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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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김화수
1986년 12월 58호
무창하던 잎들이 상엽되어 흩어져버리고 서릿가지로 변해버렸다. 한결 가벼워진 자태로 사람 마음을 비게 한다.
여름 내내 잎새에 가리어져 햇볕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던 겨울산은 잎을 잃은 대신에 위대한 태양열을 공급받아 뿌리를 살찌운다.
지천으로 깔린 낙엽들이 정겨웁게 햇빛을 받아 누워 있고 그 낙엽들 사이로 비집고 나온 춘란의 잎새들이 비수보다 푸르다.
외로운 물소리가 돌 뿌리를 서럽게 적시우고 어데론가 빠져서 가버린다. 산새들이 모여와서 인간의 기교로는 능가할 수 없는 악장을 토해내더니 한 조각 하늘을 이고 사라져버린다.
암자에서 치를 달이는 연기가 잎을 떨군 가지 사이로 극히 통제되어 향불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마음은 비어서 선경에 들고 몸은 가벼워서 학이 되어 날은다.
산 속에서 스님의 행장을 보면 차가운 걸음마다 묻어 나오는 하얀 고무신 콧등에 잿빛 산 그늘이 어린다.
산창을 열면 마음 속엔 어디론가 떠나고픈 여정의 충동이 여름 날 산 안개처럼 밀고 들어온다.
산몸에 뿌리를 묻고 억년 침묵으로 살아온 바위들은 짙은 회색 빛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그리워한다.
찬 서리로 정기를 모은 소나무들은 괴로워 할 줄 모르고 모진 폭풍을 날리우며 영산곡을 울린다.
싼 까치 날아와 고목에 홀로 앉아 엿장수 가위 부딪는 소리로 아래턱을 치더니 산그늘로 숨어 버린다.
소쩍새 떠난 자리에 꿩이 찾아와 대통 쪼개는 소리로 산 감기 기침을 토해 낸다.
무겁게 흰 눈이 내려 설화가 피면 고목 소나무 긴 팔이 저리도록 아프고 허리 긴 대나무다 상부(寶夫)처럼 고개가무겁다.
한없이 뛰어 온 산 노루가 놀란 듯 고개 마루터에 혼자 서서 흘러가는 구름을 훔쳐 보며 호흡이 가쁘다.
못 다 이룬 한(恨)들이 산으로 찾아온 듯 골짝마다 빚어져 나오는 소리 동굴처럼 깊다.
텅 빈 산 가슴에 핏줄처럼 흘러가는 오솔길이 깊은 천년의 전설을 끼고 가는 세월에 외롭다.
진달래로 물들었던 산 이마에는 억새풀 꽃들이 빛 바랜 얼굴들로 바람을 불러놓고 해공을 흐른다.
골짜기엔 물소리가, 가지엔 바랍소리가, 하늘엔 구름 그늘이 일어나 적막을 깊은 밤으로 몰고 간다.
칙넝쿨 등넝쿨이 심한 갈등(葛購)을 일으키며 천년 노송에 붙어서 못 살도록 굴고 있다.
비산비야(非山非野)로 흘러버린 산자락 밭뙤기 보리골엔 줄줄이 파아란 생명의 선으로 살아나 산토끼들이 겨울초 먹이로 입맛을 돋군다.
하늘이 낮아지고 산이 무거워져서 눈이라도 금방 뿌려질 듯하면 마음은 으시시 타간살이 객정 같은 고독이 엄습해 온다.
차가운 강폭을 깔고 중량을 잃은 듯이 떠 있는 벼랑 위엔 외로운 정루(亭樓) 한채가 숱한 세월을 기왓골에 묻고 쓸쓸히 얹혀 있다.
산이 산을 끼고 하늘이 하늘을 이어서 골짜기에로 깊이 내려앉아 화촉 동방의 천지 화간(和姦)으로 능선을 그으며 바람을 넘겨주고 있다.
일몰(日沒)하는 서산 마루엔 열반으로 이어지는 정적이 되살아나고 어느 곳엔가 박혀 있는 암자의 종소리가 번뇌를 걷어간다.
두터운 산이 두터운 산그늘을 길게 깔면서 산장에 와서 닿으면 마당에 걸어나와 뒷짐 짚고 헛기침 쪼개며 산을 지고 걷는다.
겨울산은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갖가지 도상으로 정화의 대상이 되어 마음을 살찌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