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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길에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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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용택 1997년 09월 187호
내가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어 그 길에 처음 발걸음을 익히기 시작했을 때 그 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강물이 흘러오는 강가로 그 길은 나 있었다. 길 아래는 파란 강물이 흘러가며 부서지고 강 위로는 논이었다. 파란 모가 누런 벼가 되고 하얀 눈 속의 어린 보릿잎이 파란 보릿잎으로 너울거리며 익어가곤 했다. 집에서 얼마쯤 가면, 작은 논들을 다 지나면 넓은 강변이 나왔는데 그 강변에는 소나무들이 있고 소나무 아래에는 커다란 돌맹이들이 많았다. 또 그 소나무 아래는 가랑나무 가랑잎들 속에 물새들의 작은 알들이 숨어 있었다. 개꽃이 피었고 칡넝쿨이 뻗어 있고, 산딸기가 칡넝쿨 속에 빨갛게 익어 있었다. 겨울이면 산토끼가 뛰쳐나갔고 때론 노루들이 뛰쳐나와 작은 들을 질러 큰 산으로 겅중겅중 뛰어 올라갔다. 그 강변 끝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호수에서 흘러오는 작은 도랑으론 징검돌이 몇 개 놓여 있었다.
호숫가로 난 길은 아름다운 길이었다. 호수는 깊어서 들어갈 수 없었으며, 가물치, 잉어, 붕어, 용이 못 된 커다란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봄이면 그 길에 커다란 자라들이 알을 낳으려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우리가 가면 물로 풍덩 빠져들었다. 파란호수엔 노란 개연꽃이 솟났고, 눈이 오고 얼음이 짱짱하게 얼어 우리를 유혹했지만 우리는 무서워서 큰 돌맹이만 던져 얼음장만 울렸다. 호숫가에는 들판 쪽으로 아담한 산이 있고, 그 산에 봄이면 진달래 꽃이 피어 호수에 어른거리곤 했다. 호숫가를 한참 지나면 작은 시내가 나오고 그 시내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아름다운 그 징검돌들, 그 위에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을 때의 징검돌 모양들이 흐르는 물에 어른어른 비치곤 했다.
우리의 책보나 신을 빼앗아 가기도 했던 징검다리를 건너면 아주 작은 오두막집으로 된 주막이 두 곳에 있었고, 거기 할머니 두 분이 저마다 두 오두막 집을 차지하고 술과 고기를 팔았다. 아버지들이 이따금씩 그 집에서 술과 고기를 먹다가 우리를 만나면 고깃국을 사 주기도 했다. 그 집을 지나면 바로 신작로였다. 자갈돌들이 뒹구는 신작로에선 이따금 차들이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길 어디쯤엔 아무리 냄새를 맡지 못하는 코맹맹이라도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더덕 냄새가 났다. 있는 곳을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 수 없던 그 더덕 냄새는 내가 어른이 되어 선생을 오래 할 때까지 내 코를 벌름거리게 하다가 자갈 길이 아스팔트 길로 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봄이면 강물 구석구석에 남아 있던 얼음이 녹고 새 물이 흐르면 강가에 새소리가 들리고 새 풀잎이 돋아나고 풀꽃들이 피어나 강물에 어리면 하교길에 강물에 발을 적시며 고기들을 잡기 시작했다. 함박딸기가 풀잎 뒤에 익어가던 길, 못밥을 얻어먹는 찔레꽃이 피어나던 길, 붓꽃이 파란 풀밭에서 솟아나던 길. 풀잎들이 노랗게 바래면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리다 쓰러지던 길, 바람이 불고 하얀 눈송이들이 산을 내려와 강물로 겁 없이 사라지던 길, 큰물이, 새파란 큰 물에 하얗게 부셔지며 내다라오던 길, 그 길에서 나는 초등학교 육 년을 울고 웃으며 보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그 길을 걸어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이십여 년을 걸었다.
그 동안 그 길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섬진강 댐 공사 자재를 이 길에서 가져갔고, 강이 크게 막히니 물의 양에 변화가 생겨 그 푸른 물결이 사라지고, 강변엔 풀들이 우거져 강을 잡아먹어 갔고 그 넓던 강변은 논이 되었고, 그 파란 호수도 메꾸어져 절반은 논이 된 채 죽어갔다. 길들은 아무렇게나 변해버렸고 이이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도 나는 그 길을 걸어다녔다. 그래도 그 길엔 억새가 피어 지는 해를 받아 아름다웠고, 눈이 왔으며, 비가 내렸고, 봄이 왔으며 가을이 왔고, 바람이 불었다. 눈에 익은 아름다운 길들이 사라져 변할 때마다 나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며칠 밤을 뒤척였으며 사는 맛을 잃기도 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징검돌들이 파헤쳐지면 나는 어디에다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지곤 하는 날들이 지나고 나면 나는 또 새로 변한 길을 사랑했다. 나는 그 길들 어딘가 마른 풀밭속에 앉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길에서 자랐고 그리고 슬픈 시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그 길에 들어설 수 없다. 그 길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경지 정리를 하여 그 길을 밀어 버렸다. 나는 길을 잃고 시도 잃었다. 이 세상에 이제 길은하나둘 사라지고 도로만 남았다. 길이 없고 도로만 있는 세상은 삭막하고 황량할 뿐이다. 차를 타고 씽씽 달리는 길은 길이 아니다. 어디를 둘러 볼 수 없이 바삐 달리는 찻길에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키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