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육학년 때였다. 나는 그해 겨울 깊은 슬픔으로 단석산 백석암에 가 있었다. 병원에서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어머니가 편찮아 그분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레 동안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안된다는 절박함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는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부처님을 향해 어머니가 어서 병에서 낫기를 발원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법당문을 나서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던 새벽 별들이 하나 가득 눈으로 들어오곤 했다. 나는 그곳에 부처님이 계실 거라고 믿었고 그곳에서 부처님이 나를 내려다보실 것으로 믿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부처님께서 꼭 어머니를 병에서 낫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를수록 그렇듯 단단하게 또아리 틀고 있던 슬픔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불교가 뭔지 부처님아 어떤 분인지도 모르던 열세살 어린 나이에 무에 그리 신심이 있었겠는가. 백석암은 관음기도 도량으로 이름난 곳이었고 거기서 기도를 하면 영험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귀동양 들은 터라 어머니가 편찮으시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곳으로 기도를 하러 갔다.
아무튼 나는 이레 동안어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를 회향하고 산사를 걸어 내려오는데 절 뒷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새들의 지저김 소리가 모두 관세음보살 소리로 들리는 것이었다. 저벅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까지, 내 귓속으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나는 그 때 알았다. 간절함이 부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그 뒤 병이 많이 나아지셨고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부처님과 만나는 복됨을 누렸다.
나는 경주 모량에서 태어났다. 신라시대 육부 가운데 하나였던 모량에선 신라 원측스님이 태어났고, 효자로 이름 난 손순, 그리고 김대성이 전생에 머슴살이를 이 곳에서 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단일 동네 이름으로 삼국유사에 가장 많이 나온 지명이다. 이렇듯 불교적인 정서가 흠씬 배어 있는 곳에서 태어났으나 우리 집은 집안에서 서당을 운영했을 만큼 완고한 유가 집안이었다. 그런 까닭에 할아버지는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나를 붙들어 서당에 다니게 했다. 두 해쯤 서당 공부를 마치고 결국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때 서당에서 적지 않은 유가서적을 익혔다.
내가 불교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경주고등학교에 들어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은사 임도문 스님을 뵈면서부터였다. 경주고등학교는 분황사와 오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고 도문스님은 분황사에 주석하고 계시면서 점점 쇠해 가는 이 땅의 불교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발굴하고 있었다. 그 때 영남 불교학생회가 서른여섯 개 지부를 둘 만큼 학생회 활동이 왕성했고, 수련회에 사백 명씩 참석해 경주고등학교 강당에서 수련회를 개최하곤 했다.
어느 해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도문스님께서 부르셨다. 수련회 끝에 열렸던 백일장 대회에서 내가 장원으로 뽑혔는데, 초등학교 시절 백석암에서 올렸던 기도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 글을 눈여겨보셨던지 출가할 것을 권하셨다. 사실 그 무렵 육십년대 말, 우리 불교 집안은 분규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특히 경주 지역엔 그런 분규가 심했는데, 도문스님은 출가수행자가 치받고 싸우는 이 땅의 불교 모습을 보면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분은 불교학생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주력하고 계셨고 쓸만한 인재를 출가시켜 이 땅의 불교 중흥에 힘쓰게 하리란 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 즈음 끊임없는 불교 분규를 보면서 왜 저렇게 승려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며 출가승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은사스님의 출가권유를 받자 나는 별 갈등 없이 출가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원을 세웠다. \'그래, 내가 출가해서 바르게 수행하여 한국 불교를 일으켜 보자\' 출가 결심을 하자 나는 곧바로 거처를 통학하던 집에서 분황사로 옮겼고, 바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도량석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열고 낮엔 학교에 가 공부하고 저녁엔 주로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다. 그 때는 우리 학생이 여렷 되었고, 어디서든 서로 만나면 합장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불교 중흥합시다\'
아마도 그 때 일어나고 있던 불교 집안의 분규를 보며 불교가 쇠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위기를 서로들 느꼈던 것 같다. 우리는 박물관에 있던 에밀레종을 사찰로 옮겨야 한다는 운동을 하며 역 앞에서 탑돌이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은사 스님을 모시고 역 앞에서 대법회를 열기도 했는데, 우리의 불교 중흥에 대한 열정은 그러한 장영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황룡사 터에 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고기와를 캐어다가 전국 불교학생회에 하나씩 보냈다. 천년 불교 역사의 혼이 담겨 있는 기와를 정성들여 싸며 우리 모두는 발원했다. 그들에게 신라불교에 대한 이해가 열리기를, 그리고 이 땅의 불교가 그 힘으로 우뚝서기를.
불교학생회의 그러한 운동으로 바쁜 생활속에서도 나는 때로는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완고한 유가 집안의 종손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절집에 들어왔으니 무엇보다 내 어깨에 걸려 있던 종손이라는 무거운 인연을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새벽 도량석을 끝내며, 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검은머리가 희게 변하는 것은 번연히 알겠지만 인연의 핏줄 끊기가 힘들구나’ 그러나 그러한 갈등은 수련회 뒤치닥거리 등 불교학생회 활동으로 바쁜 행자 생활 속에 묻혀 버리곤 했다.
행자 생활을 마감할 무렵 시월이었다. 신라문화재 전야제에 앞서 선덕여왕, 무열왕, 의상대사, 원효대사를 선발했는데, 의상 대사로 내가 뽑혔다. 그래서 의상 대사가 되어 사흘 동안 가마를 타고 경주시내를 돌고 문화제가 끝나던 날, 은사 스님께서 부르시더니 \'이젠 계를 받으라\' 며 옷 한 벌을 내놓으셨다. 삼베옷이었는데 아주 낡은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빌려오신 것 같았다.
육십칠년 가을, 나는 그렇게 낡은 삼베옷을 입고 동현스님을 계사로, 도문스님을 은사로 절집 사람이 되었고, 원효스님이 생전에 오래 머무셨고 그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던 보광전에서 따온 ‘보광普光’ 이라는 이름과 함께 출가사문이 되었다. 불교중홍에 대한 열정으로 행자 생활을 보낸 지 열 달 만이었다.
얼마전 나는 대각사상연구원을 개원했다. 대각을 성취하여 다양한 방편으로 그 깨달음을 사회에 실현한 백용성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우선 용성스님의 사상과 연구성과를 정리한 학술지를 출판할 생각이다. 출가한 지 서른해가 지나도록 내가 가지고 있는 화두는 깨달음을 어떻게 사회에 실현시킬 것인지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연구원을 열기도 했거니와, 내가 학위 논문으로 ‘원효의 정토사상’을 쓴 것도 그것과 한 맥락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성불\' 이리는 출가사문의 대과제는 다음 생애로 미루었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남은 시간들도 \'깨달음의 사회 실현\' 을 위해 정진할 것이다. 저 옛날 행자시절 \'이 땅의 불교를 일으키자\'라고 굳게 발원했던 것처럼. 口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