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어느 날 신도님 몇 분이 꽃모종을 한아름 가지고 다래헌을 찾아왔다. 밖에서 돌아와 보니, 잡초 무성한 뜨락 한 켠에서 백일홍과 맨드라미 그리고 채송화 모종으로 꽃밭을 일구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는 분들임에도 오랜 손때가 묻은 호미와 모종삽을 준비해 온 것으로 보아서, 오래 전부터 나의 게으름을 눈여겨보아 온 것이 분명하다.
무성히 자란 잡풀을 뽑아 내고 흩어져 있던 벽돌을 모아 가지런히 쌓아서 작고 예쁜 꽃밭을 일구어 놓았다.
한 보살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당이 하도 쓸쓸해서 꽃이라도 심어 드리려고 왔어요. 적적하실 텐데 꽃이라도 보며 정진하세요.”
꽃밭을 이렇게 가꾸어 놓았으니 서울에 산다는 핑계로 게으르지 말고 이 작은 꽃만이라도 소중히 가꾸면서 살라는 당부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말속에 내 게으름에 대한 회초리가 들어 있는 것 같아 숨을 곳이라도 찾고 싶었다.
아직 나지막하긴 하지만, 한여름 햇볕을 가르며 쭈뼛이 자신들의 자리 매김을 하는 꽃들의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보살님들 손길이 무척이나 고맙다. 맨드라미는 벌써 만개해서 성난 수탉의 벼슬처럼 힘차게 뭉쳐 있다. 백일홍은 장마 속에 아직 제 빛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채송화는 자꾸만 키가 크고 있다. 아침 햇살에 채송화를 볼 날이 며칠 남지 않아서 가벼운 흥분마저 인다.
행자 시절 파계사 내원內院의 노스님 처소에 올라가서 희한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개화를 앞둔 화단의 꽃봉오리가 모조리 잘려 있었다. 있어야 할 꽃송이들은 보이지 않고 목 잘린 몸뚱이만 수수깡처럼 서 있는 꽃밭을 상상해 보라.
잡풀 하나 없이 잘 가꾸어진 화단에 단색의 잎들만 하늘거리고, 찾아오는 벌 한 마리 없이 제 무게를 견뎌 내는 그 불쌍한 놈들의 말없는 절규를 노스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며칠을 벼른 끝에 스님에게 왜 꽃봉오리를 죄다 잘랐냐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꽃 때문에 출가승 마음에 색심이 일어날까 봐 그렇게 했다는 거였다. 꽃을 보면 이성보다는 감성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사문沙門의 본분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릴까 봐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그때 나는 몹시 불만스러웠다. 스님의 행동을 성급하게 판단하지는 말아야겠지만, 그런 이유라면 뭐 하러 꽃을 심었지 싶었다.
지금 다래헌 주변에는 내 키에 버금가는 잡풀이 꽉 차있다. 그야말로 초본지대이다.
창문을 열고 흐트러진 머리칼처럼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자라 있는 씀바귀 대궁이며 만개한 망초꽃을 보는 것도 한낮의 더위를 잊는 한 방편이다. 약수터를 오가는 마을 사람들이 내 게으름의 흔적인 그것들을 보면서 혹시나 ‘게으른 중놈’이라고 오해하지 않을까 우려도 해 보지만, 그 놈들이 내가 사는 이곳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맑게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그냥 두었다.
청규 아닌 짜여진 일상 속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어느 사형의 말처럼 ‘샐러리맨 스님’이 되어 살다 보니 별 희한한 변명도 다 하는 것 같다.
어느 신도 분이 산중에 찾아와 스님은 산에 있어야 진짜 스님 같고 도시에 사는 스님들은 모두가 샐러리맨 같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우울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순수를 갈망하고 있구나’하고 위안도 해 보았지만 그 말은 여전히 묘한 여운이 되어 남아 있다.
말로써 표현되는 수행자의 모습보다 말없음 속에서 보여지는 수행의 진지한 모습에 대한 동경憧憬인지, 아니면 시내 스님들의 세속화 경향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몰라도 그 애정 어린 표현에 이유 없이 아프게 꼬집힌 느낌이었다.
꽃을 보되 무심으로 보고 어여쁜 여자를 만나더라도 무심으로 충만하여 시是와 비非속에서도 언제나 초연한 것이 진짜 스님의 모습이라면, 난 평생을 땡 중으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아직까지 나는 무심히 꽃씨를 뿌리지 못한다. 그보다는 꽃잎의 색깔을 상상하면서 씨앗을 뿌리고, 튼실한 줄기를 연상하면서 거름을 한다.
꽃봉오리를 꺾어 버릴 용기도 없거니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사 이치를 거부할 아무런 대안이 없다.
재작년 이곳 다래헌 마당 구석까지 제초제를 뿌리고 나서 한참을 후회했다. 한여름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뜨락을 앞에 두어야 했던 것이 얼마나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초지 그대로 방치해 두니, 지금은 여러 종류의 풀들이 서로 키를 다투고 나비가 찾아오고 때론 벌과 무당벌레까지도 볼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 처서를 앞둔 매미소리는 힘차다 못해 곧 자지러질 것 같고, 낮은 키로만 자랄 것 같던 질경이도 제 모습대로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비좁은 틈을 엉겅퀴가 비집고 올라와 바람결에 솜 같은 씨앗을 흩날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있고 여럿이 조화롭게 호흡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가.
허주스님은 팔공산 파계사로 출가하였다.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봉은사에서「월간 봉은」편집 주간 소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