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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소리, 소리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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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만의 악수 - 김사인/시인 동덕여대교수 1998년 06월 196호
팔만대장경을 음악으로, 그것도 신디사이저를 동원한 현대음악으로 받아낸다는 일은 대체 어떤 일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산중불교의 허울을 벗으려는 불교계의 이 신선한 발상에 우리는 먼저갈채를 보내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 좋은데, 그것이 어떠한 음악적 감수성을 통하여 어떤 작품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재능있는 음악인 김수철이 2년 반의 세월을 기울여 빚은 성과의 일부를 이제 한 장의 음반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경하해마지 않을 일입니다.
음반에서 그는 \"팔만대장경이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초월한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기인하여 서앙의 소리와 우리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을 작곡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과연 소리의 장엄함과 서정적 기품은 근년 우리 음악계 전반의 수확으로 보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신디사이저는 첨단의 서양식 기기와 피리, 태평소, 북 등 우리의 전통 악기를 결합시킨 음악 ‘팔만대장경의 시도 역시 뜻 깊은 것이라 해야 옳겠습니다.
대장경의 팔만사천 법문을 음악으로 맞받아내기 보다 김수철은 고려 팔만대장경 조성의 역사적 배경과 호국 불교적 법력을 음악을 통해 서사敍事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합니다. 음악 \"팔만대장경\"은 서곡 다가오는 검은 구름, 2장 전장戰場에서, 3장 구천九天으로 가는 길, 4장 천상天上의 문門에서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각각이 나름의 독립성을 갖는 가운데 방대한 스케일과 장엄함, 서정성이 전곡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따로가 \'시각적 음악\' (visual sound)이라고 명명했던 공감각적 음향의 운용을 적극 채용함으로써 김수철은 돋는 이들을 즉각적인 영상적 연상을 통한 감동으로 이끌어가며, 서사적 의도를 성공리에 달성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음향 운용방식의 효과는 우리가 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익히 보아온 바 있으며, 대중의 정서적 호응을 얻는데 특히 유용할 터입니다.
전곡의 곳곳에서 김수철의 감각과 재능은 유감없이 빛을 발하지만, 특히 마지막 장 \'천상의 문에서’는 압권이라 할 만 합니다. 반복, 변주되는 두 개의 주제부가 동반하는 비애와 지혜가 마치 투명한 초가을의 바람과 별처럼, 관세음보살의 슬픔과 자애로움인 듯 듣는 이의 마음을 위무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서너 차례의 강렬한 두드림과 함께 고조되는 후반부는 현상의 장려함과 정법正法의 위엄, 대화엄大華嚴의 음악적 형상화로서 작품의 절정을 이룹니다. 자비와 위엄의, 비애와 환희의 이 아름다운 통일이야-말로 2년 반에 걸친 김수철의 노력이 도달한 어느 경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다소간의 서운함 또한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문외한인 나로서는 마지막부분의 피리 연주-피리나 대금의 선율은 그의 작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데-의 음악적 의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애잔함과 처연함, 체념 어린 달관과 풍류의 동양적 음색으로서 피리소리의 가능성에 그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짐작은 하겠으나, 앞부분의 소리들과 과연 잘 어우러지는 것인지, 소리의 무게와 깊이와 폭과 빛깔에 있어 합당한 균형과 대위代位를 이루었다 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통 악기에 대한 우리의 음악적 사유와 천착이 아직은 부족한 것이 아닌지. 결말부 역사 화엄華嚴에 이르렀던 소리들의 회향回向으로서는 다소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충만한 나지막함, 비범을 넘어선 평범의 표정을 나는 기대했던 것인지요.

자문컨대 소리란 과연 무엇일지요.
지구공전의 속도가 시속 십만팔천 킬로미터이고 적도권의 자전 속도가 시속 일천육백 킬로 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속도에 소리가 없지 않을 터이니, 우리는 소리 가운데 나서 소리 가운데에서 스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몇 해 전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제목의 소설책이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이것 역시 수월하게 들어 넘길 말은 아닌 듯했습니다.
사람만 하더라도 다 제가끔의 ‘청’ 이 있어 우리는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를 알아냅니다. 가까운 짐승들은 물론이고 새들과 온갖 찬피동물들과 심지어 곤충, 하루살이들까지 모두 제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바스락거리고 꼬무락거립니다. 보통사람의 귀가 들을 수 있는 범위의 소리들만을 놓고 생각해도 그러할진대, 사람 중심의 잣대를 넘어서 생각해 보자면 풀과 나무, 돌과 바람과 물이, 떠도는 먼지 하나 조차 다 제 소리를 가지고 있을 터입니다. 그리고 이 고유한 바스락 거림이야 말로 우리가 사물을 분별하기 위해서 붙여 부르는 이른바 \'이름’ 이란 것 보다 한층 자명하고 본연에 더 근접하는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 새뿐 아니라 하늘 아래 모든 \'一인 것’들은 제 소리를 내며,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것이 되겠습니다.
일단 사물이 제 발성기관을 떨거나 또는 다른 사물에 부딪쳐 내는 소리를 우리는 대개 그 사물의 소리라고 합니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미시적 세계에서는 모든 소립자들이 입자이자 파동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입자인가 하면 형체 없는 파동이고, 파동인가 하면 또한 입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유의 부인할 수 없는 본질이 떨림, 파동이며, 이것은 빛 또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한즉 오온으로 이루어진 온갖 거시 세계의 형상들 역시 실은 한갖 소리뭉치, 빛묶음, 신기루(Maya)에 불과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온갖 천지간 유정, 무정들의 존재의 지속이란 곧 자신의 고유한 주파수(1초당 진동수)의 지속인 것이며, 그것은 혼선의 외마디의 지속과도 같은 것인 동시에 또한 허망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진동의 종식과 더불어 해체되어 사대四大로 돌아가는 것일 터입니다.
그러하니 우리가 목소리를 들으면 또한 그 온전성 여부를 알아볼 수도 있는 것이겠습니다. 아픈 이-존재의 자기동일성이 훼손된 이-의 소리는 그 파동이 불안정한 것인 까닭이지요. 이것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적용 가능한 현상일 것입니다.
이른바 이름다운 소리, 좋은 소리가 사물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면 심지어 부처와 조사들의 설법에 있어서도 그 말과 뜻도 뜻이지만 육신의 북통을 거쳐 아름다운 영혼의 경지가 발하는 그 소리가 더 윗길의 법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말의 뜻을 몰라도 염불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일각의 입장, 또 육자대명주를 비롯한 정수진언들의 법력을 높이 여기는 티벳 불교의 입장 속에는 은연중 우주의 본원 파동, 시간과 공간의 처음과 끝을 열고 닫는 근본 소리에의 통찰과 그 힘에 대한 확신이 전제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소리는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미묘 법문일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진지한 소리예술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써 예술은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함의자리에까지 감히 이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튼 소리가 종작없이 길어졌습니다만, 대장경을 음악으로 받는 일이란 거룩한 소리를, 법음을, 진리로서의 소리를, 소리의 진체를, 근원의 파동을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진리의 광대무변 속에 대장경의 조성배경이며, 동서의 구분이며, 고려불교의 호국적 성격이며 하는 것들은 모두 녹아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음악소리는… 침묵과 병행한다.(------)음악에 있어서는 공간의 원근, 한계 없는 것과 한계 있는 것 모두가 하나의 우아한 통일 속에서 영혼의 위로와 은헤가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 음악을 타고 아무리 멀리까지 간다하더라도 음악은 어디서나 영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음악이 불안한 이들에게 평온을 가져다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막스 피카르트의 말을 덧붙이며, 마지막으로 음악 팔만대장경 작업의 아름다운 완성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리하여 그 법음이 천지간 여리고 상처받은 것들을 어루만져 줄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