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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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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원택 1986년 12월 58호
해인사 백련암

무릉교(武陸橋)에서 시작되는 해인사의 동구(洞口)는 그 계곡의 아름다웅이 홍필암(泓筆岩), 음풍뢰 (吟風懶), 취적화 (吹園華),공재암(空在岩),광풍뢰 (光碼懶), 제월담(霽月灌), 낙화담(落花潭),첩석대(壘石臺)를 지나 홍류동(紅流洞) 에 이르면 풍광(風光)의 절정을 이룬다.
특히 홍류동은, 고운(孤雲) 최치원의 시 (詩)가 적힌 치원대 (致遠臺)와 함께, 농산정 (籍山亭)에 봄이 오면 붉게 되는 진달래와 벗꽃의 아름다움이 유별나서 옛 부터 문인묵객(文人畢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아니했던 곳이다. 이끼 낀 반석(盤石) 위로 포말이 하dig게 부서지는 시대에 붉은낙화와 낙엽이 흘러가는 정경을 일러 홍류동이라 했던가? 고운~선생도 이 곳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번뇌를 잊으려는듯 이와 같은 시를 남겼다.
광분하여 첩석 위로 쏟아지는 물소리에 (狂嘴0石00重響)
사람의 말소리는 지척 간에도 분간하기 어려워라 (人語轉分00間)
시비(是非)의 소리 귀에 들릴까 언제나 두려움에 (常恐是 非聲到耳)
흐르는 물소리로 산은 모두 귀먹게 하였구나 (故敎0水盡寶山)

세사(世事)에 시달리던 귀를 홍류동 계곡에 씻고 절 입구 영산교( 山橋)를 건너 우측으로 한참 흘르가면 좌측에 삼선암(三仙魔), 금선암(金仙廳), 보현암(著賢廣), 금강굴(金剛屆)로 가는 길과 약수암(藥水魔), 국일암(國-廣)으로 가는 길목이 나타난다. 가야산이 정부 시책에 의해 국립공원이 되고 난 뒤로는 군데군데 휴게소와 함께 늘어난 것이 공중변소인데 휴가를 즐기러 나온 시민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겠으나 천년이나 넘게 가꾸어져 때려온 대 가람의 조경과 서로 어울리도록 배치하여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오르면 우측에 해인사의 발자취를 전해 주는 비 (陣)들이 서 있는데 대부분이 이 곳을 살다가신 고승(高僧)들의 공덕비이거나 덕(德)을 기리는 송덕비(煩德轉)들이다. 특히 1972년에 세운 해인사사적비{海印寺事體陣)가 우뚝서 있고 그 옆으로 신라시대 호국불교의 정신을 전해주는 천년의 유서 깊은 길상탑(吉詳港)이 서 있으며, 원경국사의 탑비가 새로 단장된 비각 속에 모셔져 있다.
조금 오르면 청명한 날이면 가야산 상봉이 이 물속에 비치기도 헌다는 영지(影池)가 우측에 있고, 노송 그늘에 해인사의 제일문(第一門)인 일주문(一柱門)이 서 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간결하면서 정중한 느낌을 주는데, 소나무 사이에 가련 모습이 거울 속에 비친 미인인듯, 구름 뒤에 살짝 비친 달인듯 아름답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하문(紅露門)이라고도 하는 이 일주문 우측에는 당간(禮竿)과 포석정형의 석지(石趾)가 있고 맞은 편 좌측에 원표(元標)가서 있다.
현재 건평이 3평인 일주문의 건물은, 신라 고려시대의 중수(重修) 사실까지는 알 수가 없으나 조선조 세조 3년 서기1458년 봄에 중수한 뒤로 최근까지 다섯 차례나 중수 하였으며, 현 건물의 미적(美的) 구조상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양식 인듯하다. 대체로 일주문은 큰 신문을 들어서는 관문으로서 그 절의 위용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간판 같은 구실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큰 절 동구에 세워져 있는데, 해인사의 일주문도 창건 당시부터 현재의 자리에 있었는 듯하다. 옛적 기록인 홍하문중수상량기(紅露門重修上梁記)에 보면 0000000000000000000000000000 곧 홍하문은 꼭 있어야 하며 본사는 신라때 창건하였고 이 문을 그때 세워 사방의 골짜기와 함께 면면히 천여년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문이 처음 창건 당시부터 이 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문이 조선조 에는 세조 3년 봄에 세웠는데 오랜 세월에 기둥이 퇴락되고 허물어졌으므로, 인조 4년 서기 1626년 6월에 충휘 (沖徵) 스님께서 중수하였고 또 순조 3년 서기 l802년에 주지 무 열(武悅)스님과 승통(借統) 의준(義俊)스님이 중수하였고, 또 다시 고종(高宗) 광무(光武) 3년언 서기 1899년에 범운(梵雲)스님께서 중수하였으나 그 뒤 다시 퇴락 되었으므로, 일제( 日帝) 말인 1940년에 주지 설호(雪觸)스님께서 중건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그 당시 도 목수였던 이 화백(李花白) 목수의 솜씨로, 양면에 한 기풍(一柱)으로 문을 지탱하고 있으므로, 일주문(一힘켜)이라 한다. 그리고 전면 축석(藥石)과 석계(石階)는 박 성주(朴性周), 권 종업(權鍾業) 석공이 축조하였다. 정면의 글씨는 당대의 서예 대가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의 것으로 가야산 해인사(伽 山 海印寺)란 현판이 산문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으며, 중앙엔 주 원영(朱源榮)의 글씨인 법보찰·홍하문(法寶刹·紅體門)이란 현판이 있고 양쪽 주련에 전각서(篆刻書)로 ‘歷千0而不古.0 萬歲而長今’이란 해강선생의 글씨가 걸려 있으며 우편 기둥 아래엔 조선 선조 때의 호남(湖南) 시인 입 석천(林石川)의 오언절귀가 음착(陰刻)으로 새겨져 있다.

一樹前賴 일주문 앞에서 잠깐쉬니까
三0日己爛 태앙은 빛나네 서발쯤 돋아
0花山雨後 배꽃이 산비가내린 뒤에사
敵也白紹紹 흰꽃잎 떨어져 땅에 찼구나

이 일주문 뒷편에는 고령(高 )의 명필이었던 박 해근(朴 樹良)의 글씨로 해동제일도장(海東第一道場)이란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은 건축의 형식으로 볼 때 각주4후(各柱前後)에 첨주(添柱)를 가진 형이며 포집 지붕이며 모두가 매우 간소하면서도 아주 단단하게 만들어졌는데, 조선조 건축물 가운데에서도 일품에 속하는 문이다. 단청문양은 그 색조가 약간은 화려해 보이는 듯하지만 전체의 조화와 잘 어우러지도록 대비시켰으며, 지붕의 모양이 고상하고 아담하여, 짜임새가 있어. 이런 종류의 건축 가운데에서도 특이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이 특별히 두드러진다.
일주문 앞에 있는 원표(元標) 석주는 나그네를 위한 이정표(里程表)이며, 좌측기둥 옆 자그 마한 석함(石函)에서는 천연의 석수가 흘러 동구에서부터 오느라 힘든 나그네에게 더 없는 청정수를 제공해 준다.
이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땀을 삭히면서 바라보는 해인사의 일주문은 전국 어느 사찰에서도 볼수없는 가경(佳景)이라 할수 있다. |
또한 일주문은 불교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절의 건축은 모두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일주문은 신행(信行)의 첫걸음을 상징이다. 곧, 모든 중생이 성불(成佛)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있어 일주문은 그 첫관문을 들어서는 초발심(初 心)을 나타는 문이다. ‘처음 발심했을때가 곧 바른 깨달음의 세계’라 ’설파한 화엄경의 말씀을 벌 것도 없이 초발심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마음이요 자세라고 할수 있다. 사실 처음 발심 할때의 마음을 떠나서 따로 성불의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주문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퍽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이 곧 초발심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이라는 마음으로 들어오란 것이다. 곧, 일주문 밖에 있는 중생을 아직 믿음이 없는 중생이라 밀한다면,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에 마음에 ale음을 심고 구경(究境)에는 성불할 것이라는 서원(사願)을 세우는 그런 문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일주문을 들어설 때 마다 언제나 초발심 하던 불퇴전의 마음으로 들어가야겠다. l

일주문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퍽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이라는
곧 초발심의문을 들어서는 순간이라는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곧, 일주문 밖에 있는 중생을
아직 믿음이 없는 중생이라 말한다면 ,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에 마음의 믿음을 심고
구경 究燒에는 성불할 것이라는
서원 誓願 을 세우는 그런 문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일주문을 들어설 때마다
언제나 초발심하던 불퇴진의 마음으로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