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비행기가 잠긴다. 한없이 깊은 푸르름 속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다. 시속 천 미터. 그러나 비행기는 무한한 공간 속에 정지되어 있다. 때때로 운해雲海를 만나 한참내려다볼 때에나 겨우 비행기가 미동하고 있음을 감지할 뿐이다. 아무 형체도 없고 오직 깊이만 있는 고요한 허공 속에서 갑자기 절대의 고독을 느낀다. 나는 가끔 이러한 상태가 적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물관 아파트 앞 골목길에 폐가가 하나 있다. 지붕 한쪽이 내려앉았고 문들은 열려 있다. 쓰던 물건이 구석에 널부러져 있고 마루 벽에는 달력이 삼월인 채로 있다. 마룻바닥은 운동화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마당에는 잡초가 높이 자라 허리춤에 이르고 구석방 앞에 거미가 커다란 거미줄을 쳐 놓았다.
이것은 집의 죽음이다. 과거 여러 움직임들이 한순간 정지된 뒤로 오직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이 폐가를 응시하며 이러한 것도 적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산의 등성이를 따라 오르다 보면 때때로 절터를 만난다. 주춧돌이 몇 개 널려 있고 저만치 비위 위에 그대로 주저앉은 석탑이 있다. 돌부처는 없다. 인적 드문 이러한 폐허에서 적멸을 느낀다. 예각의 석탑부재들은 풍우에 마모되어 둔해지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무상의 염念을 지난 달 중앙아시아의 교하고성交河故城에서 절감하였다. 진흙을 벽돌처럼 쌓아올린 견고한 건물들은 오랜 풍우에 시달리며 지금은 어떠한 형태로도 추상할 수 없는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기우는 태양은 구름에 가리어 기괴한 형태의 흙더미들은 그림자 조차 없었다.
아파트 현관 구석에는 날마다 치워도 거미줄이 새로 걸리곤 한다. 잠자리가 한 마리 걸려 버둥거리며 날개짓한다. 어느 결에 거미가 나타나 삽시간에 잠자리를 거미줄로 칭칭 묶어 버린다. 잠자리는 곧 미동도 하지 않는다. 들먹들먹하던 거미줄도, 거미도, 잠자리도 모두 고요히 정지되어 있다.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에 이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방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이 순간 나는 적멸을 느낀다.
나에겐 날마다 밤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경주의 밤하늘에는 별들이 제법 자태를 나타내려 애쓰고 있지만, 지난 달 쿠차(龜玆)에서는 경주에서 그토록 찾아도 없던 북두칠성이 한눈에 잡혔다. 광속으로 몇 백 년(?) 걸리는 먼 거리에 있는 별들이 내쏟는 짧은 빛을 내 시선이 가서 만난다는 것은 참 불가사의 하다. 빛 때문에 사물이 보일 터인데 빛보다 나의 시선이 빠르다면 이건 놀라운 일이다.
쿠차의 밤하늘을 보며 더욱 적멸을 절감한 것은, 낮에 키질 석굴 안에서 열반도를 본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별들은 불생불멸 같은, 잘 잡히지 않는 그 뭔가를 속삭이고 있다. 갑자기 한 별이 떨어져 사려진다. 이 지구도 언젠가 저 별처럼 떨어지며 적멸 그 자체가 되리라.
윤오영을 내가 안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그는 진실한 수필만이 문학의 새로운 길이요, 인생의 새로운 보람이라고 마지막 수필에서 피력하였다. 세간에서 나를 수필가라고 부르지도 않거니와 그것은 내 바리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수필을 접하며 지기를 만난 듯 얼마나 반가웠는지.
죽음을 앞둔 윤오영은 마지막 수필‘와병수감臥病隨感’에서 벽지의 얼룩을 응시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나는 누워서 이것을 보는 것이 즐겁다. 생물과 무생물이란 그 원초에 있어서는 구분이 없다. 유상과 무상 또한 그렇거니 이 벽지 위에 얼룩진 무늬라고 해서 반드시 생명이 없다거나 존재가치가 없다고 할 일도 아니다. 따라서 내(인생) 존재가 반드시 얼룩진 무늬와 다를 것도 없지 아니한가. …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생명감이 아닌 또 하나의 위대한 생명감을 느낀다.그들에 노래한 생명은 그들이 살아있음으로써 느끼는 생의 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과 사는 계속해서 흐르는 하나의 저류, 자연의 운행, 여기에는 생과 사가 다같이 하나의 위대한 생명인 것이다. 나는 이 벽지의 얼룩진 무늬를 향락하며 그런 생명의 흐름을 생각하는 것이다.”내가 이렇게 윤오영의 마지막 글을 옮겨 적는 까닭은, 그는 적멸이란 단어를 한번도 쓴 적이 없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멸의 세계를 진실되게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고등학교 선생이던 가난한 수필가다.
“웬일인지 온 집안이 고요하다. 아침볕이 머리맡 창문으로 비껴든다. 과연 조일朝日 이 선명한 밝고 고요한 아침이다. 오동나무 책장의 상반부가 햇빛을 받아 검은 나무에서 붉은 빛을 그득하게 풍기며 목문木救이 부드럽고 자애롭다. 책상 위의 재떨이로 쓰는 분청항이리와 담배통으로 쓰는 옛날 망건통이 유난히 아름답게 눈으로 들어온다. 수분水益에 세워둔 돌도 오늘따라 신기하게 정겨웁다. 이 아름다움을 누구에게 자랑할수 있으며 또 누가 내말을 액면대로 느껴줄 것인가. ‘모든 것이 그 때 그 자리에 놓이면 미美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그래서 동양 시詩에는 자연을 설명이나 기교 없이 그대로 읊음으로써 경지와 선미禪味를 나타냈던 것이다.”
내 아직 깨치지 못하여 적멸의 세계를 모른다. 또 아직 죽지 않았으니 열반(적멸)의 세계를 어찌 알랴. 그러나 죽음을 완성한 사람이야말로 적멸을 체험한 참된 각자覺者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세상의 여러 상태나 현상을 보면서 나는 문득문득 이러한 것이 적멸의 상태가 아닐까 상상해 볼 뿐이다.
출근 길. 왼쪽에 황룡사 옛터를, 오른쪽에는 월지月池의 숲을 눈여겨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노라면, 주변에 투명한 날개로 각지며 나는 잠자리와 너울너울 춤추며 나는 나비들을 만난다. 소리 없는 이들 움직임을 보며 문득 적멸을 느낀다.
산사를 찾다가 깊은 산 속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이름모를 조그만 야생화를 자주 만나곤 한다. 작지만 싱싱하고 당당하기까지 하다. 이들 야생화에서도 적멸을 느낀다. 나는 죽음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에서 적멸을 느낀다. 모든 것은 생겨나고 없어진다. 끊임없이. 불생불멸이 모든 사물의 존재 양식이란 생각이 들면 갑자기 나에게 주어진 삶이 경이롭고 경외스럽다. 시람은 죽기 때문에 행동하고 존재하는 것 아난가. 인간 삶의 온 과정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적멸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