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해인사의 산내암자 - 용성스님의 혼이 살아 있는 용탑전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가람의 향기 - 시명 1993년 09월 139호
여름내 장마로 우울했던 날씨가 모처럼 쾌청하다. 초록도 지치는 팔월의 수목 사이로 언뜻언뜻 햇살이 비치는 아침.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그렇게 은혜롭고 반가울 수가 없다. 용탑전에 가려면 가벼운 기분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외나무다리! 큰절과 개울을 이어 주는 이 다리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서슬이 시퍼렀던 때에 양반님네의 행패가 극심하여 마소를 몰고 대웅전 앞을 예사로 드나들 뿐 아니라 불전에 대한 예의가 무인지경에 이르자, 마소가 건너지 못하도록 놓은 다리가 이 외나무다리였다.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저승에 가 염라대왕이 이 다리를 건너보았냐고 묻는다는 속설이 있어, 최근에는 촌아낙네들이 해인사에 오면 꼭 찾아가 건너는 명소가 되었다. 아마 다리라는 것이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이어 준다는 의미와 나아가서 이승과 저승을 이어 준다는 동양적 사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탑전은 큰절과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가까운 암자이다. 그 뿐 아니라 현대 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용성 대선사의 고준한 삶의 흔적과 자비보살이 화현이었던 고암 큰스님의 잔잔한 미소가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용성 대선사와 용탑전의 인연은 각별하다. 어느 해 스님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이빨에 이상한 물질이 걸리적거렸다. 그래서 뱉어 보니 조그만 알갱이었다. 스님은 입 안에 별 이상한 것이 다 있다고 생각하고는 건너편 화단에다 무심히 훌쩍 던져 버리고는 선방으로 돌아가 예와 다름없이 묵묵히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선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이상한 물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사리였다. 화단에 떨어진 그 사리는 주변 어둠을 밝히면서 광휘에 휩싸여 있는 것이 아닌가. 문인과 신도들은 그 오롯한 빛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고 산 사람에게서 사리가 나왔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막상 선사는 담담할 뿐이었다. 당장 사리탑을 세워야 한다고 웅성거렸지만, 오히려 스님은 쓸데없는 부질없는 짓이라며 말렸다. 스님이 입적한 뒤에는 그 사리를 모셨으며, 절 이름도 용성선사의 사리를 모신 탑이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용탑전이라고 했다. 물론 용탑전은 결코 오랜 역사를 지닌 절은 아니다. 그러나 저 찬란하던 신라와 고려 그리고 암울한 세월이었던 조선 시대마저도 현대에 비해서 기라성 같은 성승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용성선사와 같은 분이 혼미했던 근대불교사에 한 이정표를 세움으로써 불교정신이 오늘에 이르도록 이끌고 왔음을 생각할 때, 고적하기조차 했던 현대 불교사에서 용탑전이라는 작은 산내 암자는 결코 암자의 규모나 겉모양으로 회자되거나 가벼이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지금의 용탑전은 1940년 2월 24일에 용성스님께서 열반에 들고나서 일년 뒤인 1941년에 먼저 스님을 추모하는 비와 탑을 세우고 오 년 뒤인 해방이 되던 1945년에 탑과 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작은 가람을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선사의 수법제자인 경성스님이 지금의 건물을 창건하였고, 1956년에 일호스님이 석굴암을 모조하여 미타굴을 짓고 미타전 앞에 오층 석탑을 조성하는 등 암자로서의 규모를 확립하는 한편, 1967년 현 도감인 성욱스님이 다시 요사 일곱 칸을 이룩하여 지금에 이르었다. 어떻든 용탑전도 용성스님을 위한 기념비적인 사원이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도 일본 사원이나 중국 사원처럼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는 것은 웬일일까. 용성대사는 근대 불교와 현대 불교를 이어주는 한 정점에 서 있다. 선사의 삶은 여타 선사의 삶처럼 한 도인의 삶으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선사는, 민족적 비운의 한가운데서 일제의 침탈에 온몸으로 저항한 항일투사이자 민족의 스승이요, 허물어지고 희미했던 전통 계맥을 계승한 위대한 선사였을 뿐더러 역경과 불교 대중화를 외친 포교사였으며 선농일치를 주장한 실천 수행자였다는 점에서 같은 시대의 어떤 고승보다도 뛰어났다. 최근 용성대사의 문도들이 이러한 선사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고자 용성대선사 기념사업회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대각사상의 부활과 그의 실천수행자적 행적을 널리 선양하고 있다. 마침 오늘 일본 일련종日連宗의 승려들이 한국 방문중 해인사를 다녀가면서 일련스님의 삶을 소개하는 내용도 들어있는 한국어판 일련종 팜플렛을 두고 갔다. 그것을 보면서 그들의 적극적이고 치밀한 포교 의지에 오히려 불쾌한 감정이 없지 않았지만, 지극한 애종 사상과 동남아 지역을 향한 포교 의자에는 새삼 감탄스러웠다. 사실 우리도 지난 역사를 통하여 위대한 고승을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는가. 그런데도 원효나 의상이나 보조선사를 들먹이기보다는 걸핏하면 중국일변도의 선사상에 경도되어 중국 스님들과 그들의 저술인 벽암록, 경덕전등록 따위를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내보이거나 흉내만 내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불교사를 재조명하고 자주적 불교교단사를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그런 뜻에서 보더라도 용성선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었던 서울의 대각사나 용탑전이나 함양의 화과원이나 북간도의 수행장을 살아 있는 불교 교육이 성지로 다듬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선사의 기념 사업을 단지 문중 중심으로만 기획 전개할 것이 아니라 전종도적인 사업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용탑전을 돌아 나왔다. 모처럼 햇살이 밝아 청량했던 먼 가야 산정으로 구름이 모여들고 가까운 숲에서는 매미가 여름이 낭만을 노래하고 있었다. 앞쪽 시내는 예전처럼 흐르지만 그 물은 옛 물이 아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선사의 치열한 구도와 교화의 정신은 탑처럼 그렇게 우뚝 남아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