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영산율원 철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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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7년 07월 185호
절이 텅 빈 줄 알았다.
화강암판을 빈틈없이 깔아 네 귀가 더욱 반듯해 보이는 원통전 앞 도량에는 마주 볼 수 없도록 눈부신 초여름 햇살뿐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풍경 소리가 생각난 듯 울리고 했을 뿐이었다. 꽃은 흐벅지나 불두화는 향기가 어림없으니, 은은한 꽃 냄새는 어딘가에 피어 있을 함박꽃의 자취일 터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볕이 또렷하니 범종각이 드리운 그늘 또한 단정하였다. 경사가 급한 경내 한 바퀴 돈 뒤에 가빠진 숨길고르며 들리지 않는 종소리 귀 기울여 듣자니, 종소리 대신 공양이 끝나는 죽비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뎃돌 위에 벗어 둔, 씻은 듯이 말끔한 고무신들이 보였다. 가사와 장삼을 깍듯이 수한여나문 대중이 그 신을 꿰어 신고 도량 위로 내려서니 순간에 경내가 꽉 찼다.
보이지 않았다 하나 움직임이 없지 않았으니, 지난해 음력 삼월에 개원 고불식을 치른 뒤 사월 결제 때부터 첫수업이 시작된 파계사 영산율원도 그와 같았다.
해인사와 송광사에 이어 세번째 율원으로 개설되기까지, 지금 현재 파계사 주지이자 율주인 성우스님과함께 율원장인 철우스님이 스무해 넘게 품어 왔던 원력의 결실이었다.
“파계사가 저희가 율원 도량으로 지목했던 곳은 아니지만, 이제 씨앗이 뿌려진 셈이니까 그 결과는 얼마나 잘 가꾸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그러나 계율에 대한 인식의 정도랄지, 현 상황에서 그것을 추스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도 다급한지에 대해서는 모두들 무심합니다. 그게 안타까워요. 종단의 입법 기관인 종회의 인적 구성만 보아도 그래요. 계율을 전공한 스님들이 가장 많이 배려가 되어야 하는데, 참여하는스님 수효가 고작 둘입니다. 그나마 한 분은 계율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교수 스님이니, 계율쪽 스님은 한사람뿐인 셈이죠.
그러니 의사 표시를 하는 일에나 건의 사항 등이 있어도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어요.
율원 개설의 필요성은 총무원장이 바뀔 때마다 건의해 왔지만, 이십 년 세월 보낸 끝에 개혁 종단 이후 겨우 받아 들여진 셈이죠.”
부처님은 “내가 성불한 뒤에 지금까지 설한 경과 계는 그대 수행자들을 보호할 것이므로 반드시 지니고지켜 나가라” 하셨다. 불교의 수행은 계·정·혜 삼학으로 되어 있으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계이니,‘계의 그릇이 튼튼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분율」에 이르기를, “갖가지 아름다운 꽃을 높은 탁상 위에 올려 놓고 붙들어 매는 끈이 없으면 곧 바람에 날려가 버림과 같이, 여래의 정법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려면 반드시 엄격한 계율이 있어야 한다. 이 계율로써 모든 제자들을 잘 거두어 그릇된 행동을 미리 막아야 한다. 잘 정돈되어 흩어지지 않는 꽃다발은 끈으로 묶어 놓았기에 그러하다 하였다. “깨달음의 올바른 수행을 위하여, 교단의 청청과 화합을 위하여, 그리고 역사대중, 곧 유기적인 관련 속의 개인과 교단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 계율로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게 될 바는 정법의 안장이다.
계율은 수행자의 손발을 묶는 멍엣줄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정신인 것이니, 그것을 바탕으로 삼지 않은기도나 참선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가망이 없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 비교해 볼 때 부파 불교, 대승 불교, 선종 사상이 가미된 중국 불교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로 이를 만한 것이나, 철우스님이 천착하는 것은 “변화의 필연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근본자리 됨”인 듯해 보인다.
철우스님에게 계율은 “이천 년도 더 전에 지어진 것이나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딱 맞는 법”으로서, 분수만 지키면 다 지킬 수 있는 법이니만큼, 그에 관한 개정 운운 하는 바는 “투철하지 못한 지계 정신에서비롯되는 것”으로 여긴다.
승가의 세속화에 대한 걱정의 소리는 한결같으나, 정법 안장의 근본이 될 계율을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이는 많지 않으니, 앞으로 율원이 여러 곳에서 생겨나 그 곳을 중심으로 지계의 풍토가 널리 확산되기를 철우스님은 간절히 바란다.
율장을 가르칠 능력을 갖춘 전문 강사 양성에 주력하게 될 영산율원에는 개원 첫해인 지난해 네 명의 율원생이, 그리고 올해는 두명이 입학했다. 정해 놓은 수학연원은 삼년이니, 일 년은 어느 한 과목도 제대로 배우기 힘들어 늘려 잡은 햇수이지만, 삼년 또한 폭과 깊이를 아우르기에는 넉넉할 수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정해진 삼 년의 수업을 마친 뒤로도 그럴 염이 있는 대중에게는 평생 수학의 현실성 있는 터전이 되도록 애써 나갈 생각이다.
성우, 철우, 그리고 유나 소임을 맡고 있는 도일스님이 강의를 맡아하되, 첫 일 년 동안은 술의와 증주와 집주를 참고하여 「사미율의」를 배우게 하고, 그 다음 일 년 반 동안은 「사분율」을, 그리고 나머지 반 년은 「법망경」을 공부하게 한다.
율장을 공부하려면 비구계를 수지한 사람이라야 하니, 강원을 졸업한 이들의 평균 연령은 서른살쯤 된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밤아홉시에 잠들되, 삼시 예불을 법다이 치르는 가운데, 아침 일곱시에 상강례로 시작하여 강사와 함께 두시간 동안 논강식 수업을 한다.
공부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 하나, 수업의 내용은 후학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기록된다 하니잠들기까지 나태할 틈이 없을 듯하다.
주지 스님을 포함하여 스물여덟의 대중이 살고 있는 이 곳에서는 율원생 또한 여섯 개쯤 되는 신행 단체를 하나씩 맡아 실수寶修의 기회로 삼는다. 한 해에 예닐곱 번쯤 타사 스님들도 초청되어 특강 자리도 베풀어진다.
그의 나날도 율원생 못지 않게 빠듯하여 육신이 견디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일타스님이 한문으로 모아 놓은「사미율의」는 그가 손수 번역본으로 간행한 바 있거니와, 지난해 1기생을 대상으로 강의한 그것을 책으로 묶기 전 다시금 손보고 있다. 또 계율에 대한 주석서나 논문 따위를 한데 묶은「율장전서」는 95년도에 쉰다섯 권의 책으로 펴냈는데, 백 권이 목표라 하니 그에 관한 자료 모으는 일도 큰일일 듯했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오분율」은 올 초에 끝낸 「사분율」 번역 작업에 뒤이은 것이다. 예순권으로 된 「사분율」(고려장경)은 그의 손에 의해 간결한 현대문으로 옮겨져 열여섯 권의 책으로 새로 태어났으니, 일본의「밀체국역경」을 옮겨 놓다시피한, 동국대학 역경원에서 펴 낸「한글 대장경」 속의 「사분율」의 아쉬움을 크게 덜어주는 것이었다.
갖가지 불교 관련 서적들이 쏟아지다시피 발행되는 가운데, 모쪼록 부처님 경전을 읽고 배우는데 보탬이되기를 바라면서 펴 낼 염을 품고 있는 것은 율학사전이다. 시간과 능력과 재정의 여건이 갖춰지고 나서야 도모해 볼 일이니 언제 시작될 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현재 국내에는 불교 사전과 선학사전이 나와 있기는 하나, 전문으로 공부하는 스님은 일쑤 외국사전을 들춰 보아야 하는 형편이다. “부처님 말씀의 팔 할쯤이 계율 용어로 되어 있는 만큼” 계율 용어 전문사전은 율학을 공부하려는 후학들 뿐만이 아니라, 사부대중에게도 꼭 필요한 책일 터였다.
해인사 율원(1기) 시절, 오후불식 등 생활의 전반을 깍듯한 율장정신으로 다잡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공부할 책 마련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점이었다.
지운스님이 지니고 있던 「속장경」율부와, 삼천배를 올리고 빌려다 보곤했던, 당시에 개인 소장으로는유일했던 성철스님의 「선수대장경」 등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손으로 일일이 베껴 써서 마련하는 식이었다.
먼 뒷날에 한글세대 후학들이 이 어려운 한글은 또 어찌 새겨 낼 것인가.
율원 1 기생 네 사람은 은연중에 원력을 세웠다. 그 원력은 강원 도반이자 율원 도반, 그리고 스스로 고백컨대 ‘가장 직접적인 스승” 인 성우스님과 함께 성취시켰으나, 「율장전서」의 간행과 「사분율」 번역 일의 이번에 숨은 뜻일 터였다. 또한 근래에 들어 처음 생겨난 율원에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고암, 성철, 자운, 일타스님에 대한 은혜 갚음이기도 했다.
그에게 율의 길을 가게 한 분은 지운스님이시다. 평생을 율장 연구와 계율 홍보의 원력을 세우고 실천하셨으며, 92년도에 입적하시기까지 근 사십 년 가까이 전계대화상으로서 수만의 불자 칠중七衆을 배출하신 분이었다.
율원에 입학한 것도 그와 권고 때문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스스로 출가를 작정한 속가의 어머니가 자신의 수행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열한살짜리 막내 자식을 산문에 들인 뒤로, 향봉 은사 스님에게서 한문을 배워 통도사를 거쳐 범어사 강원을 어렵잖이 졸업한 뒤로 율학의 길로 들어섰다고는 하나 떠나 산 적도 없지 않았으니, 그 길로 다시금 불러 들인 고암스님도 잊을 수 없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자운스님이었다. 율원을 졸업한 뒤로도 계단에 수계 의식이 있을 때마다 참석을 권하는 등 그를 챙겼으니 철우스님이 현재 계단위원회 위원으로서 계살림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그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지운스님 열반하시기 직전인 91년도에 그와 성우스님은 전계를 받게 되니 그의 길은 이제 확고한 것이 되었다.
율원 개설에 대한 필요성은 여섯해전 시작된 행자 교육 l기에서부터 습의도감과, 세 해 전부터는 사감소임을 맡아오는 동안에 구체적으로 품게 되었다. 승단이 있게 할 기본 틀이 될 계율을 제대로 가르칠 인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현장에서 확인한 때문이다.
종단의 무관심에 대한 섭섭함 가운데서도 행자교육의 일선에 서 있는 그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출가사문의 수효가 줄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율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행자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지난날과는 달리, 발심의 동기가 뚜렷한 출가자가 많으니, 절집은 세속과는 달라야 한다는 요구가 확실하다. 스님들이 옳은 길로 가게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은연 중에 부추기는 사회 현실도문제지만, 사문도 지나치게 속화되어 제 자리를 잊고 있는 가운데, 그런 형편은 철우스님을 한국 불교에 대한 낙관론을 품게 해 준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없는 계율 불감증이 더 문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깨워 주려는 사람을 편협주의자로 몰아불이는 것은 더 큰 낭팹니다. 원칙대로 살려는 사람을 좋게 평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융통성 없는 샌님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나 자신도 250계를 완벽하게 지킨다고는 볼 수 없어요. 그러나 지키려고 노력은 하죠. 내 뒤에서 ‘찬바람이 부네’ 하는 식으로들 이야기 허는 모양입니다만 섭섭할건 없는 일이고… 다만 내가 생김새도 부드럽지 않은 편이니, 율을 공부하면 저렇게 되나부다 하는 식의 편견을 갖게 해 주는 건 아닌가. 걱정이라면 그게 걱정입니다.”
원통전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난 중문 하나 거치면, 속인 금지 팻말이 붙은 댑개비 울바자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율원으로 쓰이고 있는 금당이다. 그 금 안으로 들어서면 저절로 부처가 될라나, 각오하고 스며들어 좁은 도량 끝에 서서 보니 건너편 골짝에서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내달쯤 완공될 건평 칠십 평쯤의 이 건물에는 계율관련 서적을 두루 갖추게 될 도서관과 연구실, 그리고 율원장실이 들어서게 되리라한다.
율장 제작에 필요한 문헌을 구하려 중국으로 떠났던 성우 주지 스님이 돌아오신 모양이었다. 뱃돌 위에주지 스님의 신발이 얹히자마자, 몇 번을 기웃거려며 귀가를 확인하던 대중이 가사까지 수하고 일제히 문안을 청하니, 난데없는 안행雁行이었다.
율원의 삼엄한 가풍을 짐작케 하는 그 광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청량하였다. 스님들 차례가 끝나고, 뒤이어 감물 옷 행자 복색의 동승 하나가 따로 문안 여쭌다. 정례하는 동승의 귓볼은 아직 붉어 복사꽃색이니, 자신이 수행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기나 하는 것인지, 그 길이 쉽지 않을터임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요량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마실 다녀오시기라도 한 듯, 인사를 올려고 나면, 으레 그렇듯 호주머니 속에서 맛난 엿 한 가락 꺼내 줄터임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얼핏 그 동송의 입가에서 아이다운 맑은 웃음 한자락 읽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