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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의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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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원경 1998년 05월 195호
몇 년 전 호암아트홀에서 방영된 베르나르도 베트툴루치 감독의 “리틀부다”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려고 싯달타 태자의 젊은 날을 주로 다루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제작된 부처님의 전기를 다룬 거의 모든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까닭은 무엇일까.
‘부처님’ 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과연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많은 불자들에게는 32상, 80종호로 장엄된 복덕구족의 법신불이 떠오를 것이다. 곧 석존이 깨달은 법을 절대화한 초역사적인 부처님이 우리의 의식을 사로 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영화들이 불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일 게다.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을 완벽하게 그린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고 어쩌면 무가치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은 부처님과 나는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또는 \'과연 부처님이 평범한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고 있을까\'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전기에 나타난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추정하여 우리의 삶과 연결하므로 써 좀더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전기물들은 대부분 불전문학 형식으로 윤작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곧 참다운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보면 위험하다. 다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 모습이 편린으로나마 남아있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부처님의 탄생에 얽힌 「본생경」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출생 비밀을 살펴보려고 한다.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사천 년 동안 ‘보처보잘\' 로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신 뒤 어느 날 모든 하늘 천자들에게 말씀히셨다. \"내 이제 염부제에 내려가 그 곳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렇게 사바세계의 염부제에 하강할 시절 인연이 도래했음을 아시고 다음 다섯 가지 일을 관찰하셨다. 첫째, 모든 중생의 근기가 성숙하였는가. 둘째, 때가 되었는가. 셋째, 모든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로 갈 것인가 넷째, 모든 종족 가운데 어느 종족이 가장 존귀한가. 다섯째, 누가 마땅히 부모가 될 것인가. 이렇게 관찰을 마치시고 나자 다음과 같이 결정을 하셨다. 오직 가비라국이 가장 훌륭한 곳이며, 나라가 풍요하고 오래 전부터 공덕의 씨앗을 심은 곳이며, 정반왕은 종족도 으뜸이고 성품과 행동이 어질고 밝다. 마야부인도 역시 성품이 곧고 어질며, 몸과 입과 뜻을 잘 간직하여 오백 생 동안 보살의 어머니이셨으니 그의 모태에 의지함이 좋으리라.
위에서 말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어떤 존재가 출생하는 데는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곧 태어날 시기, 태어날 장소, 태어날 때 의지할 부모의 인연 등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출생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보통의 인간과 같이 정상적인 부모의 관계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는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정상적인 인간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님처럼 성불할 성품(佛性)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부처가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진리의 세계로부터 온 호신불이라는 것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한다면 환희심이 날것이다.
또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의 경우도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출생 요건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태어난 연월일과 부모의 인연과 출생지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출생의 비밀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사실은 태어날 자식이 태어날 시기와 국토, 부모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부모와 사회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내면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우연히 태어나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사명(一大事因緣)이 있다. 부처님의 경우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으로 태어났기 때문에(願生) 그 사명을 잊지 않고 있지만, 중생의 경우는 과거에 자기가 지은 업력業力에 의해 욕망으로 출생하기 때문에(業生) 무명 중생이 되는 것이다.
태자 싯달타의 젊은 시절 인도는 부족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발전해 가는 단계였으며, 열여섯 개의 크고 작은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부처님이 출생한 가비라국은 히말라야산 근방에 있는 작은 부족국가였다. 왕이라고 하지만 부족의 수장 가운데서 통치권자를 뽑았고 정치적인 문제는 부족장들이 모여서 공의에 의해 결정하였다. 아버지인 정반왕은 태자인 섯달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노심초사하였지만 이마도 태자는 무상한 정치보다는 생노병사와 관련하여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의식주가 풍족한 상황에서도 그것에 탐닉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승화된 경지를 추구했다는 것은 유한한 물질의 세계보다는 정신적인 차원의 세계에 눈이 열려 있었다는 증거이다. 마치 진흙 속에 있는 연꽃이 그 진흙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에서도 물질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자기 보다 낮은 사람을 보아서 만족해야 하고, 정신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바라보고 분발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부처님의 성품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대화를 잘 하시는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인 것 같다. 그런데 부처님의 전기를 읽다보면 악마(마라)나 범천이 등장하여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많이 나와 우리를 당황케 만든다. 출가하여 육 년 동안 고행을 하시고 마지막 정각을 앞둔 상황에서 마왕파순의 세 딸로 상징되는 애욕과 탐욕과 명예욕이라는 허상들이 등장하여 부처님을 괴롭히는데 결국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던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리틀부다\"에서의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최고의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진다.
\"어렵게 내가 증득한 바를 어찌 헤매임 속의 그들에게 설하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 속에 있는 자, 이 법을 어찌 깨달으리. 이는 세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미묘하여 난해하기에 탐욕에 찌들고 어둠에 싸인 자는 볼 수 없으리라.\" 이리하여 차라리 그대로 열반에 드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다. 이 때 범천의 권청’ 이라는 불전문학의 기법이 나온다. 범천梵天은 브라흐만교의 최고신이다. 범천을 등장시킨 이유에는 편집자의 의도가 깊이 내포되어 있다. 어쨌든 범천은 세 번에 걸쳐 설법을 청한다. \"세존이시여, 원컨데 법을 설하시옵소서. 이 세상에는 눈이 티끌로 가려짐이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타락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필시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 범천이 어찌 외부에 있는 존재이겠는가 부처님의 내면에서 진행된 갈등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부처님의 그 갈등은 갈등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갈등\' 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우리의 고민은 자신의 이익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좌절로부터 비롯되지만 \'부처님의 내면적 갈등\'은 어떻게 하면 많은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줄까 하는 이타적인 자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중생은 욕망을 먹고 살아가지만,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욕심은 욕망이라 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부처님의 전기 가운데 부처님은 여러 악마와 만난다. 어느 날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악마가 나타나 ‘내가 저 고타마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리라’고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이 “나는 세상의 온갖 욕망으로부터 떠나 마음의 분별을 없앴으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악마여, 이미 내가 그대의 실체를 알고 있으니 속히 멀리 사라지거라’ 하고 말씀하신다. 또 잡아함경에서는 걸식과 관련하여 다시 악마가 등장한다. 어느 때 마을에서는 남녀가 서로 음식을 주고 받는 축제가 벌어졌다. 마을에는 모두 축제에 가고 아무도 없어서 부처님은 빈 바루를 들고 정사로 돌아오고 계셨다. 그 때 악마가 등장하여 말하기를 \"사문이여,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면 내가 공양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유혹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음식은 비록 얻지 못했으나, 보라. 우리는 즐겁게 사나니, 이를테면 저 광음천光音天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살아가리\" 하고 대답하신다. 때로는 선정 가운데서조차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번민, 걸식을 하지 못한 채 빈 바루를 들고 정사로 돌아오는 길에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식욕 등 이러한 모습은 정말 진솔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모습이라 하겠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이 완전히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큰 아픔은 아마도 어머니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은 지 일주일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일 게다. 그것은 싯달타의 태자시절 그로하여금 감성적인 성격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성불한 뒤에도 나타난다. 곧 도솔천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사바세계를 떠나 석달 동안 설법하시고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성불한 뒤 두번째 고향을 방문했을 때 부왕 정반왕이 돌아가셨다. 부처님은 직접 상여를 메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코살리국에 의해 석가족이 멸망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당신보다 먼저 죽었을 때 정말로 슬퍼하셨다고 한다. 부처님이라고 하여 인간이 느끼는 슬픔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통 사람과는 달리 그러한 감정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적인 감정이 아주 없다면 그것은 고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행복일 것이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행복의 종류가 다를 뿐 그 동기는 같다고 하겠다. 불전에 의하면 부처님이야 말로 가장 행복을 진지하게 추구한 분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정말로 인간적인 부처님의 모습을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천안제일 아나율 존자에 얽힌 이야기다. 아나율은 부처님의 사촌이다. 어느 날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을 때 아나율이 졸고 있었다. 아마도 부처님의 사촌이라는 자만이 있었으리라. 설법이 끝나자 부처님은 아나율을 불러 호되게 꾸지람을 하신다. 그러자 아나율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잠을 자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너무 무리하게 수행에 골몰하자 눈이 진물러 설명의 위기에 놓였다. 부처님은 아나율을 타일러 쉬게 하였지만 아나율은 더욱 용맹정진을 하였다. 결국 육신의 눈운 잃었지만 천안을 얻었고 진리를 깨달았다. 그런데 어느날아나율이 가사를 꿰매려고 바늘에 실을 꿰려했지만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때 누군가가 살며시 다가왔다. 바늘과 실을 넘겨주면서 그 손이 바로 부처님의 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 주춤했다. 부처님은 ‘내게도 공덕을 짓게 해 주게. 세간사람들은 모두 복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나율이여, 복을 구하는 세간 사람 가운데 나만큼 진지하게 복을 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부드럽게 말하며 제자의 가사를 꿰매 주었다. 한번 상상해 보라. 제자의 가사를 꿰매 주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부처님은 최초로 녹야원에서 교진여등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신 뒤 \"제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전도를 선언하시고 끝없는 길에서의 삶을 살아 가셨다. 불교는 길(道)의 종교이다. 길에서 태어나 길을 걸어다니며 전법하시고 길에서 돌아가신 부처님의 인간적인 삶은 결코 안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기철에는 안거라는 형식으로 모여 살았지만 대부분의 시기에는 길을 걸어서 걸식을 했고 야외에서 법석(野禮法席)을 마련하여 설법하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우리는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을 「유행경」속에서 만날 수 있다. 왕사성에서 쿠시나가라에 이르는 석 달 동안의 여정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 팔심이 넘은 노인의 몸으로 걸어서 여행을 하며 전법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세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앞으로 걸어가시다가 어떤 나무 밑에서 또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 등병의 고통이 몹시 심하다. 자리를 깔아다오. 나는 등병이 아파 잠시 쉬고 싶구나?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으시고 탈이 나셔서 아픈 몸을 이끌고 마침내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였다. 입멸을 앞두고 이제까지 부처님께서 설한 법에 대해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더 물으라고 하신다. \"아난아,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너무도 슬퍼하는 아난에게 \"아난아, 슬퍼하지 마라. 내가 늘 가르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과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아난이여, 이제 여래가 열반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이제까지 설하고 가르친 교법과 계율은 내가 열반한 뒤에도 영원히 그대들의 스승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오히려 이렇듯 일체 모든 법은 무상한 것이라고 시자를 위로하며 대중의 화합을 강조하시고 장례 절차에 대해서 까지 자세히 유언을 하신다.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다. 한량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일체 만물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여래 최후의 말씀이다.\" 부처님은 그렇게 위대하게 탄생 하셨고(如來),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았으며, 그렇게 위대한 모습으로 진여의 세계로 돌아가셨다(如去).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