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마음의 고향이 된 해인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나의 행자시절 - 일관 1998년 06월 196호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한지 벌써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월만큼이나 해인사도 많이 바뀌었다. 해인사 종무소 앞에서 어떤 스님에게 입산하러 왔다고 하자 스님은 나를 궁현당 공양간 행자 반장에게 안내해 주였다.
지금은 내가 해인사에서 스님을 처음 만난 종무소 건물인 사운당도 새로 지어졌고, 처음 행자 반장에게 안내된 궁현당의 후원도 없어지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팔만대장경각의 국간사 간 판고와 그 아래에 있는 작은 법당 몇 채와 해탈문, 봉황문, 일주문 따위만 그 때의 모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궁현당과 경학원 사이에 있던 원주 실채는 물론 원주실과 수각사이에 있던 행자실도 없어졌다. 또 행자실과 담을 같이 하고 있던 아름다운 수월문과 삼소굴, 창고도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그 때는 원주실 아래 채공보살님방과 마주한 행자실과 원주실 끝에 있는 윗방 행자실, 궁현당에 있던 공양간과 관음전 끝에 있는 갱두간. 극락전 아래 있던 채마밭, 경학원 옆에 있던 장독대 그리고 장독대 아래 있던 창고 들이 행지들이 주로 생활하던 곳이었다.
해인사를 떠난 지 십 년 동안 중노릇의 모든 습의를 익혔던 해인사를 한번도 찾지 못했다. 그 동안 여러 명의 방장 스님과 주지 스님이 바뀌면서 해인사의 모습도 내가 살 때와는 달리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어느 곳에 살아도, 십 년을 아니 오십 년을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해인사에 못 가더라도 스스로 해인사 중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공부하며 여러 어른 스님들을 모신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좋은 도반들을 얻은 것을 소중히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해인사에서 중이 된 것이 내게 무한한 축복이다. 그곳에서 출가해 공부하지 않았다면 대중생활을 익히지 못했을 것이고 승가를 보는 안목도 좁았을 것이다. 강당과 선원에서 뛰어난 학인들과 수좌 스님들을 만난 것도 해인사가 내게 준 기쁨이다. 학인 시절과 수좌 시절에는 어디에 갔다가 가야산 골짜기에만 들어와도 내 집에 올 것처럼 포근히 느껴졌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행자시절을 해인사에서 보냈고, 그 인연으로 해인사를 내 마음의 고향으로 심어 놓았기 때문이리라.
그 때 수각이 앞에 있는 행자실은 무척 좁았다. 행자실에는 평소 삼사십명의 행자가 생활하고 있었으며, 행자실 벽에는 전에 해인사 주지를 하셨던 지월스님이 쓰신 \'하심下心\'이란 글귀와 혜암스님께서 행자들에게 내리신 \'구도고행求道苦行’ 이란편액이 걸려 있었다. 큰스님들이 행자들에게 글을 내리신 큰 뜻은 잘 모르겠지만, 스님이 되려면 모든 것을 크게 버려야 한다는 뜻인 것 같고,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참어내야 한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뜻이 어디에 있든 큰스님들이 행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 것만으로도 해인사와의 인연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 행자실 규칙은 참 엄격했다. 절대 복종, 절대 금지 따위와 같은 무시무시한 글귀가 여럿 있었다. 그 때는 합동계단이 아니고 사찰마다 수계를 하던 때라 삼개월에 한번씩 수계식이 있었다. 육개월의 행자과정을 마친 행자들이 은사 스님을 정해 수계를 받곤 했다. 수계를 얼마 앞둔 행자들은 윗방 행자실에서 한가롭게 있으면서 은사 스님을 정하고 바깥출입도 하면서 모든 소임을 놓고 편안히 지냈다. 이 모습을 본 학인 스님들은 비아냥거림으로 이들을 조실 행자라 불렀다. 조실은 절에서는 가장 큰 어른이란 뜻인데 행자실의 어른이란 뜻으로 조실 행자라 불렀다. 삼 개월 뒤나 육 개월 뒤에 같이 스님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때는 왜 그렇게 밑에 들어온 행자들을 괴롭혔는지 …. 조실 행자는 행자실의 규율을 책임지고 있는 행자 반장도 혼내고는 했다. 가야산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다.
그때의 행자교육은 행자 중강을 두어 염불과 초발심자경문을 삼개월 단위로 가르쳤다. 나의 입산은 염불을 중간쯤 배우고 난 뒤였다. 그런 까닭에 염불을 익힐 기회가 없어서 중이 된 지 십 년 동안 반야심경도 다 못외는 중이 되고 말았다. 해인사는 여러 곳에서 학인들이 몰려와 경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해인사서 중이 된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뛰어난 스님들 때문에 목탁을 잡고 염불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나와 같은 애송아 중에게는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뒤에도 어디에 나가서 염불을 할 기회가 생기면 당황했고, 또 자리를 피하곤 했다.
행자시절 일과를 마친 틈틈이 염불과 초발심자경문을 외우고, 밤에는 아랫방 행자실에 모여서 행자 중강스님을 모시고 공부했다.
행자들의 소임은 채공보실님이 만들어 준 반찬을 큰방스님들께 올리는 큰방상, 손님이 오면 상을 보는 간상, 공양을 하는 공양주, 찌게를 끓이는 찌게상, 국을 끓이는 갱두 소임이 있었다. 이 소임은 뒷날 스님들이 산 속에서 혼자 수행할 때를 대비해서 돌아가며 익히게 했다. 서로 다른 소임을 번갈아 맡으면서 더 맛있게 더 잘하려고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난생 처음하는 일이니 얼마나 서툴고 모자랐겠는가. 그나마 잘하겠다는 그 마음이 부족함을 조금은 메우지 않았나 싶다.
행자실에는 입방식이란 것이 있었다 입산한지 한달이 지나면 행자반장이 삭발을 시키고 갈등하는 마음이 가라앉을 무렵 행자로 받아들이는 의식이다. 이 입방식 전에 꼭 삼천배를 해야 한다. 소임 중간에 작은 법당에서 절을 하고, 행자실로 내려와서 몇배 했다고 행자반장에게 보고를 했는데 나는 한배도하지 않았다. 나는 그 무렵 뜻 모르고 하는 절은 하기 싫었다. 지금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도 이해할 것 같다.
행자시절 소임을 보다 말고 행자들과 운동장에 가서 공을 차며 축구를 하다가 강원 입승에게 경책받던 일, 여자 행자가 들어와서 같이 지내던 일, 전국의 도인 행자들을 여럿 만난 일, 서로 신심을 너무 내다가 싸움을 한 일, 날마다 운동장 운력에서 남겨 오는 불은 라면을 안 먹겠다고 공양주와 다투던 일 둥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 모든 경험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내 모습이 갖추어지지 않았나 생각하니 다 소중하다. 가야산 해인사 그곳의 스님들과의 인연됨을 다시 감사드린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