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일곱 명의 할머니가 나눔의 집. 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한식구가 되어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함께 지내면서 나는 할머니들의 아픔이 무엇이었는지를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군위안부로 갔다왔다는 것을 신고하고 자신을 드러내기까지는 수십번에 걸친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나눔의 집에 사는 김순덕 할머니의 경우도 그러한 갈등은 예외가 아니었다. ‘70평생 숨기고 살아왔는데 지금 다 늙어서 말한들 무엇하랴’ 함께 사는 가족에게도 혹여 정신적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신고하고 난 뒤 당신 스스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아픔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정부의 망언은 계속되었다. 돈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간 것이지 일본정부가 관여한 적이 없다는 말에 김 할머니는 화가 나고 억울해서 신고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 뒤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밤이 되면 악몽에 시달려 잠을 깨어야만 했다.
한평생을 외롭고 고독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할머니들. 아픔과 고통은 달리했지만 그 크기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길들여진, 혼자 사는 방식에 익숙한 할머니들의 나눔의 집에서의 공동체 생활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그야말로 세상 실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배워야했다.
할머니들은 글씨를 몰랐다. 물론 전화도 할 수 없는 할머니가 대다수였다. 그래서 지원봉사자를 통해 한글수업과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였다. 70대 학생을 가르치는 20대 선생님들의 노력은, 일부 중간에 탈락한 할머니도 있었지만, 꾸준히 계속되었다. 일 년이 지나자 할머니들은 기본적인 한글은 물론 아라비아 숫자도 익히고 서툴지만 전화 거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그림을 지도하는 화가 이경신 씨의 도움으로 할머니들의 그림 실력은 어느 화가도 흉내낼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수업을 시작한 지 삼 년이 되던 해부터 할머니들은 당신들의 과거를 드러내고 그 고통스러웠던 마음을 붓을 통해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림을 통한 심리치료를 기대했던 지도 교사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도 했거니와 할머니들의 드러냄의 과정 또한 꾸준하고 눈물겨웠다. 95년 서울에서의 전시회를 시작으로 일본의 주요도시를 순회하기 시작한 그림 전시회는 세상 밖에 오십 년 전의 과거를 지금에 재현하고 과거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할머니들의 일상적 삶에 변화가 왔다.
공동체 생활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큰 변화는 일본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집회 시위이다. 정오에서 한시까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드나드는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일본대사관 직원에게 우리의 항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93에 시작 하여 올해로 벌써 육 년째를 맞고 있는 수요집회는 할머니들의 삶과 의식을 변화 시키는 중요한 사건이다. 수요집회를 통해서 할머니들은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가고 동시에 함께 참여하는 유일한 행사로써 동료와의 관계를 맺어 나간다. 그리고 한목소리를 외친다. \"일본은 사죄하고배상하라\" 고.
삼백여 회를 넘긴 수요집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7년 일본이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고베 지진이 발생한 날을 제외하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싸움은 끝이 없다. 비록 나눔의 집에서 일본대사관까지의 거리가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사이 나눔의 집도 외형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서울 서교동에서의 전세 생활이 끝나고 다시 혜화동 명륜동을 거쳐 95년 12월에는 불자연 조영자님의 대지 기증과 지난 사년 동안 모금한 기금.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지원에 힘입어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대지 육백사십 평, 건평 백팔십여 평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 안착하게 되었다. 한적하고 외진 시골이지만 이 곳 할머니들의 생활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사 온 뒤 처음 맞이하는 지루하고 황량한 그 해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할머니들이 앞다투어 밭으로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삶은 이제 다시 그 기나긴 고통의 끝을 지나 다시 흙을 만지고 그 곳에서 새 생명을 느끼는 자연으로 돌아온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난 몇 해 동안 할머니들은 감내하기 힘들었던 역사의 현장 그 한가운데서 아귀 전쟁과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했는지도 모른다. 나눔의 집터를 이곳 시골로 택한 이유 중의 하나로 할머니들의 인생역정과 연세에 어울리는, 인생의 노년기에 자연을 대하고 자연을 통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도 있었다. 그 해 봄을 시작으로 하여 할머니들의 삶은 또 새로워졌다. 일구어 놓은 땅에 상추, 배추, 깻잎 둥 채소도 심고 옥수수, 호박도 심었다. 가꾸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어느 사이 할머니들의 밥상에 올라오는 먹거리들이 웬만큼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상추에 된장을 얹어 먹으면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땅을 대하는 일 외에 할머니들이 펑소에 입버릇처럼 우리 주위의 어렵고 불쌍한 이웃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을 실천하는 시간도 가지고 있다. 지난해에만 해도 장애인 단체인 소쩍새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고 기지촌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두례방을 방문 그들 삶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으며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는 북녘동포를 위한 성금보시와 아울러 거리에서 캠페인도 벌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힐머니들은 서서히 자신과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에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것을 숨기며 살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소외된 이웃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을 수 있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