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덕이 제 아무리 크다고 해도 부처님의 대승법을 배워 깨달아 부처님처럼 성불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만큼 큰 공덕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본래부터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제대로 닦으면 부처님과 같이 성불할 수 있겠구나 하는 대긍정심이 발심이 되고 발심은 곧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선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했습니다. 제대로 올바른 생각을 내기만 하면 그 순간에 누구든 성불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나 똑같이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중생이 유한한 것에 집착을 해 윤회를 면치 못한다고 개탄을 했습니다. 흔히 고집이 세다고 하면 주관이 강하다고 표현하지만, 고집은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인식에 말뚝을 박아 누가 뭐라 해도 귀에 다른 말이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이는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어리석음은 탐심 때문에 오며, 탐진치는 생사윤회의 뿌리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치를 알고 정신차려 부처님 길로 가야겠다 발심하는 공덕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우린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과 신통은 믿지만 자기의 성품을 믿는 것엔 아주 미약합니다. 자성이 소유하고 있는 가치가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데 우리가 믿지 아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다생겁래로 지어온 모든 업들이 자성을 뒤덮어 지정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가리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허공이 아무리 무한하다고 해도 구름이 끼면 허공이 꼭 무너질 것 같습니다. 태양이 밝다 해도 구름이 끼거나 밤이 오면 그 밝음이 소용 없으나 밝음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현명한 사람은 내일이 되면 해가 뜬다고 믿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내일 해가 안 뜨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이라는 말은 전도되었다는 뜻입니다. 중생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부 옳은 줄 알고 있습니다. 바른 도리에서 보면 모두 생각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런 중생이 모여 있는 곳이 사바 세계입니다.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발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현실의 유한한 것만 믿습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해 가는데 이 것을 잡아 소유하려고 애쓰니 애타고 목마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선 ‘갈애漫愛’라고 표현했습니다. 「열반경」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봄날에 가뭄이 들자 온 천하의 물이 말라 있었습니다. 이 때 목말라 있던 사슴이 산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니 언제 비가 왔는지 들판이 온통 저수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을 보자 어찌나 좋던지 언덕을 쏟살같이 내려가보니 바로 앞에 보이던 저수지가 저쪽 언덕 너머에 있었습니다. 그래 다시 뛰어가니 또 저만큼에 물이 보였습니다. 사슴은 물을 찾아 하루종일 뛰어갔고 뛰어간 만큼 목이 더 말랐습니다. 사슴이 본 물은 봄날의 아지랑이였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경」에 이를 ‘갈록 渴鹿’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미국에 가 네바다 주를 지나는데 사막의 모래가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것으로 보여 이 ‘갈록’이라는 단어를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영원하고 참된 것인줄 알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행복인줄 알고 쫓아가는 것이 물찾아 쫓아가는 사슴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자성이 무한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성이 개발만 되면 무한한 잠재력이 터져 나옵니다. 그때를 견성했다, 성불했다고 합니다. 자성이 열리면 무한한 광명과 신통이 터져 나오는데, 이것을 자성공덕이라고 합니다. 자성을 열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을 발심했다고 합니다. 그 발심의 공덕은 부처님이 설명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눈앞에 집착한 병올 고치기 위해선 멀리 띄워야 합니다. 끊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을 만들지만 않으면 됩니다. 공부를 하는 첫째 조건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다 기도를 하거나 좌선을 할 때 밖으로는 엄하고 설킨 반연을 먼저 끊고 안으로는 구하는 생각을 끊는 것입니다. 안이 차단되면 그 사람은 저절로 도에 쑥 들어가 버립니다. 미련한 나뭇꾼이 나무를 베어 잡아당겼더니 안나왔습니다. 고생 끝에 어디 걸렸나보다 하고 가지를 다 쳤더니 쑥 나왔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같습니다.
공부를 하려면 정부터 끊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없으면 큰일 날 줄 아는데, 그러나 정을 끊는 것 만이 참으로 살길인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은 나에게 오지 않고 근심 걱정만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때문입니다. 정만 끊으면 모든 행복이 다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등록」에 나오는 황벽 선사의 이야기는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황벽 선사가 열세살쯤 되었을 때 출가를 해야겠다고 하자 홀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놓아주었습니다. 그 뒤 스무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가 바람결에 들으니 어느 큰 절에 큰스님이 되어있다고 해 꼬박 일 년을 걸어 황벽 선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밤에도 제대로 짐을 자지 못할만큼 아들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만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아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일주문에 도착해 기쁜 마음으로 지나는 스님에게 황벽 선사를 찾아 왔음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황벽선사는 대중을 전부 모아놓고 일렀습니다.
“그 늙은이에게 물 한모금이라도 주는 놈이 있으면 당장 쫓아내리라.”
물 한 모금 얻어 마사지 못하고 그 길로 돌아선 어머니는 너무 기가 막혀 생각합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정이 무엇이기에 만 리 길을 멀다 않고 여기까지 왔던가. 도대체 자식이 무엇이며, 정이 무엇인가.’어머니에게 그것이 화두가 된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않고 그 화두에 몰두해 가다 보니 나루터에 닿아 물에 빠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물에 빠져 죽는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강가에 빠져 죽어 육신은 물에 떠내려가는데 영혼은 아들에게 얘기합니다. 아들아, 참으로 고맙다. 금생에도 내생에도 모자의 이 정 때문에 고생할 뻔 했는데 오늘날 너로 인해 내 고통이 영원히 끊어졌으니 참으로 고맙구나. 나는 육신은 버렸지만 영혼은 부처님 세계로 간다.’
진정한 발심을 못하고 정에 떨어지면 자신도 영원히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과 같이 뒹굴고 있는 것이 사바세계의 모습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부처님을 믿는답시고 ‘이 절 가면 영험 있는가, 저 절의 쇠부처는 고불이라 영험 없다’ 하며 이 절 저 절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봉사가 제 눈을 뜰 생각은 안 하고 왜 이리 세상이 어둡냐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생각이 바로 들어야 부처님 곁을 향해 가는데, 생각이 뒤틀려 있으니 거꾸로 가면서 부처님이 멀리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피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부처님을 자꾸 등ㅈ지고 가면서 부처님의 가피력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믿고 발심하면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