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의 역사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것은 상상을 바르게 한 눈일 것이다.
흔히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처럼 상상적인 것이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은 늘 초월의 의미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언제나 상상 밖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검증함에서 선두주자는 상상의 챔피언일 수밖에 없다.
자료와 유적, 불충분한 사적 상황들은 낙엽 지는 숲길이나 깊은 밤 어둠 속, 아니면 극한 상황에서 떠오르는 상상을 통해서만 비로소 체계를 갖추어 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다각도로 분석해서 현재화 또는 미래화 시키는 것이 학문이고 체계화된 이론이며 삶이라면, 그 허구성을 보완해 내는 것은 가정이며 상상일 수밖에 없다.
보기를 들어 보자. 경전이라는 것은 문자라는 부호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까지도 문자로 담고 있다. 그래서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고 하면, 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도道라고 해도 좋은 그 어떤 것들을 상상하거나 그것과 교감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매양 똑같은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현재나 미래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런 질문이 계속된다면, 역사는 상상 속에서 진행되므로 지금 이 세상을 바로 보고 정리해 낸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불가능에의 도전
도전을 통한 결과물은 미래형일 수밖에 없다. 도전이라는 것 자체가 현재형의 틀을 깨뜨리는 행위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전적이라고 할 때는 파격과 환상성을 동반하고 있고 그 결과는 상상 밖일 수 있다.
인간의 내부 세계에 대한 도전이 종교, 철학, 사상들이라면 외부 세계에 대한 도전의 양상은 과학, 문명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의 깊이와 폭은, 불가능이라 여겨 왔던 상상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수정을 거듭해 왔고, 존재의 비밀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해 왔던 인간들에 의해서 그 베일이 얼마쯤은 완전하게, 또 얼마쯤은 불완전하게나마 벗겨졌다. 생로병사의 흐름에 도전한 인간 고타마 싣다르타는 흐름 속에 있으면서도 흐르지 않는 법을 깨우쳐서 그것을 그 흐름 속에 있는 삶들에게 보여주었다. 종교는 흐르되 흐르지 않는 법을 보여주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일류일불류一流一不流. 하나는 흐르되 하나는 흐르지 않는 법을 함께 하지 않으면, 가능성에 대한 도전은 이미 예기된 허망한 결과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현재의 상황 정리에 도전함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되찾는 일이 아닐까. 살아감에서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에 도전함으로써 흐르되 흐르지 않는 본디 모습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상상의 역사가 눈앞에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선행 조건이다. 스스로 닫힌 존재라 생각되면 열린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도전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상상의 현재화일 것이다.
미래형 역사 구도의 허구성
우리가 미래의 삶의 모습을 실감나게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곳은 EXPO 현장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신체와 정신 그리고 도구들의 진화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는 모든 면에서 고대보다는 훨씬 행복하고 상상이 현실화된 꿈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학설에 따르면 고대인간은 포유류의 단순한 신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뇌 기능의 발달로 네 발 걸음에서 두 발 걸음으로 진화했고, 호모파베르 곧 노동적 인간(공작인)에서 호모사피엔스 곧 지적 인간(지성인)으로 또 호모두덴스 곧 유희적 인간으로 변화했다.
초기의 생명 유지 방법은 단순히 자연에서 음식물을 채취하는 것이었다. 수렵, 어로, 채집 등 생산 수단을 통하지 않은 단순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재배를 통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면서 농경 문화를 이룩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고대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먼저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어떤 학설에 따르면 연령을 추정할 수 있는 선사 시대의 유해 가운데에 삼분의 일 이상은 스무 살 이전에 사망했고, 나머지는 스무 살에서 마흔 살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상은 즐거우니까. 이 자료를 무시하고 상상해 보자. 먼저 그 시대에는 도구가 단순했으므로 온몸으로 세상을 부딪혀 나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체가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종에 비해서 힘이 세지 않았을 것이므로 도구를 통해서 그들과 대항하고 투쟁했음에 틀림없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지혜가 아니고 지배를 위한 지혜가 있어야만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초기 인간들은 자연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체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도구에 의해 삶을 보호받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원시 시대의 조건에 놓여 있다면 과연 얼마만큼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얼마 가지 못해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라는 것의 특징 가운데에 하나가 방어 수단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가시 위해 타인의 목숨도 서슴지 않고 유린하는 공격 수단을 방어 수단의 중추로 여기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역사를 돌이켜 본다면 단순히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방어 수단을 넘어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목숨을 무참히 빼앗는 공격 수단이 역사를 바꾸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서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정신적인 면에서의 변천 과정 또한 과거와 견주어 현재가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종교만 보더라도 현대 종교 사상과 행동 양식이 지나간 시대의 종교 유형을 답습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불교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대 조사들이 던져 준 의심 덩어리를 지금도 붙잡고 헤매고 있다. 교리의 해석 또한 시대적 상황을 호도하기 위해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변신해 왔을 뿐, 우리 - 교주 석가모니나 역대 조사들처럼 치열한 도전을 통해 정신을 개조시킨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수행 조건이 과거에 비해 훨씬 편안하고 체계화되어 있는데도 정작 수행의 결과는 보이질 않고 있다. 삶을 통해 끊임없이 질타 당하고 매도되었던 추악함 면들만 선명히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환경이 개선되고 육체를 편하게 하는 도구들이 진화될수록 인간의 정신은 오히려 퇴화하고 있음을 보면, 어느 부분의 발달은 또 다른 부분을 퇴보시킨다는 논리에 다다르게 된다.
도구의 변화, 곧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삶과 세계를 엄청나게 변화시켜 왔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EXPO 현장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과학이 이룩해 놓은 현대 문명 이상의 뛰어난, 더욱 편리한 문명이 인간에게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전시관만 하더라도 테크노피아관, 우주 항공관, 주거 조형관, 도약관 등 더 뛰어난 기술에 의한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 뜻의 이름이 수두룩했다. 물론 과거의 뛰어난 문화 유산을 전시해 놓은 곳도 있었지만 최첨단 과학의 성능을 과시하는 조형물이 대부분이었다. EXPO의 전시 내용처럼 미래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현대 사회보다 소비 성향이 훨씬 강한 문명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EXPO의 목적 가운데 자원의 재활용이라는 내용이 있지만, 재생 불가능한 문명의 배설물이 적지 않기 때문에 소비 지향적인 미래 사회가 어떻게 유토피아적인 삶인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미 환경 오염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단계에 와 있는데, 오히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차분히 달려온 문명에 대한 냉정한 반성을 통해 버릴 것은 버리고 변화시킬 것은 더 바꾸어서 서로의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는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말하지만 생명은 조화를 통해서만이 편하고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폭력성은 다시 생각할 것도 없지만 미래 사회도 그런 범죄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일조 칠 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투입한 이 행사는 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호모파베르보다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호모루덴스가 이상형의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EXPO를 본 소감이었다. 그것은 지혜를 지식에게 송두리째 점거 당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계가 빚어내는 EXPO 현장에는 종교가 필요 없었다. 갖가지 신기한 현상들이 숭배 받고 있었다. 컴퓨터나 로봇이 보여주는 현란함이 종교 이상으로 추앙 받고 있었다. 묘하게도 종교관은 전시장 내부에는 없고 전시장에서도 꽤 떨어진 아파트 군에 있었다. 종교의 미래는 없는 것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모든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종교가 발생했다는 보편적 명제는 한낱 특수한 명제를 위해 생긴 기계에 의해 내팽개쳐지고 만 것이다.
종교인들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미래 사회가 현재보다 나을 거라는 문명 사관을 허구에 가득 찬 논리라고 고발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알아서 기는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대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