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누웠으니…”란, 논어 술이편(論語 述而篇)에 나오는 공자(孔
子) 만년의 모습이다. 얼마되지 않는 알곡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피골이 상접한 육체를 누더기 한장으로 가리우고 보리수 아래서 선정에 들어 있는 모습은 구도(求道)를 위해 정진하고 있는 석가의 초라한 행색이다. 세속적인 이해(利害)를 초월해 있는 점에서 둘은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 그 이면에는 서로 다른 엄청난 차이가 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이니 그런대로 살아 갈밖에 도리가 없지 않느냐는 체념속에 자위를 얻으려는 모습과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가려내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꺼릴 것이 없겠다는 긴박한 표정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후자는 곧 행동으로서 참되기를 기구하는 구도자(求道者)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공자를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할 의도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많은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지식인-특히 종교계의 선각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할 쁜이다. 진실이 왜곡당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차단된 사회일수록 양심있는 지식인이특히 종교계 선각자‘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용기 있게 외칠 때 많은 대중은 가치 판단의 혼란속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 기준을 갖고 생활하게 되고 또, 그 사회는 갈등과 혼란으로부터 이탈하여 발전하는 정의사회가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요, 반면에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침묵만 지키고 있을때 그 사회는 불신과 갈등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최근 두젊은이의 죽음은 우리들을 슬픔의 나락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하였다. 전방입소훈련을 항의하여 분신자살한 젊은이와, 대학교 시위 진압에 동원된 한 젊은 전경의 죽음이 그것이다. 한 사람은 체제에 항거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한 사람은 체제수호의 기능을 맡아-체제수호의 기능은 엄밀히 말해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징집 되어 의무복무의 기간이었음으로-그 직무룰 수행하다가 타의에 의해 죽은 것이다. 참으로 그들을 죽게 한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 공동의 책임이자, 오늘의 현실을 있게 한 기성세대에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우리사회가 엄히고 막혀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렇게 얽히고 막힌 사회를 풀어주고 뚫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정치인 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심있는 지식인의 용기있고 책임있는 외침일 것이다. 얼마전 9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민주화는 하니님과 화해하는 일’이라고 시국에 관한 성명을 한 김수환 추기경의 용기있는 양심의 소리에 급기야, 암묵적으로 범죄시되어 금기화되어 었던 개헌 서명에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모든 카토릭 교인들이 흔쾌히 참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눈을 돌려 불교계 현실을 볼 때 그야말로 암담하다. 얽히고 막힌 사회를 풀고 뚫어 줄 용기있는 양심의 소리가 들리기는 커녕 오히려 얽히게 하고 막으려 하는그 근본원인을 존속시키고 지지하는 목소리만 가끔 들릴 뿔이다.
진정한 자비청신(慧悲精빼)이란 무엇인가? 모든 바른 것(善)들을 맞이하여 흔쾌히 받아 들이고-橋受-모든 바르지 못한 것憶)들을 항복받아 맞아들이는 것-折代-이 참된 자비요,진정한 파사현정(破%顧正)인 것이다. 한 선지식(善知識)을 만들기 위한 개인적 구원의 사자후가 아니라 고통 속에 방황하는 중생들의 집단적 해탈을 위한 일갈이 있을 진저 !
얼마 남지 않은 부처님 오신 날, 이 날만이라도, 매년 한결같이 관념적인 아름다운 문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해방을 위해 출현하신 부처님 오신 참 뜻을 깊이 새겨, 넓히고 막힌 이 사회에서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메세지는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여 용기 있는 양심의 소리를 들려 줄 수는 없을까? 부디 무리한 바램이 아니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