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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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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에세이 - 정희돈 1986년 05월 51호
흔히들 우리는 침묵이라는 것을 말을 하지 않은 것과 단순한 뜻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실 침묵은 때로는 수많은 언어보다 더욱 깊은 뜻을 전달할 수도 있고 자기의 감정이나 의지를 표현시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여래께서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일 때 이를 가섭이 미소를 지으므로서 그 뜻을 알았다는 표시를 한 것이라든가, 사랑하는 여인들은 상대의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소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것은 한마디의 말이 없어도 서로의 감정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말없이 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침묵이라는 단어는 맞지 않은 것 같다.
자기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될수록 숨기는 것을 우리는 미덕으로 배워왔다. 특히 동양에서는 이를 더욱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침묵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을 마음속에서 갓이고, 침전 여과시킨 후 그것을 다시 농축하여 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침묵이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좌선침묵 또는 면벽참선도 궁극적으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한 것이지 침묵 그 자체를 최종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스님들이 오랜 고행 끝에 득도하였을 때 오도송을 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은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몸으로 행동하는 것에 이르기 까지 항상 일을 하게 된다. 이 일을 우리는 업이라고 한다. 이일이 많이 쌓이는 것을 업적이라고 부르고 이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
이 업 가운데 말로서 생겨나는 것을 구업이라고 한다. 말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을 표현이다. 그러나 교언영색이니 감언이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각과 말이 전연 다른 경우가 있다. 남의 옆에서 듣기좋은 말과 보기좋은 얼굴빛으로 남을 속일수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그로인하여 얻어진 업은 남게 된다. 이 업은 배수구가 없는 연뭇에 쌓이는 앙금가이 날이 갈수록 자꾸 두꺼워져서 결국 못을 완전히 메우고 만다. 그러면 못의 기능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말을 해야 되고 그러므로서 역사가 이루어진다.
침묵 그것은 말을 더욱 빛나게 할 수는 있지만 침묵 그것으로 말 전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침묵을 금이라 하지만 금언도 있고 명언, 명문도 있다.
\"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되는 그 많은 경전들도 불타께서 설법이 없었던들 오늘날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필요할 때 침묵을 깨고 할 말을 하므로서 침묵의 본래의 뜻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말을하지 않은 것을 크게 높이 평가한다. 그것이 대외적인 문제일 때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오늘날 한번 깊이 생각할 필요성을 느낀ㄴ다. 그것이 한가지 수행방법이나 생활의 신조로 삼는 것은 여기서 예외로 한다. 그러나 최근 불교에 대하여 가해지는 왜곡된 인식에 대하여, 항상 집단의 힘으로 말과 행동을 앞세워 어떤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권력을 자기편에 끌어들이고져 함에 대하여, 이런 모든 것의 결과로 얻어지는 불이익에 대하여 언제까지나 침묵을 지켜야 하며, 또 그것을 미덕으로 삼고 자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깊은 의문이 생긴다.
힘이 없고 자각이 없는 자는 진리를 보존할 자격도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계의 현실이 어떤지, 또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하여 모든 불자들은 깊이 생각해 볼때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긴 세월이라고 할수 있는 이조 오백년 간이나 침묵을 지켰으니 그것만으로 족하다. 이제 우리는 살아 있음을 소리 높여 왜칠때라고 생각한다.
너무 오래 침묵하면 말을 잃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