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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禪書를 읽자(6)-선원제전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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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해설 - 신규탁 1993년 09월 139호
Ⅰ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스님의 저서는 현존하는 것만 해도 구십여 권이 넘는다. 그 가운데에 「선원제전집」(이하「도서」)는 고려시대 보조지눌스님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 의해 우리와 인연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돈점 논쟁과 더불어 여러 방면에서 이목을 모으고 있다.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없고, ‘봉선사통신강원’에서 발행한 월운스님의 녹음 테이프가 있으며 참고서로는 「사집사기」(이지관, 해인사, 1968)가 있다. 규봉스님 하면 흔히 교선일치敎禪一致 또는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님은 ‘성종性宗’의 교학을 바탕으로 그 밖의 교학, 중국의 전통사상, 선사상 등을 비평하고 우열을 매겨 자기의 사상 안으로 흡수했다. ‘성종’이란 이른바 화엄종을 말하지만 규봉스님의 ‘성종’이해는 현수법장, 청량증관스님과도 조금 다르다. 경전을 해석하는 행상行相뿐만 아니라 과목科目을 나누는 입장도 부분적으로 다르다. 규봉스님의 사상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인간 본질에 대해 반성이 시작되던 시기이다. 스님은 인간의 근원을 ‘본각진심本覺眞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음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고 세상일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마음이 나의 근본임을 탁 깨닫고 수행하다 보면 타고난 ‘본각진심’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스님은 이 ‘본각진심’ 사상을 진리체계의 중심에 설정하고, 선禪과 교敎는 물론 유儒와 도道 사상을 자신의 철학 체계 안에서 우열을 매겨 배치한다. 이렇게 인간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당시 지식인들의 중심적인 문제로서 중당 이후 사상계의 큰 물결이다. 이것은 천명설天命說을 반대하고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자각운동이기도 하다.

Ⅱ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하늘(天)’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생각을 의심하게 했다. ‘하늘’은 자연현상의 하나임은 물론 인간 운명의 주인이기도 했다. 바로 이 ‘하늘’에 대한 생각이 당나라 중기를 고비로 바뀐다. 한유韓愈(768∼824)와 유종원柳宗元(773∼819), 유우석劉禹錫(772∼842) 사이에 오고 갔던 ‘하늘’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한유는 하늘이 인간에게 벌을 주기도 하고 상을 주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서경」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아주 오래 되었다. 이에 대해 유종원은 하늘과 인간은 별개라는 「천설天說」을 지어 한유를 반박한다. ‘복을 받는 것도 제가 하기 나름이요, 화를 입는 것도 제 탓이다.’ 하늘은 그저 ‘물物’일 뿐 세상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한편 유우석은 ‘하늘’을 자연으로 해석하고 「천론天論」이라는 논문에서 ‘天與人交相勝, 還相用(하늘과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했다. 인간이 해야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노력하면 자연의 재해는 물러가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이 인간에게 화를 입힌다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 활동과 주체성을 일깨워 준다. 이런 사고의 변화는 당나라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인데 여기에는 ‘안록산의 난’이라는 엄청난 계기가 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 이렇게 적었다.
‘때는 천보天寶 14년(755년) 11월 9일. 안록산은 십오만 군사를 이십만이라 소문내고 범양范陽 땅에서 반란. 쇠마차를 탄 록산이 날고기는 기마대를 지휘하니, 흙먼지 천리까지 날고 진군의 북소리 천지를 뒤흔든다. 오랜 태평성대로 전쟁을 몰랐던 백성들은 난리났다는 소리에 기절초풍......’
한 달만에 낙양성이 무너지고, 이듬해 6월 8일 서울 장안이 함락된다. 십삼일 새벽 양귀비는 현종을 따라 피난길을 나섰지만, 나라를 기울게 한 죄로 신하들의 손에 죽는다. 이 사연은 백락천의 ‘장한가長恨歌’에 애닳게 묘사된다. 칠 년 가량의 난리였지만 그 영향은 대단하여 ‘세금과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왕사王事가 마비되어 균전법과 조용조 세법과 부병제가 무너진다. 이 때를 전후로 중국의 역사는 커다란 분기점을 맞이한다. 이 시기가 되자 인간의 문제를 인간이 아닌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운명, 천벌, 주술 따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난다. 인간 내부 문제에 눈을 돌려 본질 탐구에 관심을 쏟는다. 규봉스님의 「원인론」도 이런 사상의 흐름 속에서 나왔다. 선사들이 이 무렵에 ‘자기自己’라는 말을 많이 쓰기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임제록」에서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라고 수행자들의 주체적 자각을 일깨우는 것이라든지, ‘견성見性’을 강조하는 「육도단경」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이 무렵에 만들어진 도교 경전에 ‘도성道性’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지식인들의 입에 ‘본원本源’이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렸던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주체성과 인간 본질에 대한 자각은 당시 사상계의 물결로서 문화 전반에 흐른다. 그러므로 유도불 삼교의 종파의식이라든가 삼교의 영향관계라는 관점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큰 보탬이 안 된다.

Ⅲ
더구나 규봉스님처럼 다양한 교육을 받은 뒤에 절에 들어온 경우는 특정한 종파의 틀보다는 당시 사상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규봉스님은 당나라 때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학교교육을 마친 뒤 과거 시험 보러 가다 출가하니 이 때가 스물 여덟 살이다. 국립대학인 셈인 장안 국자학의 교과목을 보면 크게 다섯으로, 첫째, 대경(수업 연한 각 3년)-「禮記」「左典」. 둘째, 중경(각 2년)-「毛詩」「周禮」「儀禮」. 셋째, 소경(각 1년)-「周易」「尙書」「公羊春秋」「穀梁春秋」. 넷째, 필수과목(각 1년)-「孝經」「老子」「論語」. 다섯째, 과외 과목(틈틈이)-「隷書」「國語」「說文解字」「字林」「三蒼」「爾雅」이다. 이상의 교과목은 과거 시험의 출제 경향과 맞물려서, 온 나라의 교육에 그대로 영향을 준다. 당대에는 국정 교과서를 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경정의」이다. 각 경전마다 누구의 주석서를 채택하느냐는 학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입김도 있어 그 선정과정은 볼 만하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두 종류 이상의 경전(이를테면 대경 한 종-소경 한 종, 중경 두 종, 대중소 각각 한 종, 대경 모두-중경 한 종-소경 한 종)을 통과해야 한다. 규봉스님의 「원각경대초소」를 보면 이상의 교과서는 물론 도교의 경전을 종횡무진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규봉스님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출가 이전에 익힌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스님은 배휴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유우석, 백거이와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전등록」 권 13에 보이듯이 상공 소면, 사산인, 상서 온조와의 교류, 나아가 환관을 몰아내려다 발각되어 종남산으로 도망 온 이훈을 숨겨준 일은 유명하다.

Ⅳ
여기서 우리는 규봉스님이 자신의 글에서 말한 불교계의 판도와, 당시의 실제 불교 상황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도서」에서 선사와 강사가 서로 적대시하듯 한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논의의 전개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무대이다. 선사상의 소개도 마찬가지이다. 규봉스님은 「도서」「배휴습유문」「원각경대소초」(이하 「대소초」) 등에서 북종의 신수스님, 마조스님, 하택스님, 우두스님 들의 선사상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어디까지나 규봉스님이 자신의 ‘본각진심’사상 체계 속으로 끌어들여 소화한 것이다. 이 점은 당시의 자료들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다. 규봉스님은 당시 선종의 중심이 되는 수행론은 ‘돈오점수’라고 했는데 이것은 「도서」의 다음 문장에도 잘 드러난다.
‘제 마음은 본디 맑고 깨끗하여 번뇌가 없으며, 번뇌가 없는 지혜로운 성품이 본디부터 있어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님이어서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돈오頓悟하는, 바로 이런 수행이 최상승선이다. 이것을 여래청정선이라고도 하고 일행삼매라고도 하며 진여삼매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삼매의 근본이다. 만일 언제나 끊임없이 닦고 익히면 백천가지의 삼매를 저절로 차차로 얻는다(漸得). 달마스님 문하에 전해내려 온 것이 바로 이 선이다. 강원 이력을 볼 때 첫째 문단은‘명돈오明頓悟’, 둘째 문단을‘명점수明漸修’라고 과목을 붙이는데, 이것은 규봉스님의 선종관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달마선종의 수행 방법을‘돈오점수’로 해석한 것은 당시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규봉스님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하택 신회스님만 해도‘돈오무심’또는‘돈오무상’을 주장한다. 이 점은 신회스님의「단어」등이 돈황에서 발견됨에 따라 잘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북종 신수스님의 제자 보적스님이 지은「대승오방편북종」의 내용이 규봉스님의「대소초」에 발췌 수록되어 있는데, 원저자의 생각이 많이 굴절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규봉스님이 말하는‘돈오점수’는 당시 선가의 입장을 설명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표명이다. 그래야만 수행을 부정하는 이른바‘자연주의’에 빠지지 않고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봉스님이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 말을 거쳐 후대로 내려오면서 방탕한 선이 나온 것을 볼 때 규봉스님의 주장은 귓전에 흘려 버릴 말씀이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돈오점수’는 인간의 근원을‘본각진심’으로 파악한 규봉스님의 수행관이지 당시 선가의 실상은 아니다. 규봉스님은 교가의 입장에 서서 선가의 사상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 설명한다. 선가의 사상인‘돈오頓悟’를 가져다 교학의‘돈교頓敎’의 한 부분에 집어넣었지만, 사실‘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상의 분류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물론 청량 증관스님이「화엄경수소연의초」권2에서 남북선종 가운데에 자신의 사상체계에 맞는 것은 받아들이고 맞지 않는 것은 버리듯이 증관스님은‘돈오점수’설만을 받아들여 나머지를 생략하고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채택한다. 그렇다고 규봉스님이 당시의 사실을 날조했다고 후스(胡適)나 야나기타세이잔(柳田聖山)처럼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오히려 규봉스님이 당시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해석한 의도가 무엇이고 그것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는 일이다. 규봉스님은 인간에게는 본디부터 무엇인가를 아는 마음 곧 ‘본각진심’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음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입장에 서서 당시 유행하던 운명설, 자연설, 허무대도설, 주술 등의 허위를 폭로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강조되던 중당 이후의 시대 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당시에 새로 일던 ‘하늘’에 대한 생각의 변화와 그 맥락을 함께 한다. 이러한 규봉스님의 ‘본각진심’과 ‘돈오점수’사상은 그 뒤 중국 철학사의 인성론과 수양론의 기본적인 흐름이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 제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