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지지 않은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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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주찬옥
1993년 09월 139호
법산스님의 속가 나이는 아마도 서른 안팎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스님은 키가 컸고 무척 말랐으며 말투에 약간 경상도 억양이 묻어 있었다.
젊은 스님이었을까? 사자암에 있다는 이 스님은 스님이라기보다는 순수하고 깨끗한, 철학과 학생 같은 인상이 먼저 느껴졌다.
“언제 한번 사자암 구경갑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켜지지 않은 또 하나의 약속이 있다.
“아함부 경전이 끝났으니 다음에는 어떤 경전을 할래요?”
마지막 원고를 가지고 간 다음날의 전화였고, 그때 나는 “으악”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으악 이라는 감탄사에 담긴 뜻은 여러 가지였는데, 그것은 그 어렵고 힘들고 두려운 작업을 또 하란 말인가 하는 뜻과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쓰게 되리라는 체념과 긴장이 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경전의 새로운 작업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아함부 경전의 마지막 테이프도 제작되지 못했다. 법산스님은 아함부 경전을 제작하다가 스튜디오 화재 사고를 당해서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다.
법산스님을 만난 것은 삼 년 전 겨울이었다. 나는 드라마를 쓰는 작가였고 스님은 대중 포교용 오디오 테이프를 제작하는 ‘소리불’의 대표였다. 스님은 내게 불교경전을 드라마 원고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두려워서 망설였다. 불교에 대해서 내가 과연 얼마나 아는가.
나는 지금도 누가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조금 망설이다가 “불굔데요...”하고 대답한다. 당당하고 확신에 차서 “불굡니다” 하고 대답하기에는 나 자신이 불교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경계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매혹적인 작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늘 공부를 해야 할텐데 하면서도 게으르기 짝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실제로 나는 ‘밀린다왕문경’과 ‘아함부경전’을 쓰면서 부처님 말씀을 참으로 많이 들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 동안 경전의 방대한 양에 질려서 불교란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며 그 많은 경전을 다 읽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 줄로 알았다. 막연한 경외심의 대상이었던 부처님은 아함부 경전에서 전혀 다른 모습, 친절하고 편안하며 자상하신 모습으로 계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깨달아 말씀하시고자 했던 진리는 오직 하나, ‘연기설’이며 그 방대한 경전들을 실상 자세하고 친절한 부연설명이라는 것 등을 알았다. 불교는 비로소 나에게 선명하고도 친숙한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물론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참고하고 불교사전을 뒤적여 가면서 쓰는 작업이지만 쓰는 사람이 그 설법의 뜻을 이해하고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베끼는지 하는 차이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은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성우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고 나서 쓰거나 읽는 말은 진짜 말이 되어 듣는 사람 귀에 전달되지만 그렇지 않고 다만 베끼거나 글자를 읽는 경우는 그저 소리로만 들릴 뿐이어서 듣는 사람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과연 제대로 이해했는지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 원고가 나오면 법산스님의 감수를 거쳐 녹음 작업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함경 열두 개 테이프 분량을 다 쓰고 난 뒤지만 이제 다시 쓰라면 잘할 것 같다는 늦은 탄식이 뒤따랐다. 무지한 자가 용감하다고 하더니 내가 그 어리석은 용기를 낸 것 같다.
작업은 재미있었다. 나는 심지어 부처님께서 “걸식할 때는 같은 집에 계속해서 가지 마라”하신 말씀을 듣고서 크게 웃기조차 했다. “법산스님 부처님은 정말 자비로우신 분이네요. 어쩌면 이렇게 시시콜콜한 잔소리까지 다 하시고...”법산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서슴없이‘시시콜콜한 잔소리’라고 표현하는 나에게 “잔소리라뇨. 잔소리라니... 거참”하고 못마땅해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분 좋아했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느꼈다. 큰 진리를 얻고 지혜를 얻은 부처님이셨지만 아주 하찮은 데까지, 하근기의 중생들에게까지 상대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시시콜콜 자상하게 잔소리하기란 여간한 인내와 자비심이 아니면 안 될 것이라는 감탄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는데, 독화살 비유를 듣고는 그때 내 마음속에 들끓고있던 지옥 같은 고통을 잠재울 수 있었다. “독화살, 독화살... 뽑자, 뽑자.” 그런 뒤 나는 마음이 평화로워져서 안정을 찾았다. 물론 안정과 평화도 잠시뿐 다시 혼란스러워 했으나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면 즉시 “이건 독화살이다. 뽑아야 한다”하며 번뇌의 불을 끄곤 했다.
다시 법산스님 얘기로 돌아가 보자. 법산스님을 따라서 처음 ‘소리불’사무실로 간 날은 추운 겨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씬데 사무실이라는 곳은 살풍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쉽게 얘기를 하면 지하 단칸 셋방살이였다. 빌딩 지하에 ‘신라음반’이라는 음반 회사 사무실이 있는데 ‘소리불’은 그 신라음반 한 귀퉁이 방에 세들어 있었다. 책상 한 개, 소파 한 개, 자동응답 전화기 한 대, 그리고 난로 한 개... 그것이 전부였다. 법산스님은 회사 사장과 친교가 있어 싼 비용에 스튜디오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썰렁한 지하 사무실 한쪽에는 녹음 스튜디오가 있었다. 방송국의 녹음 기자재들을 보아온 내 눈에는 개인 취미용 정도가 아닐까 싶을 만큼 아담하고 조촐한 스튜디오였고, 스님은 그나마 신라음반 직원들이 퇴근한 뒤인 저녁과 밤시간 혹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작업을 하곤 했다. 법산스님은 그곳에서 직접 녹음과 편집을 했다. 어디 녹음 편집뿐인가. 재정 형편상 성우들을 여러 명 부르지 못해서 스님 스스로 단역 성우의 역할도 했다. 나는 완성된 테이프를 들으며 스님을 놀리곤 했다. “범지 우다야가 경상도 남잔 줄은 몰랐는데요.” 그러면 법산스님은 맨머리를 손바닥으로 쓸거나 손가락으로 긁으면서 순지하고도 수줍은, 그러나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최고로 재수 없는 놈 아녜요? 부처님도 못 알아보고 고개 설레설레 젓고 가 버렸어. 내가 바로 전생에 그 재수 없는 바보 우다야였을 거 같애요.” 그러나 그 수줍고 장난기가 있고 어린애같이 맑은 법산스님은 소리불을 끌어가면서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렸다. 회원용으로 제작 배포하는 것이어서 회원들의 회비 납부가 재원인데, 이 회비가 제때제때 들어와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회비 보내세요”하고 말을 할 스님도 아니고 보면 재정 압박이 목을 죌 거라는 짐작을 했다. 거의 내색하지 않다가 가끔 탄식이 새어나오듯 하던 스님의 고민이었다. 또 스님은 속가의 어머니에 대한 고통과 고민도 안고 사셔서 그 때문에 아주 잠깐 환속을 한 적도 있었지만, 역시 그런 고통에 대해서 털어놓은 적은 거의 없었다. ‘소리불’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도 스님을 가슴 아프게 했을 것이다. 법산스님은 은사 스님에게 내려가 다음 학기 학비를 얻으려 했을 때 은사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장사 잘하고 있는 놈한테 내가 왜 돈을 줘.” 결국 스님은 학비를 받지 못하고 돌아오셨다고 한다. 나는 한편으로 그런 고민들을 껴안고 살았던 법산스님이 덕 높은 노스님들보다 더 정겹게 느껴진다. 높은 자리에서 가르침을 주는 스님보다 비슷한 연배로 비슷한 고민을 껴안고 살면서 친구처럼 함께 불법에 대해 토론하고 가르침을 주던 젊은 철학도 법산스님에게 나는 큰 영향을 받았다. 법산스님은 아함경 작업을 하다가 스튜디오에 불이 나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소식에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맨머리에 손을 얹은 채 수줍게 약간 입꼬리를 찌그러뜨리며 수줍게 웃던 스님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을 때 나에게 불법을 가까이 끌어준 인연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