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래 가야면은 대가야국(大伽倻國)의 땅으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국을 멸망시키고 군(那)으로 될 때 대가야군(大伽倻都 :현재 고령군)과 적화현(赤化縣 :현재 야로면) 치하에 두었다.
해인사를 지을 때는 고령군 야로현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 태종 때 야로현을 없애고 합천군에 합칠 적에 야로와 분리하여 각사면(各寺面)이 되었다.
그 뒤 일정(日政)때인 1914년에 다시 가야면으로 고쳤다. 치인리(緇仁里)는 신라 말 최치원이 권속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 살았으므로 치원리(致遠里)라 하였는데 그 뒤 치인리(致仁里)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에 지금의 명칭인 치인리(致仁里)로 고쳤던 것이다. 오늘의 치인리는 최치원의 이름인 치원(致遠)의 변칭에 불과하며 치의(緇衣)를 입은 숭려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개명(改名)되었다.
한국의 여러 대 본산의 대 가람들에는 제각기 여러 가지 전설과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있기 마련이다.
고려 태조 26년 서기 943년에 지어진 가야산 해인사 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는 해인사의 창건을 다음과 같은 신비스러운 설화로 엮고 있다.
옛날 양나라 때의 지공(誌公)화상이 임종시에 제자들에게 답산기(踏山記)를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입적한 뒤에 고려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다.
그때 그들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다.그 뒤에 과연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하였다. 지공화상의 제자가 그들을 보고 답산기를 주면서 스승의 유언을 전하였다. 두 스님이 그말를 듣고 지공화상의 묘소를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古今)이 있지만 법에야 어찌 전후가 있겠읍니까?”하면서 밤낮 이레 동안에 선정(禪定)에 들어 지극히 법(法)올 구했다. 그러자 묘문이 저절로 열리고 지공화상이 나와 설법하고 의발(衣鉢)과 신발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 “너희 나라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다. 너희들은 돌아가 별보대가랍해인사(別補大伽藍海印寺)를 세우라”고하고서 다시 묘문으로 들어 갔다.
두 분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 영(嶺)을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 사냥꾼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절을 지을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군들은“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이 고인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철기와가 많으니 그곳에 가서 보시오”라고 했다.
드디어 두 스님이 이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 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때 신라 제40대 얘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었는데, 어떤 약도 효력이 없었다. 임금께서 신하들을 여러 곳으로 보내어 고송석덕(高僧碩德)의 구호(救護)를 찾았다. 사신이 마침 길에서 치솟는 흙은 기운을 보고 산 아래에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수 십리나 들어갔으나, 시내가 깊고 골짜기가 좁아 더 갈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 가다가 선정에 들어 방광(放光)하고 있는 두 스님을 보았다.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갈 것을 청했으나 두 스님이 거절했다. 마침내 그들이 왕후의 병난 사연을 이야기하자 두 스님은 오색(五色)의 실을 주면서 말했다.
\"이 실의 한 끝을 궁전 앞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다\" 라고.
사신이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다. 임금이 고맙게 생각하여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 절을 짓게 하였다. 그때가 애장왕 3년 당(唐)의 정원(貞元) 18년이다. (조선사찰자료 상권에서)
이러한 전설은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몇 가지의 견해 즉 창건된 연대라던가 신라 왕실의 특별한 도움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등은 다른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는 점도 있다. 대체로 해인사의 창사(創寺) 정신은 화엄의 철학과 사상의 핵심인 「해인삼매」에서 유래되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면 대체로 화엄 사상이란 어떠한 것인지 그 개요(睡要)만을 설명하여 보기로 하자.
화엄경의 원명(原名)은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이며 산스크리트로는 Buddha atamsaka-mall-avaipulya-sutra이며 흔히 줄여서 avatarnsaka-sut-ra라고 불리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화엄경은 처음부터 현존하는 것과 같이 종합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각각 독립된 각품(各品)이 모여 집대성되어졌다.
화엄경의 성립연대는 약 4세기 경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화엄경의 한역본(漢譯本)이 나타난 이래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에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동양사상의 한 위대한 조류(湖流)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화엄경을 근본으로 하여 일어난 종파의 하나가 곧 화엄종이다.
6세기 경에 중국에서 꽃피기 시작한 화엄종은 두순(杜順)으로부터 지엄(智嚴) 현수(賢首)에 이르러 크게 성하였으며 정관(燈觀) 종밀(宗密)동과 같은 화엄종장들이 출현하였으며 우리나라에는 당나라 지엄화상에게 화엄철학을 수학한 후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租)가 된 의상스님께서 문무왕 16년 서기 676년에 태백산에 부석사(浮石좋)를 세우고 화엄종지를 펴기 시작한 이래 오진(悟眞) 지통(智遇) 표훈(表訓) 진정(質定) 진장(質藏) 도융(道廳) 양도(良圖)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둥 열분의 대덕을 비롯한 화엄종장들이 출현하여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등 해동화엄십찰(海東華嚴十利)올 중심으로 화엄의 사상을 드날렸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 깨달음의 내용은 해인삼매(海印三昧) 속에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로 요약 설명되는데 이는 즉 청정무구(淸淨無垢)하고 원만무얘(圓滿無碍)한 일심의 세계-지혜의 눈으로 바라 본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말로서 이러한 세계가 곧 해인삼매의 경지로 나타난다. 삼라만상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 된 세계로 나타내는 커다란 바다의 인장, 이는 곧 부처님 정각(正覺) 바로 그것이며 우리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진면목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근원(根源)이며 여래의 성품이 나타나는 본연(本然)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해인삼매의 경지를 비유하자면 마치 바다에 크고 작은 파도가 일어나는 까닭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질 때 거기에는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그대로 나타남을 일러 해인삼매의 경지라고 하거니와 우리들 한량없는 마음의 바다에서 일고있는 가지가지의 물결 또한 무명(無明)의 망령된 바람 때문인데 이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훤출히 벗어나 전도(願倒)된 번뇌의 물결이 쉬면 자연 맑고도 청정한 본래의 성품이 드러나 모두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에 옮을 상징하고 있는 말이라 하겠다.
해인사는 곧 이러한 세계 즉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가르치려는 숭고한 이상을 가진 도량이며 또한 대장경을 모신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