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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샛골목 사진암자 주인 주 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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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초대석 - 강운구 1986년 12월 58호
아주 친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를 이 제야 알겠다. 어쩌다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제 친구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들 할 터이고, 비난을 하면 제 친구 욕보였다고 할 것이며, 두 가지를 나름대로 적당히 섞어서 쓰면 어중간히 얼버무렸다고 고‘할 것 아니 말이다. 그러나 법연스님께 쓰겠다고 엉겁결에 한 약속-이것은 내가 난 생 처음으로 스님과 해 본 약속이다-을 나로서는 도저히 깰 구실도 용기도 없고·. 아무튼 \"중뿔난” 명덕형을 친구로 둔 값을 힘들게라도 치르긴 해야 될 성싶다.
명덕형은, 누구나 다 약간씩 그런 점이 있게 마련이지만 두 가지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어떨 때는, 또는 어떤 사람에게는 턱없이 까다롭고 괴팍스럽게 굴지만 또 다른 어떤 때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웬일인가 싶도록 상냥하고 시원시원하게 대한다. 따지고 보면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자주 대하며 좋아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못 내며 멀찌기 서서 ‘짝사랑’ 하는 이들로 나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그의 뛰어난 직감력에서 비롯되는 수가 많다. 사진기의 셔터처럼 몇백 분의 일초만 쳐다봐도 그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의 본질을 파악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본능적으로 기피해버리고 어떤사람에게는 당황할 만치 마음을 활짝 열고 대해준다. 그의 모든 사진이 그렇고 그의 일상의 대화가 그렇듯이 긴 시간 동안 계산하고 오목조목 따져서 그럴 성싶게 합리화하는 법이 그에게는 없다. 그는 그저 지나다가 쭉 쳐다보고 철컥 찍으면 그뿐이지 사진을 “만들기” 위하여 같은자리를 맴돌거나 머뭇거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직감력이라고 해야 될지 통찰력이라고 해야될지 또는 그 두가지를 합한 무엇인지가 그에게는 있다. 그래서 그 무엇이라 꾀 이름을 달아야 될지 모를 그의 감각을 이해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엉터리 사진가 같은 인상도 준다.
사진 찍을때 뿐만 아니라 말할 때를 봐 도 그는 그렇다. 도무지 수식어나 접속사 따위가 등장하는 긴 말을 그는 잘하지 못 한다. 그저 더듬더듬 명사 몇 개만 말하다 마는데, 그이와 친숙한 이들이면 그것만으로도 무엇을 말하는지 다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이 분이 왜 이렇게 서둘러 더듬다가 마는가 싶어서 의아해하는 수가 많다.
이미 말한대로 명덕형은 대단한 직감력 을 가지고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거나 사람을 꿰뚫어 본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감각이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사람을 대한다. 그는 싫은 사람은 어째도 싫으므로 우유부단한 나 같은 이가 그러듯이 모호하게 얼버무리지를 않고, 상대하기 싫다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해버린다. 그래서 그 점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 자신이 “인정”할수없는 사람이 뭐라고 떠들어도 그것은 헛소리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동안 외곬으로 빠져들어 제작한 그의 사진들은, 우리나라의 전통과 깊이 맥락이 닿아 있는 문물이나 환경, 사람들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억지로 “만들지” 않고 직감으로 포착한 그의 정직한 사진들은, 그러므로 아주 쉽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전달된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사진으로 상따위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우려나라에는 아직도 촌스러운 구석이 많아서 무슨 무슨 또는 모모하는 상을 받았다는 이력을 목에 걸고나 다녀야 그사람을 알아준다. 그런데 그는 그렇고 그런 상을 탄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많은 사진작가들이 겁을 내는( ? ) 사람이다. 그것은 아무도 따를 수 없이 뛰어난 그의 사진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는 스물 남짓했을 때부터 사진을 시작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자신이 생각한대로그 자신이 설정한 방향대로 꼿꼿하게 걸어 왔을 뿐이다. 대부분의 상이란게 눈치를 잘 본 결과일 뿐이라고 그는 치부하기 때문에 그의 후배들 중에서 누군가가 상을 타볼까 하고 공모전 같은 데에 출품했다가는 그와 어렵사리 맺었던 인연이 끊어지고 만다. 눈치나 보는 줏대없는 “놈”은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그는 얼씬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돌봐주고 있는 후배들을 그는 꼼꼼하고 지상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앞에서 거듭 말한대로 그는 뛰어난 직감력을 가진데 비해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체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척 보면 이놈은 될 만한 “놈”이고 저놈은 십 년을 데리고 있어봐야 헛일에 불과할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 그리고 또한 그 될만한 “놈”들이 찍어온 사진을 쭉보고“좋은데…”하면 최상의 찬사이고 “이걸 사진이라고… 다시 찍어”하면 그것으로 잔소리가 끝난다. 긴
말로서가 아니라 그의 작품들로서 그가 사물이나 사람들을 찍을 때 어떻게 하는 가를 보여줌으로서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것이 그의 후배 가르치는 방법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사진가가 자기의 진정한 사진 작품만을 팔아서 밥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 다른 얘기지만 머지않아 명덕형 또래는 고생을 했더라도 그의 활동을 밑거름으로 한 그의 후배들은 그렇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아무튼 그도 생활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잡다한 사진을 찍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는 돈이 생기는 일감에 그리 연연해 하지 않는다. 쇠푼하나 없을 때일지라도 힐끗봐서 재미없겠구나 싶으면, 일거리를 맡기러 의기 양양하게 온 사람에게 그런건 찍을 줄 모른다며 돌려보낸다. 그러니 넉넉하게 돈벌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국내외에서 여러 권의 사진집을 출판했다. 그 출판한 목록을 보면 숫자가 많아서 화려하기까지 하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목록만 보면 돈께나 벌었겠군 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돈께나 버린 것이 그야말로 번 것은 내가 아는 한 아주 미미할 뿐이다. 오직 사진에 대한사랑과 사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본’을 보이느라고 희생당한 경우가 많다.
광화문 근처의 어느 샛골목 안에 그는 조그만한 암자(스튜디오)를 하나 차려놓고 있다. 그 곳은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작업실이며 벌이를 위해 여러 가지 물건이 나 사람들을 찍는 곳이다. 또한 그 곳엔 서울장안의 유명 무명의 사진가, 화가, 문인, 음악가, 디자이너 그리고 사진지망의 청년들이 수없이 들락거려서 언제나 부산스럽다. 그는 그렇게 까탈스럽고 괴팍하다고 소문이 나있음에도 실제로 내가 보이에도 그러한데, 사람들이 늘 많이 오는 이유를 나는 굳이 설명하지 못하겠다.
비록 절이 초라하고 작더라도 거기에 큰 뜻을 가진 스님이 있으면 많은 신도들에 찿아오기 마련이라고나 할지. 아무튼 나는 명덕형이 조그마한 암자 하나 차려 놓고 왜 꼬장꼬장한 중노릇을 한다고 진작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곳에 진짜 스님들이 무시로 들락날락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튼 명덕행은 걸핏하면 해인사로 통도사
로 또 다른 절로 왔다갔다하며 절간과 스님들의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가 무슨 일로 얼마나 받으며 절사진을 찍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절사진을 잘 찍어 주는 것도 일종의 보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절로 갈 때마다 즐거워간다.
광화문 근처의 샛골목 초라한 사진 암자는 이 나라 사진계의 대들보가 후줄근한 옷을 입고 앉아서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있다.
주 명덕 선생님은 그동안 해인 지의 표지 사진을 도맡아 찍어주신 분이다. 많은 어려움 속
에서 일을 꾸려나가는 해인으로서는 선생님과 같이 뛰어난 사진작가의 사진을 표지에 싣는
다는 것이 이만저만한 기쁨이 아니다.
그래서 지난 한해 동안 줄곧 작품을 기꺼이 제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조출하게
나마 표할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울러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생님의 사진으로 해인 지
의 표지를 장식할 터임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채워주고 또 야이해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기로 하여, 주 명덕 선생님올 해인 초대석으로 모셨다. 이 글은 선생님의 기장 가까운 친구이자 같은 사진 작가인 강 운구 선생님의 입을 벌어 쓰였다.
이 자리를 벌어 다시금 주 명덕 선생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