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 설법의 무대
다람쥐는 나무 위에서 사는 것과 땅 위에 사는 것, 그리고 또 그 중간 생활을 하는 것이 있다. 볼을 잔뜩 부풀려 씨나 나무 열매를 먹는 모습은 그 눈처럼 사랑스럽다. 빠리어로는 다람쥐를 판나사사라고 하는데 「밀린다왕문경」에는 서기 전 이세기 후반 기리시아국 왕이었던 밀린다왕에게 불교승 나가세나가요가 행자의 덕목을 다람쥐에 비유하였다. 다람쥐는 자기의 꼬리를 두들겨 막대기처럼 크게 세워 적을 막는 모습이 마치 번뇌가 덮쳐 왔을 때 그것을 막는 수행자의 덕목 같다고 설명한다. 원시경전에는 왕사성 대나무숲 다람쥐 사육장(카란다카니봐파)이 설법의 무대로 주로 나온다.
바라도봐쟈라는 성을 가진 한 바라문이 똑같은 성을 가진 이가 석존의 밑으로 출가한 것에 화가 나서 이 대나무숲 다람쥐 사육장으로 석존을 찾아가서는 불타를 욕하였다. 그러자 석존이 물었다. “만일 찾아온 친구나 친척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렸는데 손님들이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은 도대체 누구 것이 되겠는가.”그러자 바라문이 대답했다. “고타마님! 만일 손님들이 음식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차린 사람의 것이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바라문이여, 욕먹을 일이 없는 우리에게 그대는 욕을 했소.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논쟁을 거는구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상대하지 않겠소. 바라문이여, 이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 우리들은 그대와 같이 먹지도 않고 서로 논쟁을 주고받지도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산윳타니카야」, 나카무라 하지메 번역 「악마와의 대화」
보통 사람은 욕설을 듣고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더라도 대답 속에는 화가 나 있을 수 있다. 바라문은 이 점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석존이 화를 내거나 논쟁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을 보자 마침내 그는 석존 밑으로 출가한다. 「숫타니파타」‘성냄에 관한 여덟 개의 시구’에는 성자가 성냄이나 비난을 가까이하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 화가 나서 남을 비방하는 사람도 있다. 또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도 남을 비방하는 일이 있다. 비방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성자는 그것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자는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는다.
나카무라 하지메 번역「붓다의 말씀」중에서
인도의 델리 대학 구내에는 파릇파릇한 나뭇잎을 한 보리수인 핏파라나 아슈밧타 나무가 길 가는 사람에게 응달을 던져 주기나 하듯 심겨 있다. 델리 같은 도화지에도 대학 언저리에는 아직 갖가지 조그만 야생 동물이 있다. 망구스는 물론 공작도 가까운 수풀을 날아다니며, 다람쥐는 대학 안의 나무에서 사람 얼굴에 떨어질 듯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어떤 때는 코브라가 학생 기숙사 안뜰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다람쥐는 보드랍고 작은 핏파라 열매도 잘 먹는다. 작년 1987년 1월 필자는 어떤 신문사의 여행부가 기획하는 인도 여행에 동행 강사로 붓다가야를 찾았다. 그곳은 석존이 도를 이룬 성지이다. 붓다가야의 큰 탑 뒤에는 석존이 앉아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금강법좌가 있고 바로 그 위를 덮어씌운 듯 커다란 보리수가 우뚝 솟아 있다. 물론 이 나무는 석존이 살아 있던 당시의 보리수는 아니고 몇 대가 지난 것이다. 6세기 첫머리에는 폐불 사건 때문에 보리수를 벤 적도 있다. 큰 탑 안에 올라가면 탑 밖으로 나가 그 둘레를 돌 수 있다. 눈앞에는 핏파라 나무가 나뭇잎을 무성하게 드리우고 있다. 석존의 깨달음과 관련된 이 보리수를 가까운 곳에서 보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열심히 열매를 먹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숨는 다람쥐를 간신히 사진기에 담아서 이 글에 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자의 사진 솜씨도, 몸에 지녔던 카메라의 성능도 불안해서 함께 갔던 분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얼마 뒤 그 분으로부터 편지와 사진이 왔다. 역시 그 분이 말한 대로 나뭇잎 속에 숨은 다람쥐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웠다. 여기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 호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말-감각 기관의 제어
말은 머리가 매우 좋아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줄 안다. 멈칫거리며 말을 타면 얕잡아 보고 통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쓰는 말은 잘 훈련되어 낯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촬영에 쓰는 말은“스타트!”하면 뛰어가고“컷!”하면 멈춘다고 한다. 얼마 전 텔레비전 사극 배우에게 들은 얘기지만 그 때문에 아슬아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사람이 말 위에 탔는데 감독이“스타트가 어쩌고 저쩌고”하며 별로 주의하지 않고“스타트”란 말을 쓰자 말이 그만 갑자기 뛰어나가 그 배우가 질겁해서 허겁지겁 말에서 뛰어내렸는데 뛰어 내렸다기보다는 떨어지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차가 수행의 비유로 자주 나온다. 먼저 말몰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비유한다. 말은 이 말몰이 손에서 움직인다. 말은 바로 감각 기관에 비유한다. 말몰이가 말을 잘 몰지 못하면 얘기가 안 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말고삐를 솜씨 좋게 휘어잡아서. 그냥 두면 어디로 갈지 모를 말을 잘 몰아 바른 길을 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감각 기관은 그냥 두면 드세게 밖으로 튀어나와 대상을 휘어잡으려 한다고 믿고, 그것이 감각 기관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감각 기관이 밖으로 나오면 우리들 마음에는 여러 가지 영상이 뒤죽박죽 떠오르는데, 그것을 상대로 욕망이라든가 혐오감이 일어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번뇌에 휘둘린 행위로 치달려 언제까지나 괴로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나기는커녕 윤회의 바다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되는 것은 감각 기관을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가에서도‘감각 기관의 다스림’을 중시한다. 불교 문헌은 아니지만 석존이 활약했던 시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떼에 엮어졌다고 보이는‘가타우파니샤드’라는 짧은 작품이 있다. 거기에‘말몰이의 비유’가 꽤 자세히 나온다. 불교의 설명과는 조금 다른 곳이 있지만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마차에 탄 사람은 아트만이라고 한다. 아트만이란 자기의 본체로 자아나 영혼을 뜻하며 한문에서는‘아我’로 번역한다. 다음 마차란 사람의 몸이라고 한다. 말몰이는 바른 지식이나 판단을 뜻한다. 말고삐는 사고 기관인 마나스manas로 한문으로 옮기면‘의意’이다. 말은 감각 기관을 뜻하고 달리는 길은 감각 기관의 대상이다. 그리고 몸, 감각 기관, 사고 기관이 합쳐진 것이‘받아들이는 주체’곧 겪는 것이라고 한다. 혹 자질구레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감각 기관과 사고 기관에 합쳐진 아트만이‘받아들이는 주체’라는 풀이도 있다. 이렇게 해서 바른 지식인 말몰이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받아들이는 주체’는 윤회의 괴로운 세계를 헤매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말몰이가 정신을 바짝 차려서 사고 기관인 말고삐를 솜씨 좋게 휘어잡고 감각 기관인 말을 잘 몰면‘받아들이는 주체’는 비슈누 신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른다고 한다. 이 비슈누 신의 가장 높은 곳이란 불교식으로 말하면 바로 열반의 세계이다. 그밖에 몇 개의 우파니샤드 문헌에도 거의 같은‘말몰이의 비유’가 쓰였다. 인도의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불교도‘말몰이의 비유’를 줄곧 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