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 푸른 시절은 언제나 내 가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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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오성
1998년 06월 196호
오늘은 천팔십 회 참회 정진하는 날, 경전 한 권이 끝나면 제주의 어느 한 절을 정해 매번 참회정진을 한다. 이번에는 관음사로 장소를 정했다.
조선말까지만 해도 복들이 산신제를 지내던 산천단에서 청초 우거진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다 보면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을 더욱 신비롭게하는 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곳은 차에 시동을 끄고 멈춰서면 차가 오르막길을 거꾸로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어서 사람들은 도깨비 도로라고 부른다. 그 곳에서부터 너른 들녘에 펼쳐진 더덕밭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관음사가 있다.
일주문을 건너 사천왕문을 지나면 절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법당 뒤로 펼쳐진 아름드리 밤나무 밭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소담하게 정돈되어 절의 역사를 알려 주는 공덕비들과 팔각정이며 영산전이며 삼성각이 소박한 멋으로 숲의 정취를 한층 더하고 있다. 이 밤나무 숲은 절을 창건하던 초창기에 스님들께서 심어 놓은 것들이다.
어쩌면 관음사를 찾는 이유가 부처님께 참배하는 것보다는 이 밤나무 숲에 드리운 순수한 영혼의 햇살을 만나고 싶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세간의 잡다한 소리를 뒤로하고 밤 숲의 푸른 새 소리와 이름 모를 야생의 풀꽃들을 만날라치면 그 누구라도 처음의 저 여린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곳을 올 때마다 출가를 한다.
삼십여 년 전 어렸을 적 이곳에 살던 나에게는 오늘의 정진법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때만 해도 지금 처럼 법당이며 요사채들이 없었다. 네 다섯 평쯤의 양철 지붕을 머리에 인 인법당에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스님이 기거하셨고, 나이 드신 비구니 스님과 공양주 보살님과 나 셋이서 건너 채에 살랐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4.3사건 때 완전히 타 버린 절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며 도량을 정리하고 밭을 일구느라고 모두가 하루종일 바빴다. 그런 데에다 또래의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 도량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저 자연만을 벗 삼았기에 말을 배우는 것도 더디었다. 언젠가 흙장난을 하다가 옛 물건을 발견하고는 신기하게 여기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간 사에 찌들었다 해도 언제나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그리는 푸른 시절은 언제나 내 가슴에 있다. 지금의 절은 예전의 가난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있지만 공덕비들이 있는 곳에 가면 과거는 현재가 된다. 낯선 방문객에게는 특이하게 다가오는 장면이 있다. 근대 제주불교의 개산조로 불리는 비구 회명스님과 비구니 봉려관 스님의 비가 가운데 나란히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구니 스님의 비가 훨씬 더 큰 것이 그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회명 스님의 법상좌이다.
조선시대 척불정책으로 제주에서는 절과 스님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암흑의 일제 침략기에 이르러 한 담대한 비구니 스님에 의해 불법이 다시 홍포되었다. 지금도 사천왕문을 지나 절 도량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비구니 스님이 대비의 원을 기도했던 조그마한 굴이 있다. 그 굴은 한 사람이 발뻗고 눕기도 힘들만큼 작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인적도 없는 한라산자락의 아미봉 밑에서 제주의 불법은 되살아난 것이다. 이를 터전으로 지금은 도시에 묻혀 버린 포교소 대각사를 짓고 진리의 법음을 회명스님이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불자들은 범접하기에 멀게 느껴졌던 큰스님보다 늘 가까이 있던 관음의 봉려관 스님을 더욱 크게 기리고자했던 것 같다. 관음사는 제주 불자들에게 신앙의 고향이다.
두 분 스님의 비 그림자에 숨은 이세진 스님의 비가 있다. 그 누구도 스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문을 보면 제주 한림읍 저지 출생으로 백양사에서 출가하였으며 혜안이 밝아 법문을 잘하였고 상좌에는 누구 누구가 있다고만 되어 있다. 언젠가 상좌분을 만나 스님에 대해 물었더니 훌륭한 스님이고 전란 때 끌려가서 돌아가셨다는 것밖에 모른다고 했다. 또 어떤 스님의 말을 빌면 승려 교육기관을 지으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도에게서 시주를 받아 생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급자족해야 한다며 기와 공장과 숯가마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란 뒤에는 어떠했는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4.3 연구소의 한사람을 만났더니 서북지역의 유격대 사령관이었을지 모르겠고 아마도 협재굴 앞의 바다에 수장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확연하지가 않다. 관음사 주지를 지낸 것도 아니고 다른 스님에 견주어 큰 공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그 스님의 비를 이 곳에 왜 세워놓았는지가 사뭇 궁금하다.
이렇듯 관음사는 제주불교를 바로세워 보고자했던 여러 스님과 재가자들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천팔십 배의 절이 끝나고 있는 지금 삶의 어느 곳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오월의 절은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많은 절들이 불사를 한다. 불사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그 불사에 경제적 의미만 있고 수행정신은 빠져 있지는 않은지, 법당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커다란 구조물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참된 발원은 무엇인지, 옛 스님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깊이 있게 생각해 볼 때이다.
가끔 지나는 길에 어쩌다 이곳에 들르면 기도하는 스님의 목탁소리는 들을 수도 없고 정진하다 방선 죽비소리에 포행 나온 노스님의 뒷짐도 볼 수 없기에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그런데 오늘 다른 불자들이 와서 수련대회를 한다고 사뭇 엄숙하다. 그것에다 마침표를 찍어 본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