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란 수레바퀴가 돌고 돌듯이 빙글빙글 돌면서 헤맨다는 뜻이고, 해탈(解脫)이란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난 세계라는 뜻이다. 따서 윤회의 세계는 고탈프고 어두운 우리들의 현실이요 해탈이란 그러한 고달픔이 전혀 없이 평온한 성자 또는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윤회의 세계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윤회하는 공간은 이른바 육도(六道)라 하는데, 천상(天上), 인간(A間),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가 그것이다.
천상은 하늘세계이니, 인간에서 착한 일을 많이 닦아 태어나는 곳으로 그 즐거움이 비길 데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선업(善業)만큼만 누리고는 다시 무거운 업을 따라 속절없이 빠져들게 마련이기 때문에 역시 윤회의 범주에 든다고 한다. 더구나 즐거움에 한껏 도취되어 이를 누리는 동안에 다음세상을 위한 공덕을 쌓을 만한 정신이 없는 것이 이 세계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인간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상반되는 곳인데, 정신을 차려 다음 세상을 위한 선업을 닦지 않으면 역시 업에 따라 윤회에 끄달리게 되기 때문에 이 또한 윤회의 범주에 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옥이니 아귀니 축생이니, 아수라니 하는 곳들은 나름대로 모두가 괴로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절없이 과보를 받다가 다음의 업에 끄달리게 마련이기 때문에 모두가 윤회하는 부류에 속한다.
이들 여섯 세계가 한결같이 전생의 업에 따라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겠으나 그 중에도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윤회의 탁류(濁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길은 오로지 인간뿐이라 한다. 그럴 뿐 아니라 업을 지어 여섯 세계로 나뉘어 태어나는 분기점도 또한 인간이다. 그래서 옛어른들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여 쉬지 말고 정진하라고 경계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여섯 갈래로 윤회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앞에서 얼핏 언급하였듯이 그것은 바로 업 (業)이다. 업이란 다름 아닌 자기의 습관이다.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습관이 체질화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지배하는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업에는 악한 업도 있고 선한 업도 있는가 하면 가벼운 업도 있고 무거운 업도 있다. 또, 단독으로 지어서 단독으로 그 대가를 받게 되는 별업(別業)이 있고 비슷한 업을 똑같이 지은 무리가 집단으로 그 대가를 받게 되는 공업 (共業)이 있으며, 한 가지의 업이 단일한 결과를 불러들이는 흩엽 (單業)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사소한 업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커다란 결과를 나타내는 겹업 (複業)도 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장에 지은 업으로 당장에 그 과보를 받는 순현업 (順現業)이 있는가 하면 한번 지은 업이 여러 생을 지낸 뒤에야 슬며시 과보로 나타나는 순후보(順後報)가 있으며, 행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현실적인 업(現業)이 있는가하면 그의 간접적인 행위가 되는 보조업(助業)도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일거일동은 모두가 업이라는 태두리를 벗어날수 없게 되어 있다. 오늘의 행위가 모두 업으로서 씨앗이 될 뿐 아니라 오늘 겪고 있는 일 어느 하나도 우연(偶然)이라거나 요행(燒律)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지난날의 업의 대가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지은 업은 면할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복잡 다양한 나의 업이 오늘의 나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도리를 모르는 이들은 더러 그것을 두고 ‘신의 섭리’라고 한다. 나의 문제를 내가 아닌 신에게로 돌리는
것이 하나의 자위는 될지언정 현명한 판단일 수는 없다. 한편. 우리의 행과 불행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또 ‘운명’이라고도 하는데 이것 또한 나와는 관계없이
운명지어졌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오류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지은 업을 면할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미 지은 업을 쉽사리 없앨수 없듯이 오늘 이 시각에 짓는 업도 없어지지 않을것이라는 가르침임을 명심한다면 운명론의 수렁에서도 벗어 날수 있을 것이다.
업이란 행위를 뭇하고 행위는 가변성이란 개념을 내포한 말이기도 하다. 이미 지은 업에 따라 속절없이 윤회의 와중에서 벗어 날수 없다면 해탈의 세계란 한‘ 이상일 뿐 그림의 먹인 것이다. 그동안 쌓았던 업이 착하지 못했기에 오늘 받는 과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으면 오늘부터 라도 착한 업을 닦으면 무겁던 쪽은 차츰 가벼워지고 가볍던 곳은 차츰 무거워져서 저울추의 높낮이가 바뀔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윤회에 시달리는 생이 해탈의 세계를 희망하고 도전해 볼 가능성을 바라보게 하는 논리적 근거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해탈의 길을 향하는 과정을 환멸문(遺械門)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숙히 빠져든 미혹의 나락에서 차츰차츰 닦아 적멸(寂滅 :열반 곧 해탈)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벅찬 과정이겠는가? 이 환멸문의 법문이 있으므로 우리들이 구제 받을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되, 그것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다. 경전에서 그렇게도 누누히 중생의 미혹을’말씀하시고 괴로움의 실상을 설명하신 목적이 어찌 보면 우려들로 하여금 모두가 이 환멸문으로 향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겠는가 라고 생각된다.
환멸문의 완성은 곧 부처를 이름을 말하겠지만 그 소중한 첫걸음으로서 ‘발심’을 들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당면한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히 두려워…‘ 마음을 내고 그것에서 벗어나자면 첫째 부처님의 세계를 회복하려는 발원과 둘째 자신의 혈맥 속에 찌들은 악업의 옛 자국을 떨어버리려는 참회(懺悔)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윤회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악업의 땟자국을 어떻게 떨어버릴 수 있을까.
최상숭법문(最上秉法門)의 견해에서 본다면 ‘무명악업, 그 자체가 불성이다’ 해서 본래의 자리에는 부처를 구한다는 마음까지도 병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옛적부터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위음왕 이전의 소식 滅音那0更那0)”을 제창하면서 부처도 조사도 모두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법은 과연 무엇일까?
경전에서는 악업의 주장을 탐 진 치 (貪 痴)의 삼독이라고 하였다. 이 삼독이 있는 곳엔 으례 교만과 의혹(疑)이 뒤 따르게 마련이라고 했다. 이틀 다섯 가지는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된다 하여 근본번뇌 (根本煩腦)라고도 하고, 좀체로 끊어지지 않는다 하여 5둔사(純使)라고도 하며, 이들은 모두가 ‘나’ 라는 집착을 버리지 못한 데에서 생긴다 하여 아집(我執)이라고도 한다.
‘나’를 버려라.
우리가 자주 듣는 이 말씀은 아집을 버리라는 뜻이겠는데 이 또한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세 아숭지겁 동반의 수행을 쌓으셨다고 도하고 오십오 위의 수행과정을 마치고 십지 (十地)의 경지에 이르른 보살에게도 나각무명 (羅뤘無明)이라는 어려운 아집의 씨앗이 있다며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열반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을 뿐. 우리에게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헛된 표상일까?
아니다.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너무 낙심하지도 말고, 천리의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면 끝내는 목적지에 이르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서라 하였다. 그 가는 길이 사람 따라 시세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를 비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되고 ‘나’를 비우는 일은 ‘나’를 낮추는 일부터 공부해야 된다고 하였다.
‘나’를 낮추는 일에서는 겸양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겸양할 때, 님에게서 더 큰 것을 들을 수 있고 더 높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나’를 낮추고 ‘나’를 비웠으니 무슨 유혹이 나를 흘릴 것이며, 무슨 압력이 나를 불의로 끌어들이겠는가? 부정과 불의 의 길에 발을 딛지 않는 습관, 그것이 비록 작더라도 필경
은 괴로움 없는 열반의 한 부분이거나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