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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눈물 한 줄기 뿌려본 적 이 없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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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적축 - 원철 1998년 05월 195호
여행기에는 시대상이 반영되어야 한다
요즈음 중앙일보에 북한의 문화유적 답사기를 싣고있는 유홍준교수는 이 시대 여행기의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1. 2. 3은 그저 놀이 또는 ‘구경’ 으로 만 인식되던 여행을 ‘공부’ 로 까지 한 차원 높인 기념비적 작품이다. 사이사이에 양념으로 끼워 넣은 이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무형의 문화유산까지 그 특유의 예리함으로 포착해내는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결과론 적으로 대중성까지 갖추게 되어 이 책을 베스트셀러의 반열로 끌어 올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구 년 전(1989)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에게 강원 교지인「수다라」편집실에서 해인사 서예명품 배관기拜觀記 원고를 청탁한 적이 있다. 그 원고의 특이한 점은 글머리에 서울에서 해인사까지 오는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중간에 만난 사람, 그리고 도움을 받은 해인사 소임자들 이름까지 자세히 나온다. 특히 사하촌인 신부락의 삼일식당 밥상 위에 오른 반찬까지도 자세히 기술하고 매우 맛있었다 는 음식 평까지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때「수다라」5호 편집장 스님은 이를 ‘군더더기라고 생각했던지 그 부분을 임의로 잘라내고 본론 부분만 실었다. 책이 나온 뒤 서울로부터 항의 전화가 왔다. 기행문은 그 무렵의 생활상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세 권으로 나온「명찰순례」해인사편에는 이 앞부분까지 빠짐없이 실려 있다.

구법 여행기는 신심을 증장시켜 준다
신심이 떨어 질 때면 곧잘 구법여행기를 펴보곤 한다. 거기는 선인들의 목숨을 건 구도행각이 구구절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중국 현장(600-664) 법사의 「대당서역기」, 신라 혜초(704」787)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일본 원인圓仁(794-864) 화상의 「입당순례 구법기」 등은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 있는지라 더욱 쉽게 접해 볼 수 있다. 혜초스님도 여행기를 원고 구법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스님은 일찍이 열다섯살때 당나라 광주廣州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경전을 토론하다가 불공금강不空金剛 스님이 인도 여행을 권한 것이 동기가 되어 당나라스님들의 여행기를 구해 읽으면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라에 가서 불교의 진리를 배워 와야겠다 고 발원했다. 열아홉살의 나이로 장사꾼의 배를 타고 일 년이나 걸린 끝에 캔지스 강 입구에 도착하여 인도 각지를 순례하고 난 뒤 육로를 통해서 십 년 만에 당나라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밀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과정을 기록한 것이 그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이다. 스님께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면서 남긴 시는 그때의 괴로움을 잘 보여 준다.
\"그대는 서역 길이 먼 것을 한탄하나,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한탄한다. 길은 거칠고 눈은 산 마루에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 떼가 우글거린다. 새는 깍아지른 메부리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 건너기가 아슬아슬하다. 평생에 눈물 한번 뿌려 본적이 없지만 오늘은 천 줄기나 비오듯하는구나.\"

달마대사는 신발 한 짝을 들고 파미르고원을 넘었고
인도와 중국을 가로막는 파미르고원은 \'세계의 지붕\' 이라고 일컫는다. 중국에서는 이 곳을 총령  嶺이 라고 불렀다. \'조사서래의祖師如來意’ 의 주인공인 달마 대사의 이야 에도 파미르 고원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후위後鏡의 송운宋雲이 사신으로 갔다가 총령에서 신발 한 짝을 들고 서쪽으로 돌아가는 달마스님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역경승들에게 파미르 고원은 혜초스님의 표현대로 \"눈물을 천 줄기나 흘려야\" 넘어갈수 있는 구법의 의지를 시험받는 곳이기도 했다. 「고승전」권3「담무갈전曇無婚傳」(대정 50권 338 중하)에는 이 부분이 특히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총령(파미르 고원)에 오르고 설산雪山을 넘었다. 기후는 변화가 심하여 겹겹이 장애가 되고 층층이 쌓인 눈과 얼음은 만 리에 뻗어 있었다. 아래에는 큰 강이 있었는데 쏟살같이 급하게 훌렀으며, 동쪽과 서쪽 두 산의 허리에 줄을 매어 다리로 삼았다. 열 사람이 한번에 건너가 저쪽 강가에 닿으면 연기를 피워 표시를 하였고, 뒷사람은 그 연기를 보고 도착을 일아 바야흐로 다시 나아 갈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곧 폭풍이 줄을 날려 사람이 강물에 떨어 졌음을 알았다. 떠난지 삼 일이 지나다시 큰 셜산을 넘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안전하게 발디딜 곳이 없었으며, 암벽의 곳곳에서 모두오래된 말뚝구멍을 보았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을 가졌으며, 먼저 아래의 말뚝을 빼고 손으로 위의 말뚝을 잡고 기어올라 계속해서 서로 도와 올라갔다. 하루를 보내고서야 겨우 그 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평지에 도착해 남은 사람을 헤아려 보니 스물다섯 명 가운데 열두명을 잃었다.\"
파미르 고원을 넘은 최초의 중국 숭려인 법현法顯은 「불국기」에서 그 애로 못지 않게 사막을 건너는 괴로움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구절은 강원 사미반의 교과서인 「치문경훈觸門驚訓」의 주註로까지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기도하다.
“나쁜 귀신과 열풍이 많다. 이를 만나게 되면 모두가 죽기 때문에 남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 위를 달리는 짐승도 없다. 사방을 바라보아도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며, 다만 죽은 사람의 뼈만을 표지판으로 삼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험난한 산과 사막의 길을 통과하기 위해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구도에 대한 간절함을 아울러 필요로 했다. 그 길은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살아서 다시 돌아올지도 알 수 없는 그런 길이었다.

종합판 「구법여행기」 저술을 발원하다
신심도 없고 체력의 열세 그리고 구도의 간절함 부족으로 인하여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대륙 및 서역을 관광객 자격으로도 아직 둘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IMF 사태가 해결되고 또 통일이 된다면 북한과 중국을 지나 서역을 거쳐 인도에까지 이르는 길을 달려 역경승들의 고단했던 혼적을 따라가면서 그 어려움의 일부분이라도 함께 나누어 보고 싶다. 그리고 형편이 허락한다면 중국, 서역,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까지 아우르는 종합판 「구법여행기」를 한 권 남기고 싶다. 그런데 그게 잘 팔리려나 모르겠다. 口

원철스님은 지금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써 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