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탑 닮은 귀면 기와가 얹혀진 대웅전 용마루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는 그 유래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기와가 얹혀 있다. 귀면 위에 우진각 지붕모양의 목조건물이 있고 지붕 위에는 보주가 놓여있다. 그런데 이 보주 윗면에 원구 모양의 무엇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보륜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진각 모양의 기와집 벽면에 선으로 새긴 글씨가 있다. 그 가운데에 ‘갑신 오월’이라는 명문은 대웅전 내림새 마루 암막새 기와에 새겨진 ‘건륭이십구년갑신’에 견주어서 1764년에 번와 불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채은선사가 1743년부터 1765년까지 중창 불사를 하고 ‘모악산불갑사중창서’라는 현판에 그 기록을 남긴 사실과 1757년에 만든 대웅전 현판에 ‘건륭이십이년정축오월일’이라는 기록에서 보더라도 17세기에 법릉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불갑사를 중건하고 백오십여 년 뒤인 1964년에 채은이 다시 중창하는 과정에서 대웅전의 부서진 기와는 새로 만들어 갈고, 썩은 서까래를 대대적으로 교체한 중창불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고색 창연한 탱화의 단청
불갑사 대웅전에는 색바랜 단청과 화격이 높은 탱화 두 점이 남아 있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불갑사 대웅전을 들어서면 보는 방향으로 왼편 측면에 있는 불단의 불상 뒤에 모셔져 있다. 삼여래회상도라 여겨지는데 중앙은 영산회상, 왼쪽은 약사회상, 오른쪽은 아미타회상이다. 영산회상을 중심으로 삼여래를 함께 그렸지만 수원 용주사의 삼여래회상도에 비하여 청중이나 권속을 많이 생략한 모습이다. 무병장수를 갈망하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삼세불은 석가를 대웅전의 주불로 모실 경우 무병과 장수를 상징하는 약사와 아미타불을 좌우 보처로 삼은 듯하다. 삼세불이란 과거불은 아미타, 현재불은 석가, 미래불은 미륵으로 삼는 것이 통례이지만 몇가지 형식이 혼용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앞의 형식이 보편화된 것 같다. 세 폭 형식이 아니고 법당이 좁은 관계로 한 폭에 삼불을 그린 형식이다. 경북 포항 보경사 영산회상도(1775년)와 구도가 유사하고 화기는 말아져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이 후불탱화의 앞에는 목조삼존불상이 놓여 있으나 후불탱화의 가슴께까지 가리고 있어 후불탱화나 삼존불 가운데 어느 하나는 원형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후불탱화 앞에 모셔진 목조삼존불좌상은 주존이 두 협시보다 약 20센티미터쯤 더 크며 손 모양의 차이만 제외하면 상호나 의습 등의 세부적인 표현기법은 거의 같다. 이 삼존불은 중앙이 석가모니불 , 왼쪽이 약사여래불, 오른쪽이 아미타불을 모셔 부처의 영원성과 무병장수를 갈망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 발견된 각진국사의 부도인 자운탑과 옛 터
각진국사비는 대웅전의 오른쪽 뒷쪽에 자리한다. 비신과 귀부만 남아있고 이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수를 대신해서 둥그런 냇돌을 두 개 올려놓았다. 비신은 풍우에 의해 마멸되어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명문의 정면은 ‘각진국사’, 봐서 우측면은 ‘수 불기이구육육년 00000000 0각’이다. 귀부는 단조로운 형태이며 지대석이 보이지 않아 제자리인지는 의문이다. ‘각진국사비명’은 1359년(공민왕 8년) 제자 원규 등이 왕에게 입석을 청하자 왕은 곧 이달리에게 비명을 짓게 하고 이제현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불갑사에 비를 세웠다. 자운탑(각진국사 부도)은 부도군의 뒤쪽 줄 맨 오른편에 자리한다. 대웅전에서 북동쪽으로 800여 미터의 산록에 삼단의 석축을 마련한 옛 자리를 찾았다. 팔각 모양의 옥개석과 탑신을 갖추고 있으며 기단부가 길쭉한 독특한 모양의 부도이다. 자운(1270∼1355)은 각진국사 복구의 탑액으로 그 건립 연대를 각진국사의 비와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불갑사 대웅전 앞 좌우에 있는 괘불지주는 돌로 만들어졌으며 두 개의 석주가 한 짝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 측면에 선으로 새긴 ‘강회사십구년경인삼월일 신해화’라는 글자 지름이 5센치미터인 명문으로 보아 1710년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괘불지주에 명문이 새겨진 다른 예는 강진 정수사(강희 사십칠년 1708)와 강진 무위사(강화 17년, 1678)가 있다. 불갑사를 나서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 건축에서 그 유래가 없는 목조탑 닮은 귀면기와가 용마루 중앙에 얹혀진 연유를 알아 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식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인도의 산치탑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공부가 짧은 소견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목조탑 형태를 갖춘 귀면기와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목각사자상은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이제까지 기록에‘사자후를 토했다’고 할 때 그냥 관념적인 의미로만 알고 무심코 넘겼던 사자후, 사자후를 설할 때 앉았던 법상이 사자 모양의 받침으로 구체적인 틀을 갖추었을 가능성. 조심스럽게 생각의 빗장을 열어 본다. 마지막으로 절집의 방향인데, 서향으로 여름에는 불처럼 뜨겁고 겨울에는 얼음처럼 차갑다. 이렇게 건축 상식에 벗어난 곳에 자리잡은 까닭은 무엇일까? 절집이 서향으로 밖에 들어설 수 없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바로 마라난타가 들어왔다는 법성포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쪽이 서쪽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법성포를 향한 그리운 마음에서일까.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