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은 그것을 인연으로 신앙심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다. 나중에 고구려에 불교가 비로소 전래되자 그 흙 탑에 관한 내력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다시 그 높이를 줄이다가 그 탑은 삭아서 무너져 버렸다.
아육왕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 곳곳에 8만4천 탑을 세웠으니 요동성 곁에 탑이 있었던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또 당 고종 123년 경 (A.D 661∼662) 요동에 전쟁이 있을 때 행군 설인규가 지난날 수나라 임금이 요동을 정벌하던 땅에 이르러 산의 모습이 황량하여 인적이 끊어져 있음을 보고 고로(古老)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선대(先代)에 출현한 것이라고 했다. 설인귀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대로 본떠서 서울로 가져왔었다.
전한(前漢)과 삼국의 지리지(地里志)를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어 한나라의 유주(幽州)속해 있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 보인 고구려 성왕이란 어느 임금인지 알 수 없다. 더러는 동명성왕이 아닌가 유추하나 잘 알수 없고, 아육왕의 행적 중에 8만4천의 탑을 세웠다고 하니 그 표정이 수 없음으로 부처님의 감응에 다만 놀랄 뿐이다.

2. 금관성의 파사석탑
금관성(지금의 김해)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의 내력은 이러하다.
파사석탑은 금관가야 때에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 황후가 후한 광무 제24년 서기 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실어 온 것이다. 처음 아유타국의 공주, 즉 허황옥 황후가 양친의 명(命)을 받들어 배를 타고 동방으로 향해 오다가 잘못 바다의 신에게 노여움을 받아 도저히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어 되돌아가 부왕에게 그 일을 아뢰었다. 부왕은 파사탑을 주면서 배에 함께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허황후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닿았던 것이다.
당시 허황후가 금관국의 해안에 정박했을 때 붉은 돛, 붉은 깃발 그리고 아름다운 주옥들올 실었기 때문에 허황후가 정박한 그곳을 지금 주포(朱浦)라고 부르고 었다.
그리고 상륙한 뒤에 산신령에게 예물로 비단치마를 벗어 주었던 언덕을 능현, 붉은 깃발이 최초로 들어 왔던 해안을 기출변이라 부르고 있다.
수로왕은 허황후를 맞아들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허황후가 석탑을 싣고 오긴 했으나, 그 시대에는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교를 신봉한 일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전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토착민들이 믿고 받들어 행하지 않았음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 후 제 8대 질지왕 즉위 2년 서기 452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를 창건했다. 이때에는 아직 신라에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 이었다. 탑은 네모가 난 5층 탑 이었으며 그 조각이 무척 기묘하다. 돌은 짧은 적색의 반점이 있고 그 질이 매우 연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것이다.

3. 고구려의 영탑사
숭전(借傳)에 의하면 고구려의 고승 보덕(普德)스님의 자는 지법(智法)이며 용강현 사람이다.
그는 항상 평양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보덕스님에게 어떤 남루하고 초라한 산골에 사는 노스님 한 분이 찾아 와서 경전을 강의 해 줄 것을 청했다.
보덕스님은 자신은 재주가 없음을 핑계하여 굳이 사양했으나 여러번 먼 길을 와서 청하는 바람에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 노승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열반경(涅槃經) 40여권을 강의하고 그 법석(法席)을 마치자 보덕스님은 평양성의 서쪽 대보산에 있는 암혈로 가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인(神人)이 나타나 보덕스님에게 어디로 다시 떠나지 말고 그 곳에 거주하라고 하면서 보덕사 앞에 석장(錫校)을 놓고서 그 땅을 가리키며 “이 땅 밑에 8면으로 된 7충의 석탑이 있으리라”고 했다. 신인이 가리키는 곳을 파보았더니 과연 8면 7층의 석탑이 나왔다. 그래서 그 곳에 절을 지어 그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보덕스님은 그 절에 머물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