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야 너만은 천년만년 잘 자라다오
중국 역경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현장법사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만큼 스님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열세살 때 낙양 정토사로 출가한 뒤 십오년 동안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으나 스승들간의 이설異說을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한탄하고 원전原典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인도 유학을 결심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위험한 서역길로 스님을 보낼 수 없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만 당신의 구도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임금도 모르게 일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함께 따라가겠다는 제자 수십 명만
데리고 629년 8월 장도에 올랐다. 출발하면서 절 앞에 있는 소나무를 향하여 비장한 고별시를 남겼다.
내 이제 서쪽 나라 천축으로 가노니
가는 길 험난하여 목숨을 잃거나
천축에 가서 다시는 오지 못할지라도
소나무야, 너만은 천년만년 잘 자라다오.
간병공덕을 통하여 복을 짓다
돈황의 국경을 넘고 사막을 지나면서 겨우겨우 계빈국(캐시미르)에 이르게 되었다. 산 속에서 해는 저물고 안개는 자욱하고 주변에는 짐승 울음소리가 요란하였다. 멀리 불빛이 가물거리는 곳을 향해 겨우겨우 당도해 보니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그마한 암자였다. 더듬어서 문을 열고 하룻밤 묵어 갈까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희미한 신음 소리를 따라가 문을 여니 늙고 병든 스님이 혼자 누워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축 가는 길이 바쁘긴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는 것은 사문의 도리가 아닌지라 그대로 눌러 앉아 머물게 되었다. 원체 정성을 들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세가 이내 차도를 보이면서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현장스님이 다시 길을 재촉하려고 하니 그 노장님은 감사의 뜻으로 범어로 된 반야심경을 한 권 주면서 그 내용을 설해 주었다.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이 경을 외우면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환희심으로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길을 나섰다.
반야심경을 외우자 부처님의 가피를 입다
인도 땅에 도착하여 한숨을 돌리고는 캔지즈 강 상류를 통과하고 있는데 그 곳의 원주민이 떼거리로 몰려나와 다짜고짜 현장법사를 포승줄로 단단히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까닭이나 알고자하여 그동안 배운 인도말로 떠듬떠듬 그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수신水神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 이라는 답번을 들어야 했다. 그날이 공교롭게도 캔지즈 강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사실 죽고 사는 것이야 별것 아니지만 경전도 구하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수장水葬된다고 생각하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전생에 지은 업장이 두터워서 따라오던 제자들 까지 다 죽게 하고 이제 나까지 죽게 되었으니 다쟁겁의 죄업이 얼마나 두텁길래 이런가 하면서 마음 속 깊이 지극 정성으로 참회를 하였다. 그 때 마침 그 간병해 드린 노장님이 \"어려울 때 이 경을 외우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현장법사는 반야심경을 크게 소리내어 세 번 외웠다. 그 순간 히늘에는 새까만 구름이 몰려오고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천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경실색한 주민들은 부랴부랴 스님을 풀어 주고는 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한 짓을 저지름을 머리를 조아리고 백배 사죄하였다.
나란타 대학의 계현스님에게서 법을 받다.
현장스님이 목숨을 걸고 가고자 한 곳은 나란타 대학이다. 그 무렵 나란타 대학은 세계 각지에서 유학 온 수천명의 학승들이 공부하고 있는 불교학의 총본산이었다. 입학은 구두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학식이 고금에 통달한 자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문이 깊은 사람도 열명 가운데 일고여덟 명은 떨어지는 경쟁률을 자랑하는 명문이었다. 드디어 637년 나란타에 도착하였다. 그 때 그 대학의 실라바드라(戒賢) 학장은 현장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법사가 중국을 떠니던 해에 실라바드라 스님은 중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미륵보살이 꿈에 나타나 \"삼년 뒤에 동방에서 한 구도승이 찾아올 것이니 살아남아서 그에게 법을 전하도록 하라.\"는 수기를 받고 병이 씻은 듯이 낫는 몽중가피를 입은 터였다. 현장 법사를 보자마자 그가 미륵보살에게 부촉받은 그 구도승 임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십 년 동안 유식학唯識學을 가르쳐서 그의 법을 잇게 하였다. 시험도 없이 바로 입학하는 특혜에다가 상수 제자로 특별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신의 구도 열정에 제불보살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이러한 커리큘럼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인도 전역의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 모자는 부분을 더 배웠을 뿐만 아니라 불적佛跳을 참배하면서 학자에게 결여되기 쉬운 신심을 더욱 북돋우면서 계속 천축에 머물렀다. 그도 어느새 40대 중반의 원숙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유학의 근본적 동기가 되었던 선지식들간의 이설異說도 원전의 연구를 통하여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제대로 된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일만 남았다. 645년에 범어로 된 경전 육백쉰일곱 부를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오니 대왕까지 마중을 나왔다. 떠날 때는 몰래 도망쳤지만 이건 그야말로 금의 환향이었다. 이제 그는 그 동안 각고 끝에 얻은 법을 대중에게 회향하는 일만 남았다. 태종 임금은 그에게 역경도량을 제공해 주었다. 용이 물을 만난 것이다. 口
원철스님은 지금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정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