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과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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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철
1993년 09월 139호
산중 큰절, 시골 암자, 도시 포교당 할 것 없이 가는 곳마다 집 짓는 데 여념이 없다. 대방등대집대장경大方等大集大藏經에서 말하는 ‘탑사견고시대塔寺堅固時代’가 이 땅에도 도래한 모양이다, 하긴 임진왜란 이후나 육이오 직후 소실된 것을 임시로 얼기설기 엮은 당우들을 경제력에 다소 여유가 있는 요즘에 다시 짓는 것은 당연히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불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더라도 그 방법론에서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곧, ‘본래대로 복원’ 과 ‘필요에 따른 개조’가 그것이다. 복원론 자들은 당우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최대한의 보수에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조론 자들은 과거 당우는 당시 환경과 문화와 생활과 필요성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당우를 시대 흐름의 결집적 차원에서 현재 삶의 총제적 문화 형태로 보느냐 아니면 되도록 전통을 존중하면서 보존해야 할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저마다 나름대로 이유와 타당성을 가지므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당장 비가 새고 기둥이 내러 앉거나 공간이 협소하여 불편함을 겪는 현실 앞에서 그런 고답적인 논쟁이 정리도리 때까지 복원이나 개조를 미루어 둘 수는 없다. 그런 와중에서 당우들은 복원도 개조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계속 지어지고 있다.
이 년 전 팔공산 동화사에서 열린 강사 운성스님의 전강식에 참석한 뒤 방장스님의 젊은 시절 공부 터인 은해사 운부암을 돌아서 근처 백홍암에 들렀다. 낡은 당우들이긴 하지만 가만히 하나하나 뜯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둥이 사하면 그 기둥만 갈고 서까래가 무너지면 서까래만 가는 식으로 보수한 덕에 퇴락해 보이지도 않으면서 푸근한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옛 가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양 구인사의 오층 대웅전을 비롯해서 시멘트 전각의 단청이 주는 생경함은 먼저 심한 거부감을 준다. 하지만 법회 시설, 주방 시설. 후원 객실 등의 편리함과 실용성 그리고 효율성이라는 현대 문화의 결집적 측면이 더욱 부각되면서 이내 그 장점들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국 보기에도 푸근하고 살기에도 편리한 형태의 불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복원론과 개조론이 갖는 한계를 극복한 ‘창조론‘을 도출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원론, 개조론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도외시한 창조론은 현실성이 없는 희론戱論에 떨어지기 쉽다.
다만 한 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평가란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현재를 평가하는 입장이며, 후대의 평가란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평가하는 입장이다. 물론 현재를 과거의 연장성 위에서 보는 입장과 미래의 출발선 위에서 보는 입장은 가치관과 행동관에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복원론 자와 개조론 자의 입장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인식 사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백제 석탑을 모방한 고려 시대 석탑이다. 가까운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개조성을 가미한 백제 시대 석탑이다. 왕궁리 탑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미륵사 탑은 한 쪽 모서리만 남아 있는데도 그 가치가 대단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현재의 복원 불사 역시 ‘시대성’이라는 개조성이 결여될 경우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이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현재를 단순히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바라보며 지나치게 전통성에 집착하다보면 현재가 과거에 의해 매몰되어 버리는 ‘정지성停止性을 낳게 된다. 결국 그 전통성마저 단절시키는 역설적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복원론이 안고 있는 자기모순이라 하겠다.
모르긴 해도 해인사의 당우 역시 수덕사 대웅전을 모방하여 복원중인 큰 법당을 마주한 구광루보다는 회의실과 수세식 화장실이 달려있는 종각 뒤쪽의 청화당이 나중에는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이십세기 말엽 ‘대한민국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가치 있는 문화재의 하나라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