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기극의 엑스트라
“힘의 정의”라는 전도된 가치를 위엄 있게 보여 준 경찰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날 조금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는 시민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만“뭔가 크게 잘못 되어 가고 있구나 ! ”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들을 추스리며 최루 가스로 뒤범벅이 된 종로통을 눈물콧물을 흘리며 빠져나와서 대포집 탁자에 둘러앉아 우국의 심정( ? )을 토로하던 한 떼의 무리들 속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석간 신문에는 여-야의 똑같은 승리의 논평이 아전인수격으로 쏟아져 나왔고 당국은 시민들의 피해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과대 선전하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현장에 대한 원천봉쇄로 인해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거리와 같이 살벌한 바람 찬 십일월의 그 아침을 어느 용기 있는 시민이 있어 기웃거리기라도 하겠느냐마는, 우린 알고 있고 또한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그 “강요된 상황”을 당국은 철저히 “시민 일반”을 엑스트라로 하여 멋진 사기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여-야가 벌이는 한판의 사기극에 동원되어 “엑스트라역”을 잘해 낸 우리네는 허허로운 가슴에 소주만 쏟아 붇고 있었! 다.
우리들의 허허로운 심정과는 달리 TV에서는 무역 역조 현상이 개선되어 무역 흑자를 달성했으며 이와 같은 성장률이 지속되면 2000년대에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 할수있다는 무지개 빛 꿈을 듬뿍 뿌려 주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3공화국 시절 “80년대”라는 환상적 미래를 구가하던 뜻 모를 경제적 수치들에 현혹되어 내핍과 희생을 강요당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과연 80년대는 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는가? 세계 제4위의 부채국으로서 의 굴욕만이 우리들 앞에 전개되지 않았던가? 미래에 대한 생각은 누구에게나 긍정적이고 분홍빛 일 수 있다. 그러나 풍요로운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성실성과 신뢰감을 확보한 것이라야 만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단순한“미래 차용”에 머문 눈가림 식의 편의주의로 일들이 진행 될 때 또 다시 많은 다수는 사기극에 놀아 나는 엑스트라로 전락 일 뿐이다.
어려운 매듭들을 풀어가는 데는 성실성과 진지함을 겸비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다수가 함께 논의하고 해결 해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허나 이러한 생각도 갑남을녀, 장삼이사의 힘없는 외침일 뿐 “힘의 철학”을 가치로 삼고 있는 이들에겐 또 다른 형태의 “힘과 다수의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조금은 취한 상태로 대포집 문을 나선 우리들에게 다음달, 십이월의 초하루 조간 신문은 절망을 배달해 주었다. “새해 예산안 90초만에 여당 단독 변칙 처리” 바람 찬 십이월의 아침 햇살이 텅빈 이마에 와 닿는다.
2. 참된 보시를 위하여
“술 권하는 사회”는 분명 병든 사회임에 틀림없다. 어느 사인이 노래한 것처럼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의 태평성대는 어느 역사 시대를 통해서도 실현되지 않으며 결코 그러한 태평성대는 있을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관념적 풍요”는 현실 문제의 질곡들을 방기하거나 유보하는 마취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하여 그저께 마신 술로 인한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린 예의 그 술집에 둘러 앉았다. 술잔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껌팔 이 신문팔이들이 수십 차례 다녀갔다. 2000년대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나라치고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일행 중에 마음이 보드라운 후배 하나가 있어 껌팔러 오는 사람마다 하나씩 사줘 우리의 탁자 위엔 어느새 열통 남짓한 껌이 쌓여 있었다.
나는 문득 이런 하찮은 생각을 해 보았다. 앞으로 찾아오는 모든 껌팔이들에게 모두 껌을 팔아줄수 있을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정 불행한 이웃들에게 베풀어준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베푸는 자의 능력에 따라서, 베푸는 자의 마음대로-----결국 이런 행위는 동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보시는 어떠한 것일까?
부처님께서도 지혜와 복 덕은 동전의 양면 마냥 항시 함께 구족해야 된다고 말씀 하셨다. 지혜를 수반하지 않은 복 덕은 동정이 되기 쉽고 복 덕을 겸비하지 않은 지혜는 사기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보시라는 행위가 동정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적으로 관계지워진 뭇삶(0生)들에게 총체적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현실 상황을 유발한 구조와 관계에 대한 본질적 해결 없이, 어느 특정 개인에게 베푸는 행위는 동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귀한 한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긴 밤을 밝게 밝히는 수술실의 진지한 모습의 의사를 비웃기나 하듯이, 같은 시각, 지구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대량학살을 정당시 하는전쟁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생명의 해방을 위해 우린 어떻게 노력할 것인가?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조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다같이 생각해 볼 문제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