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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 도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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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8년 05월 195호
대둔사 천불전 안 계하에 낮게 된 어린 자목련 제 속에 아직 감춘 것 있어 뾰죽하게 다문 입술에 맴습니다. 그러나 천불전과 키를 겨루고 섰는 백목련은 담 너머로 무엇을 봐 버렸는지 앙가슴 속까지 다 펴보인 채 그저 흐드러져 난만합니다. 그 꼴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해남군 대둔사, 서산스님 영정 모신 표충사 앞, 카랑하게 물 고인 샘 하나있다. 입간판 하나 세우고 글로써 저를 이르되, \"동에는 오심재요 서에는 오도재이다. 오도의 물맛은 그윽히 맑으며 , 오심의 물은 차고 따뜻하다\" 한다. \"차고도 따뜻한\" 물맛을 보려고 몸을 기울이니, 잔바람에 생긴 물 어롱 아래, 칠흑같이 검은 도마뱀 한 마리 미동도 않고 엎디어 있었다.
거기서 너는 무엇을 검게 견디니. 제 속의 움직임을 가눌 수 없어 온 산이 몸을 떨 때이다. 철이 그러하니 그 미물이 견디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정념일 터였다. 산의 절반을 휘덮은 채, 곡하듯 흐드러진 붉은 진달래가 정념이 아닐까보냐.
오오, 그만두소서. 흰 냉이 꽃 노란 꽃다지 내게로 바람 보내지 마소서. 흔들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으니 제발 그만두소서.
일없이 피어 더욱 사무치는 꽃, 냉이 꽃 뿌리째 뽑아 두 손으로 맞잡고 땅에서 일어난다. 굽은 허리에 손을 얹고 지나치던 할머니 한 분이 그 꼴을 바라보다 흠흠 웃는다. 그걸 무슨 귀한 꽃이라구. 이 없는 입으로 웃는 웃음이 느닷없는 가운데, 두류산 대둔사는 봄이 한창이었다. 서산스님이 묘향산에서 입적하시기 전에 자신의 의발을 간수할 곳으로 지목한 곳이다.
\"기화요초가 사철 빛나게 아름답고, 옷감과 곡식이 늘 없어지지 않으니 길게 뻗어 나갈 곳, 산과 바다가 둘러싸 보호하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므로 만세에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기 때문이라 했다. 임란 때에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분,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 데 큰 몫을 했던 분이다.
유촉을 받들어 의발이 이곳에 모셔진 뒤로, 임란과 육이오 등 재화를 만난 일도 없이 환성, 혜장, 초의 등 열셋의 종사와 열셋의 강사를 배출하니, 그의 유언은 허언이 아니었다.
삼산면 구림리 장춘동, 봄이 긴 동리라니 겨울이 짧을 이 곳, 이 곳의 겨울은 동백이 깨운다. 서산스님이 일렀던 \"기이한 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적송과 단풍과 참나무와 느티나무 들이 십 리로 이어지는데, 해묵은 동백나무들이 그것들이 지우는 그늘 아래서 준열히 보여 주는 바 있다. 동백은 나뭇가지 위에서 지지부지 짧 말리는 법이 없다. 한겨울 맵짠 수행 끝에 탐스럽게 피운 꽃송이를 한순간에 놓아 버린다. 오온으로 파악하던 것이 모두 환幻인 줄을 일념회광으로 꿰뚫어 본성에 도달하듯이.
금당천이 갈라놓는 남원과 북원은 심진교 다리로 이어지고, 남원의 끝자락 언덕에는 여러 백 년 묵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개울을 내려다보고 서있다. 어쩌면 서산의 의발이 이운되는 날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르는 나무다. 도형스님은 그 그늘 아래 납작히 엎디어 지어진 봉향각에서 이 봄날 보내고 있었다.
도형스님이 처소로 삼고 있는 이 곳은 운기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곳이다. 스무 해 전에 천불전 도량을 사이에 둔 용화당에서 그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화장암 시절을 시작으로, \"뚝섬 봉은사\"에서 그를 모시고 있다가, 위의 절반을 자르는 큰 병고를 겪으면서도 그를 휘어잡고 놓지 않았던 화엄에 대한 미진함을 짬지게 푸는 자리였다.
운기스님은 박한영 스님의 전강 제자로서, 임제종인 석옥 청공-태고 보우-서산-백파-박한영 스님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서산 법맥\"의 맥을 잇는 분이다. 스무 장이 넘는 분량을 오전에 헌번 훑고 오후에 한번 새기어 읽고는 그 다음날 스승 앞에서 장을 외어 바치던 분이었다.
탄허스님은 장자 강의를 하실 적에 책도 없이 분필 하나로만 시작하여 끝을 냈다는데요 그러고도 천하제일 소리를 들었다는데요.
나도 삽십대는 그쯤 되었었네. 하루에 스무 장을 별 공력 없이 외는 스님 재주에는 못 미치지만, 부처님 뜻을 꿰어 보기는 저도 스님 못잖을 터입니다요.
말씀이 드물고 조용하던 분이 때로 대범해지고, 덩달아 무릎 제자도 호기를 부러 볼 만한 자리에서 오간 얘기이기는 했겠다.
범어사에서 고작 석삼년 중강 소임을 맡았다가 그의 슬하로 다시 온 후학에게서 만만히 들을 말은 아니었을 터이나 사제간의 도타운 정화를 짐작하게 하는 말은 되어 줄 터였다. 운기스님은 그렇게 \"무애 탕탕했던\" 그에게 전강게를 내리시니, 스무 해 전의 그 글귀를 다시 더듬어 보는 그의 낯빛이 처연하다. 한암스님 몫까지, 못다 한 당선 몫까지 해달라던 운기스님은 이 방에 없고, 그저 펴 그림자만 그가 본다.

화장 십흘 속에 있을 적에
그대 푸른 눈을 대하여
깊은 성인의 가르침을 연설했었다.
두륜산 달 밝은 밤에 다시 자리 나누니
한번 빛나는 구름이
푸른 호수에 비치는 것과 갈도다.

아침에 도량석 듣고 일어나 예불하러 갈 마음을 간추리기도 하고, 내키는 대로 좌선이나 와선을 하는 방, 사경을 하기도 하는 그의 방에는 천 권은 확실히 넘어 보일 듯한 서책으로 가득했다. 천불전 꽃창살에 되쏘인 햇살, 그러나 창호지 바른 문을 거쳐 들어와 유순해진 햇살을 비껴 받고 앉은 그의 얼굴은 무심하다.
무락이 내 요즘 낙이요.
낙에는 천상락과 삼매락과 열반락의 세 가지가 있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건만. 올해로 속납이 쉰을 넘고 법납이 사십인 그가 하는 밀이다. 서안 위에는 대승기신론이 펼쳐져 있고, 어록을 읽다가 마음에 접히는 귀절을 적어 둔 것이 책 권이나 되어 보이는 나날을 보내는 그가 오늘 같은 봄날에 하는 말이다. 열세 권의 삼현과 열 권의 십지를 다시금 들추어보되, \"내 마음의 내 화엄경을 내가 본다.\" 했다.
무안의 마곡사와 화순의 용암사, 구례의 화엄사를 거쳐 해인사에 이른 것이 67년, 그의 나이 열아홉일때였다. 도량석 낭랑히 마친 다음 미리 싸둔 걸망을 지고 삼십 리 밤길을 걸어 내려와 해인사로 가는 차를 탔으나 차비가 모자라 분기에서부터 걸어 찾아간 곳이다. 석 달 산감을 살 수 없어 보인다고 내쳐지려는 것을 지관 강주 스님을 붙잡고 생떼를 썼다. 돌아갈 차비도 없습니다. 스님.
강원이 폐강되는 바람에 대교과정은 통도사에서 마쳤으나, 삼천 배 올리고 난 뒤 성철스님에게서 이뭣고 화두를 탄 곳이기도 한 해인사는 그가 초심을 야물린 곳이라 할 만했다. 67년 그 해에 해인총림이 개설되었으니 , 이후로 한국 불교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토대가 닦이던 때, 아침 공양은 어김없는 죽이었고, 남포불 아래서 글을 읽던 시절, 그러나 나라 안 최초의 총림으로서의 삼엄한 법도와 청규를 고스란히 제것으로 삼아나갔던 곳이다.
학인 시절은 도반들과 함께 두름성있게 어울리며 지내기보다는 “고독하게” 홀로 책상을 지키곤 했었다. 이 말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청량스님, 현수 법장스님이 하신 말이여 쉼표처럼 마침표처럼 이 말로써 말을 쉬고 끝을 마무리짓는 그의 어법에서, 꼬장꼬장한 마음, 휘어 갈 줄 모르고 외길로만 닫는 듯한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부처님 공부란 위법망구의 정선으로 원력을 세워 하는 것이여. 그것을 어찌 “재미”라고 하는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만 경학을 하고, 이후로는 좌복에 앉으리라. 그러나 그 길이 그의 나이 스물두엇 될 무렵, 운기, 운허, 작성, 법정스님 들이모여 살던 \"뚝섬 봉은사\" 시절에 병고를 만나 어긋나 버렸다. 범어사 최연소 강주 소임을 맡은 것이 81년, 그의 나이 서른이 갓 넘었을 때였다. 그 꼬장꼬장함으로 강석을 베풀다가 서암스님이 조실로 계시는 봉암사 선방에서 석 달 용맹정진을 했다. 마흔 명 선객 가운데 \"삼십년 법랍짜리\"는 둘도 없던 자리였다. 알음알이도 깨치면 지혜요, 깨치지 못한 분상에서는 화두도 알음알이요 망상이라. 망상으로써 망상을 제압하는 도리인데 , 그것도 조사 말씀이라. 이승의 경지에 올라 팔만 겹 선정 속에 든다 해도 그것에 집착하여 머무른다면 반야심에 미치지 못하는 단견이라. 팔만 겹 시간이 끝나면 중생과 같은 생사 윤회의 길로 다시 빠지고 말아부러 . 부처의 뜻과 십만팔천리 떨어진 것이라. 장 담그고 화초 기르는 일 같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초의스님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간경이나 염불이나 참선이나 불상과 불탑을 지성으로 만드는 것이 모두 도를 깨칠 길이라 여긴다. 그는 강원에서 화엄경을 가르쳤다.
아무 경이 되었거나, 짬지게 보아 경안이 열리면 모두 화엄경과 연결이 될 터였다. 그러나 부처의 깨친 바를 \"가장 원융하고 광대무변하고 총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화엄”이니 팔만대장경은 모두 권속 화엄이라 이르곤 한다. 대교 과정 한 해 동안 화엄경을 본다 하나 사집과 사교 과정이 모두 그를 위한 준비 과정에 다름 아니라 여기고 성심을 내었었다. 그러나 이즈막에 학인들은 \"강원 과정 끝내고 졸업장 얻펄 마음만 급하여\" 그것을 떠들어 펼쳐볼 생각을 않는다. 앞으로는 화엄을 누가 가르칠 것인가. 육 년, 십이 년 수학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즈음 형편이라면 \"언발에 오줌 누는 식\" 이다가, 종당에는 \"송장 두고 강을 하고 말처지\"에 이르고 말 터임이 그는 안타깝고 아쉽다. \"중도에 이생이 끝나더라도\" 강석 일선의 경험을 묶는 일을 도모해 봄직 하건만 그는 딴청을 부린다.
완력은 세워 뒀으니 금생에 닦다가 안 되면 내생으로 미룰 수밖에 세상사 억지로 되는 것이 없어요. 세 번 인간 몸 받도록 부처님 법에서 퇴보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하면 반드시 부처의 경지에 오른다고 했어요.
다시 맡은 범어사 강주 소임을 놓은 지도 몇 해째, 붉은 흙이 깔린 마딩에는 감자와 고구마가 제 살을 썩히고 말 습기를 말리고 있었다. 쩌서 오곡과 함께 먹는 것이니 그가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다. 심즉불, 부처님의 그 한 도리 깨치기 위해 위법망구해야 한다 하나 그 마음 담은 유한한 몸 추스리기 곤고하고 신산하다.
그는 오늘 반야심경을 펼쳐 읽다 말고 글을 쓴다. 벼루에 먹을 갈고 열두 자루 붓 가운데 하나를 접어 그 먹을 찍는다.
오온개공.
짧고도 간단하다고 그 이치가 쉬울 것인가. 거울 바깥에 있는 공은 물상을 나타낼 힘이 없고, 거울 속에
있는 공은 물상을 나타내면서도 실지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옛 기록에, 죽은 암놈을 그리워하다 죽은 앵무새 이야기가 있다.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고 홀로 남은 수놈이 슬피 울기로, 거울을 그 앞에 걸어두었으나 종내에는 그것이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죽었다. 생사에 머물러 집착하여 쌍조쌍망하지 못함이 단견일 터이나 미물만이 그러할 것인가. 미욱한 중생에게 이르는 말이라네.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 적어 전하는 일연스님이 웃으신다.
색즉시공.
나 아무 것도 설한 바 없도다. 시침 뚝 따고 부처님 떠나신 뒤로, 그 뜻이 무엇인고, 그 말에 매달린다. 저편에 이르러 버릴 뗏목이라 하더라도 강을 건너기 위해 취하지 않을 수 없는 방편. 그는 종이 위에다, 제 마음에다 글을 박아 쓴다.
사십 년 법당에 들락거리다 보니,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을 뵈나 안뵈나 똑같지 뭐 , 싶은 중생심 , 그런 중생심으로 도르르 말려 들어가려는 종이를 문진으로 단단히 눌러 반듯이 펴놓고 글을 쓴다. 오수悟修를 밝히어 언전言詮의 소식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의리선이지. 대답하는 이 없이 그가 혼자 하는 밀이다.
참좋네요, 스님.
그조차 드릴 말씀이 아니라 뒷말을 흐리니 그가 또 말한다.
글자는 생각도 말도 없는데, 보는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지. 천불전 도량위로 목련 떨어지는 기척 있었다. 口

글/ 김 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