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늦여름 한 달 남짓, 저희 식구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더랬습니다. 돌이켜보면 어이없는 그 대립과 갈등은, 부끄럽게도,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고등학생이 된 큰아이가 한 학기 동안 성적이 뚝 떨어져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차분히 제 마음 다스리기보다는 바깥일에 더 열심이어서 학생회와 풍물반에 들어 학교 안을 휘젓고 다니는가 하면, 자율학습 끝난 늦은 시간에 친구들 카운셀러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공부 타령 별로 해본 적이 없는 엄마를 믿는 마음도 있었기에 그렇듯 마음놓고, 즐겁게 대한민국 고동학생답지 않은 분주한 생활을 했겠지요.
걱정스러워 하시는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 갑자기 화가 나고 조급해졌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은 저도 지금껏 모르겠습니다. 느닷없이 저는 아이에게 “번듯한 대학”과 “앞날”의 상관관계를 자주 들먹이기 시작했고, 아이의 “본업” 밖의 생활에 일일이 까탈을 잡았습니다. 딸 아이는 갑자기 변한 엄마를 불신할 수밖에요.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요.
한 달 넘어를 그렇듯 신경전을 벌이면서 저나 딸아이나 다 지쳤습니다. 남편이나 작은 딸이라고 그 나날이 평안했겠습니까. 두사람의 불편한 관계가 전염되더군요. 서로 짜증을 내는 일이 빈번해지고, 큰소리가 자주 오가고, 부녀간에, 모녀간에 대화가 끊기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건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녕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이해와 용서는커녕 그저 일방적인 지시와 강요뿐이었습니다. 무엇을? 실상은 제 자신조차 거부하고 싶은 상투적인 가치가 아니던가요.
\"대부분 상처는 상투성에서 온다 - 롤랑 바르트.\"
앞뒤 문맥 잘린 채 달랑 낡은 공책에 쓰인 이 글귀는 그저 책 속의 죽은 글자일 뿐이었습니다. 진실을 입으로만 외우고 다니거나 머리 속에 담아 놓을 줄이나 알았지, 몸으로 살아내지 못한 미련함으로 저는 식구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던 셈입니다.
활달한 사회성과 지도력, 주위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 딸아이의 그런 미덕들이 오로지 \"대학 입시\" 라는 명분 아래 한순간에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했으니, 그 아이의 자부심과 삶의 가치는 비틀리고 깨어졌겠지요.
\"마음먹기 따라서\"하는 흔하디 흔한 말이 얼마나 어렵고 귀한 삶의 진실인지를 뼈 시리도록 실감했습니다. 한순간의 분심에서 비롯되었던 저희 식구의 불신과 반목은 제 마음의 까닭없는 조급함을 가라앉힘으로써 거두어졌습니다. 온전히 거두어졌는지는 모를 일이지요. 다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겠지요. 그렇더라도 마음만은 늘 식구들을 향해 열어두리라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지 싶습니다.
한 가족의 사는 모양이 이럴진대 숱한 가족이 모이고 모인 이 세계는 얼마나 크나큰 고해인지요. 사람들 사이의 괴로움이 넘치고 넘쳐 삶의 터전인 지구까지도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루는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의 사회, 소비의 사회라지요. 그 속성을, 아침에 눈떠 밤에 자리들기 까지의 생활이 어제 오늘이 크게 다를 수 없는 저 같은 평범한 대중이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휘둘리지 말고 살면 좋으련만, 사람의 마음이 한결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 유한한 사람의 삶에 무슨 지름길이나 있는 양 요령을 부려가며 허덕허덕 걸음을 재촉합니다. 가족은 점점 찢겨나가 \"따스한 안식처\"는 고전의 개념이 되어 가고 있나 봅니다. 그뿐인가요. 사람의 도리는 사라지고 물질문명이 가져다 주는 안락함 만을 쫓는 치열한 욕망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문화를 누리고 산지는 35만년 된 데 반해 진화의 역사는35억 년이나 된답니다. 진화사란 바로 생명의 역사겠지요. 35억 년, 까마득한 그 시간 동안 광대한 우주와 지구의 상호 운동에 의해, 모든 생명체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통해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신비롭습니다. 제 몸 하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지금, 여기 있음이 참으로 신비롭고 소중합니다. 그런 인연의 타래를 생각하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햇볕과 빗방울 또한 어찌 제 가족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참된 사람의 도리를 살리는 길이 아니겠는지요.
딸아이에게도 그렇게 이르겠습니다. 사람된 도리를 다해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단다. 그러려면, 늘 열린 마음이어야겠습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