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면적 자유의 실현
업보설은 윤회설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행위의 결과가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친다면 ‘업’의 논리는 사회적 의의를 상실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 그때만 잘 넘기면 된다는 식의 안일주의로 나아가서는 이른바 쾌락주의나 유물론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던 무렵의 육사외도가 대개 윤회와 업보를 부정함으로써 쾌락주의 및 도덕 부정론의 경향으로 흘렀던 것도 그러한 보기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하나의 행위는 행위 자가 생활하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후세 및 사후의 미래세에서도 그 결과로 나타남으로써 본인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이르고 있다. 또 어떤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를 한 당사자에게 반드시 되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업보 설을 성립시키는 기본 전제이다.
해탈이란 현실의 고통을 멸각하는 것이라 했는데, 불교의 12연기에 따르면 고통의 현실은 계속 순환한다 하였다. 곧,‘고(苦)’가 윤회하는 것이다. 따라서 12연기에 의한해탈은
이 ‘고’의 윤회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그리고 사성제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의 원인은 ‘집(集)’이며, 이‘집’은 바로 인간의 내적, 외적인 욕망이 쌓임을 말한다. 따라서, 이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해탈의 지름길일 터이다. 우리는 외부의 대상과 접촉하여 살아가면서 유쾌하다거나 불쾌하다는 감정을 다양하게 일으킨다. 이러한 감정들이 욕망을 일으키고 행위인‘업’을 이끈다. 욕망의 속성은 반드시 특정한 대가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기 마련이다. 하나의 욕망이 얼마쯤 만족되면 그 민족의 상태를 계속 지켜나가려 함으로써 또 다른 욕망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행위인 ‘업’이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 자체보다도 그 행위 속에 담겨있는 동기 때문이다.
윤회하는 현실에 대한 이 같은 파악은 행의 소극성 또는 부정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 띤다. 곧. 내 행위의 결과는 오직 내게 다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내 자신의 욕망을 없애고 행위를 절제하는 것이 고통의 현실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어, 그저 마음에 걸림이 없는 생활이 곧 해탈의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귀결짓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달성 할수 있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인 자유일 뿐이다. 또, 그와 같은 생각에서 우리에게 욕망이 생기는 것은 현실이 무상한 것임을 잊기 때문이라 보고 현실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내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정신적인 자유는 얻을 수 있을지도 행위 자체의 가치와 의의를 살리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게 되고 현실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도 사변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만다.
이러한 경향은 업보 설을 내 행위의 결과가 곧바로 내게 미친다는 기본 전제에만 한정하여 받아들이고 ‘업’에서 문제가 되는 내재된 동기 곧 욕망을 외면적으로 전화(轉化)하려는 노력을 번거롭게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인도의 전통 사상인 업보설을 채택한 것은, 내면의 자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로서 중시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고’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출세간의 처지에서가 아니라‘고’의 현실에 대처하는 세간의 처지에서 업보 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3. 외면적 자유의 실현 |
부처님 계시던 무렵에 업보 설은 일반인에게 상식으로서 통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불교에 입문하는 필요조건으로 업보설을 내세웠다 한다. 곧 다를 종교에서 불교로 전향하려는 사람에게는 사상과 인격을 조사하기 위해 삼 개월의 유예 기간을 두는 것이 상례였는데 인과업보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런 절차 없이 곧바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것은 불교의 연기설이 인과업보를 기초로 한 것이므로 불교의 초보적인 교의를 이해하는 데엔 인과업보설이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무렵의 업보설은 권생징악의 성격을 띠어 선한 일을 하면 뒤에 좋은 목표에 이르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말하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이다.
이러한 업보 설이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경전에 나타난 것이 바로 시론(施輪),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는 차제셜법(次第說法)이다. 곧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줄 알아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윤리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그 보답으로 좋은 세상에 태어날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이 도리를 중시하셨음은 이것을 설하고 나서 사성제를 설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곧, 업보설을 통하여 사성제의 도리를 유도했던 것이다. 율장의 대품(大品)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팔만의 촌장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속으로 알아내시고 이렇게 차례로 말씀하셨다. 곧, 베품, 올바름, 천상에 태어남, 온갖 욕망의 잘못됨, 덧없음, 더러움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공덕을 설하셨다. 세존은 이것들이 인내하는 마음, 친절한 마음, 장애를 벗어나는 마음, 즐거워하는 마음, 깨끗한 마음들을 낳는다고 알려주고 나서 모든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설하셨으니, 곧, 고통(苦)와 고통을 일으킴(集)과 고통을 없앰(澈)과 이를 위한 길(道)이다.’
부처님이 이처럼 세간의 삶의 방도로서 제시한 업보설이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설과 결합되면서, 업보설은 외면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능동적인 자세의 기반을 이루는 이론이 된다. 연기설은 객체인 온갖 대상이 상의상존(相依相存)함을 곧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을 설한다.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업보설은 한 개인의 행위가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제삼자인 사회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제삼자의 행위의 결과가 그 개인에게도 미친다는 원리를 갖는다. 그리하여 업보설에는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공업은 내 행위의 결과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몸 담고있는 사회 전체가 연대적으로 받으며, 마찬가지로 같은 사회 안에 있는 타인들이 행한 선악의 과보를 나도 공유함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처럼 온 세계가 하나의 연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 개인의 행위는 주변 사회 및 국가에로, 더 나아가서는 온 세계에까지 그 은혜나 미혹을 파급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리 밑에서는 타인의 힘에 의해 내가 좋은 방향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회향(回向)사상과 구제론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리고 중생 구제의 서원을 위하여 자진해서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보살의 이타(利他)적 실천도 공업의 논리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 대가가 돌아가기 바라지 않고 타인의 해탈을 구하는 보살의 욕망은 더 이상 자신의 윤회를 이끌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진화된 종교 사장의 견해이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욕망을 전화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견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업’인 행위는 자유롭게 하되 그 동기가 순수해야만 내면적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외면적 자유도 이룰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업은 해탈을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질 것을 요구하며, 현실과 우례된 출세간이 아니라 현실인 세간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업’의 불가피함과 인간의 예속됨 및 무상함에 대한 자각이 ‘해탈’에의 요구를 치열하게 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해탈이 내면의 자유만이 아니라 외변의 자유도 함께 추구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보살의 세간에 대한 실천적 자세가 선업을 쌓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의 현실을 개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