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량수경」의 특징이라면 열여섯 가지의 관법觀法을 설하는 것이지만, 그 첫머리에 관법을 설하게 된 동기로서 실려 있는, 인간 삶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도 다른 경전에서는 쉽사리 찾을 수 없는 맛을보여준다. 위제희라는 한 왕비의 삶을 통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위(업)의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설함으로써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갈 것을 호소하고 있는, 「관무량수경」의 소위 왕사성의 비극 이야기는 이렇다.
석가모니의 만년에 왕사성에 큰 비극이 일어났다. 태자 아자세가 석가모니의 사촌인 제바달다의 꼬임에 빠져 부친 빈비사라 왕을 유폐하고 죽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까닭은 아자세가 태어나기 전에 빈비사라왕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얻고 싶었던 왕은 점성술사를 불러 점을 치니, 산중에 한 선인이 살고 있는데 삼 년 뒤 천수를 다 하면 다시 이 왕궁에 태어나 왕자가 될 것이라하였다. 왕은 삼년을 기다릴 수 없어 사신을 보내어 선인을 살해하게 했다. 선인은 “내가 왕자로 태어나면 언젠가는 왕을 살해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죽었다. 선인이 죽자 과연 예언대로 왕비가 임신했으므로 왕은 기뻐하며 다시 점성술사를 불러 물어보니 왕자가 성장하면 대왕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 했다. 왕자가 태어나자 고민에 빠진 왕은 결국 왕비를 설득하여 높은 누각에 올라가 아기를 땅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아기는 행인지 불행인지 손가락 하나만 다쳤을 뿐 무사했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아자세 태자였다.
제바달다의 꼬임에 빠진 태자는 처음에는 부왕을 살해할 마음이 없었지만 제바달다에게서 자신의 출생 비밀을 듣고 부왕의 살해를 결심하고 유폐하였다. 이것을 안 위제회 부인은 왕에게 몰래 음식을 제공했으며, 아자세는 크게 화를 내며 모친까지 살해하려고 왕궁 깊은 곳에 유폐시켜 버렸다. 이에 위제회 부인은 기사굴산을 향해 예배하며 석가모니의 왕림을 기원하였다. 위제희가 미처 머리도 들기 전에 부처님은 위제회의 방에 몸을 나투셨으며, 부인은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엎드려 통곡하며 호소했다. “세존시시여, 저는 과거 숙세에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악한 이들을 두게 되었습니까? 또한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제바달다와 같은 악한 이와 친족이 되셨습니까? 부디 저를 위해 괴로움과 번뇌가 없는 세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요. 저는 그 곳에 태어나 다시는 이 염부제와 같은 악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 가득 차 있으며 선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원하옵건대 미래에는 나쁜 소리 듣지 않고, 악한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세존을 향해 오체투지하여 세존의 자비를 바라며 참회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원하옵니다. 중생의 태양이신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여 주십시오.” 이에 석가모니는 시방세계 여러 부처님들의 불국토를 보여 주고 특히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세 가지 복(三福)과 16관법을 설해 주었다 한다. 인간은 한치 앞을 모른다. 그래서인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이 있다. 더구나 현실에 문제가 있으면 있을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미래를 알고자 한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고, 심장을 이식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현재’에 관한 것이고 물질 세계에 국한된 것이다. 미래에 관한 것, 특히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아무리 컴퓨터에 물어 보아도 정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점성술이 유행하고 운세 판단이 인기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불교의 인과법因果法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점성술사가 미리 알아 맞출 수도 없고, 설사 맞춘다 하더라도 미래의 삶에 대해 미리 아는 것이 과연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관무량수경」은 미래를 아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예이다. 이들의 부모에 대한 반역 행위는 그 때의 사회 불안, 인간 관계의 위기, 웹 도덕적 타락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고대 인도의 국왕 빈비사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사회 생활, 가정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 뒤부터 인간의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잠재해 온 근원적 욕구에서 나온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사회 현상이다.
위제희 부인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근본원인은 위제회 부인 자신이 남편인 빈비사라왕과 의논해서 아들을 낳은 뒤 죽이려 한 것에 있으며, 더구나 자식을 원한 나머지 선인을 살해한 것과 점성술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원인은 위제희 부인 자신에게 있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도불구하고 위제희 부인은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 숙세에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악한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까?” 또한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제바달다와 같은 악한 이와 친족이 되셨습니까? 하고 투정 어린 하소연을 하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불행해진 것은 전적으로 제바달다가 내 아들을 꼬득였기 때문이니 이 불행의 책임은 제바달다의 사촌인 석가모니에게도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을 자기 이외의 사람들에게 책임이나 원인을 돌리려는 현대 사회의 병리적 상황과 다르지 않다. 비행 소년소녀 들이 곧잘 쓰는 변명 가운데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라는 말이 있다. 이 속에는 나는 나쁘지 않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게 만든 부모와 사회가 나쁘다며 다른 것에 원인을 전가하는 경향이다. 물론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주위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도 전혀 다른 성격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자극이나 같은 환경에 처해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그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개성이 있고 주체가 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큰 소리 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훌륭하게 살아온 이도 있다. 모든 것은 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 자기 자신에게 있다. 문제는 자신의 업, 곧 지금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부터의 좋지 않은 습관이나 성격 등을 개선히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다. 지금의 잘못된 관념이나 관습과 타협하지 않고, 늘 인과의 법칙을 생각하며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왕사성의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