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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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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성철 1993년 09월 139호
환자 진료 틈틈이 좌선과 독경으로 불교 공부를 하다가 내친 김에 불교를 알려면 제대로 알자는 생각에 동국대 대학원 인도 철학과에 들어갔다. 어언 칠 년이 흘러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주제넘게도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불교학과 인도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니, 결국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고 만 꼴이다. 고등학교 시절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무게와 똑같은 무게로 내게 다가왔다. 그런 고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직업을 택해 치과대학을 지원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능엄경을 보고 나서는 불교 공부만이 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것이 나의 초발심인 셈이다. 지금은 이름 석 자에 불교학을 공부한다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방패막이가 되어 자칫 초발심의 신선한 열정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 동안 교학을 공부하며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갖게 되었으니 삼보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나는 삼계설을 믿는다. 삼계 육도가 마음이 만든 것이면서 지금 내 눈앞의 꽃병처럼 확연히 있다는 것을 믿는다. 많이 베풀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내생에 욕계 육욕천의 하늘 나라나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며 그 위에 선정까지 닦으면 색계천인 형상의 하늘 나라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또 그런 형상의 색계를 추구하지 않고 요가 행자처럼 삼매의 경지를 추구하면 무색계천의 하늘 나라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삼계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말씀이 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꽃병도 마음이 만든 것이고 가끔 앓는 몸살도 마음이 만든 것임을 확연히 아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환상이나 꿈과 같은 세상 속에서 “있다”는 표현을 익혔기에 우리 중생은 환상과 같고 꿈과 같은 삼계와 극락은 확실히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지옥과 극락 모두가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마음의 법문”은 자칫하면 현생은 존재하는데 내생은 없다는 단멸론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영혼이 있어서 죽은 뒤에 그대로 내생에 태어난다고 생각하면 상주론常住論의 병에 들어 영원히 해탈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삼계 윤회는 등불처럼 상속되는 오온의 십이연기적 흐름으로 이루어진다는 중도 연기 실상의 토대 위에서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나의 현재 행동이 나의 미래의 삶을 결정하므로 일거수, 일투족, 생각 하나까지 조심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이 내가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바탕이다. 세속에는 얼마쯤의 복을 추구한다. 사람에 따라 자신이 만족하는 복의 정도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출가할 생각을 내지 못한 나로서는 나에게 딸린 식솔들이 질병없이 세속적인 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여건이 될 만큼까지는 복을 추구한다. 선행을 하고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혹 그래도 안 되면 복을 위한 좌선을 한다든가 보살 신중님들의 타력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복의 토대 위에서 공부를 한다. 깨달음의 공부를 해 나가다가 죽을 때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의 하늘나라에 태어나거나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을 구급약품처럼 간직하고서 “삶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모든 걱정이 사라진 편안한 열반”의 상태를 터득하고자 공부한다. 깨달음을 위한 공부는 게을리 하지 않지만 혹 공부가 미진하여 현생에 깨닫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 공부할 수 있는 삼계 속의 도솔천이나 삼계 밖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욕락과 복을 지나치게 추구하지는 않지만 마음 공부를 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도록 뒷받침이 될 만큼은 추구하며 산다. 삼계 속의 하늘나라든 현실적인 복락이든 이러한 세속 세계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가 추구할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차제 설법이라는 이름으로 재가 신자에게 설하셨던 부처님의 말씀대로 보시행을 하고 계율을 잘 지켜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만도 오탁악세의 우리 중생들에게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런 하늘나라에조차 태어나지 않고 모든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 진료 틈틈이 또는 새벽녘에 일어나 경론을 연구하고 공부 도중 떠오른 의문들을 화두처럼 품고서 다리 꼬고 좌선한다. 동국대 대학원 입학 전에 학사 편람에 기록된 불교학과 교과목을 하나하나 독학하였지만 중관학에 대한 자료는 구하지 못해 원문을 직접 보려고 신수대장경을 구입하여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석사 학위 논문도 중론을 소재로 제출하였고 논문 몇 편을 쓰다 보니 용수 보살의 중관학을 전공하는 꼴이 되었다. 우연히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원시 불교를 올바로 조망하는 틀이 되는 것이 중관학이요 유식 불교나 선종 등 대승 불교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중관적인 반야 공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리란 생각이 든다. 처음 중론을 접했을 때 교묘한 논리에 탄복하였지만 분에 넘치는 사상을 공부하다 보니 용수 보살의 말씀대로 공이 독이 되어 모든 가치 판단이 상실된 적도 있다. 말하자면 일체가 공하기에 계율도 공하다고 착각하면서 툭하면 고주망태가 되어 육두문자를 거리낌없이 내깔기는 악취공에 빠져 헤맨 경력도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러다가 용수 보살의 사상 중에서 현실을 긍정하는 측면을 찾으려고 대지도론을 읽기 시작하였다. 애초에는 화엄적인 일체 긍정의 사상을 찾아보려고 하였는데 거의 육 개월 동안 대지도론을 보다가 진속 이제설이 바로 현실 긍정의 사상임을 알게 되었다. 곧 세속의 진리인 속제적 행이 바로 우리가 현실적, 분별적으로 따라야 할 규범임을 알게 되었다. 진속 이제 가운데에 진제를 무시하면 영원히 해탈을 할 수가 없고 반대로 속제를 무시하면 악취공에 빠진다는 것이다. 대지도론을 보기 전에도 귀에 못이 배기게 들어왔던 교설인 이제설의 새로운 모습이 발견되면서 나는 공병空炳 또는 악취공의 나락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가 있었다. 진제적 공이란 마치 빨래 비누와 같아 철저한 세속적 선행에 대해 분별을 씻어주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금강경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구절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새롭게 다가왔다. 곧 철저히 보시를 하되 티를 내지 말 것이며 올바른 마음을 내되 집착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이 구절을 철저한 보시행과 올바른 마음을 소홀히 하고 “무주상”과 “응무소주”의 측면만 중시하였다. 이렇게 세속적 선행의 토대 위에서 공이라는 비누로 인식의 병을 세척하며 공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며 사는 나는 밑빠진 독에 청정한 물을 부으며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