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계 진전되는 문제의식
그 간 한국불교에 대한 위기의식과 문제의식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이의 극복을 위한 노력도 각 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냉정히 진단컨대 한국불교의 미래, 그 중에서도 특히 승가의 전망에 대해서는 누구도 선뜻 자신있게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인 듯하다. 민중불교운동의 대두와 활동, 포교활동의 성공사례, 방송국 개국, 승가대 인가, 대 불사 등등의 현상적인 성과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이러한 현상들이 산적한 오늘의 한
국불교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밝은 미래를 약속해 준다고 보기에는 속단이라는 것이 중론인 듯 싶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번의 두가지 사건은 기존의 문제의식을 한 단계 진전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간의 불교계와 불교대중은 외부로부터 불교의 이익과 영역이 침해당할 때 그 반발의 목소리를 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들이 출가본연의 정신으로 볼 때 바람직스러운가 하는 문제가 아래와 같이 제기된 것이다. 『참으로 살아있는 종교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열렬한 정열을 상실할 때 그런 종교를 죽었다고 하는 것이지 숫자가 적은 종교를 죽어가고 있는 종교로 보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종교는 일체중생을 위해 자기를 잊고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를 재생시키는 역세속적인 길을 걷는 세계라고 본다. 그런데도 우리의 승가는 가치에 대한 신념은 결여돼 있으면서 자기 손익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자기 영역의 확대에 신경을 쓰는 의식상태에 맴돌고 있는 것은 종교의 수치이다』라고.
또 스스로를 되돌아봄이 없이 필요에 따라 탄압이라는 울분을 토로하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외침이 우리 승가의 진정한 자아각성의 본질을 오히려 왜곡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우리 승가의 대다수 구성원의 의식이 세력이 강한 승단이나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라면 불교는 절대로 종교로서 희망이 없고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종교본래의 가치와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구성원이 주류를 이루어 갈 때 우리의 승가와 불교는 미래 사회를 선도할 유력한 유망주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부의 종교탄압, 매스컴의 편파·왜곡보도, 이교도의 책동 등등에 전 불교도는 분노하여 궐기할 것을 주장하는 소리에 익숙한 불교도에게 이러한 주장들은 신선한 충격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분들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다만 총체적 인식에서 볼 때 10·27사태 등을 법난으로 규정치 않는 등 어떤 사회의 역사적 규명을 개인적 혹은 주체 환원적 책임으로 국한지음은 과학적 사고의 결여에서 나오는 단견이라고 생각한다. 지명스님의 『법난이 정부에 의한 부당한 탄압이 아니었다는 휴암스님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정의하는 문제와 그것을 수행자의 내적인 자성의 계기로 삼는 문제를 혼동한 데서 나온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출가란 ‘저마다의 큰 개혁이요, 순수한 열정으로 인생의 고뇌를 해결하는 진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규정한 「선우도량」의 스님들은 이러한 출가자들의 승가공동체는 ‘깨달음의 성취나 나눔의 덕행이 권리와 의무인 맑고 성스러운 곳으로서 인간의 이상이요 맑고 깨끗한 힘의 원천’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출가의지는 얼마나 이루어졌으며 불교는 산업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는가?』라고 자문하고 『부끄럽다』고 대답했다.
그간의 불교계가 자성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은 바 아니지만 교계의 양식과 양심이 있는 소장 중진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이러한 발기 취지문을 냈다는 데서 그 무게와 기대가 예전같지 않다. 특히 그전의 진보적 승가의 움직임이 구성원의 수행과 실천방식, 방향성 동에 일정한 문제점으로 인해 대중화의 벽이 두터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이번의 움직임은 그 구성원의 면모나 일의 진행방식, 방향성을 볼 때 대중의 큰 반향이 기대된다.
거듭남의 몸부림
휴암스님의 주장과 반론은 일간신문에까지 보도되는 등 외형적으로는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나, 10.26법난 등의 문제만이 반론다운 반론이 제기되었을 뿐, 전면적이고 총제적인 응답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데는 승가의 풍토가 이러한 논쟁을 하는 것 자체에 익숙치 않는 탓도 있겠지만 비판은 가능하나 기실 대안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다시 말해서 휴암스님의 문제 제기 자체가 ‘자성을 촉구하는 것’그 자체이므로 일부분 긍정을 안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형편에서 주로 주시만 하고 있는듯 하다는 것이다.
모처럼 정말 좋은 논쟁을 하고 싶었고 또 그럴 가능성이 이제 우리 승단에 어느 정도 조성되지 않았나 싶었다는 휴암스님은 『나는 나의 돌 던짐을 계기로 진실과 순수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마치 성난사자가 대평원을 만난 듯 나의 글속의 외침을 계기로 삼아 도리어 나보다 한술 더 떠서 한단계 높은 단계에서 보다 강도 높은 승가적 자아비판의 양심의 불길을 당겨줄 줄 알았다』고 기대감을 가졌으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고 후술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평가치 않는다. 눈에 보이는 반응만이 반응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처음 몇 년 동안 ‘불교탄압’에 대한 대정부 규탄의 목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일각에서 뼈를 깍는 자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다만 오늘날 불교를 바라봄에 있어 이제 불교는 불교 그 자체만으로 존속할 수도 없으며 존속해서도 안된다는 인식에서 오늘의 불교를 진단하고 반성함에 있어서는 사회·역사적 시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교탄압’이 휴암스님의 주장대로 운동권 젊은이들이 불교계의 대사회적 무관심을 자극하여 그들의 반정부, 반독재 운동에 불교적 에너지를 유도해 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채택한 것이 일차적 연원이라 하더라도 ‘불교탄압’의 구도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 만큼 불교인이 피부로 느끼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렇게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 해도 이번 휴암스님의 외침은 필요한 것이었고 진전된 문제제기라는 생각이다.
자성의 외침에 비해 대안과 전망을 내오기 위한 「선우도량」의 움직임은 한층 적극적이고 실천적이다. 승납 10년이상 30세에서 50세까지의 전국의 비구스님들이 문중, 정견(政見), 단체 등에 관계없이 새로이 결집하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젊어지기 위해 거듭나려는 아름다운 몸부림인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수행과 교단을 함께 염려하며 수행과 깨달음을 하나로 보는 공통인식을 해나가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는 길만이 불교의 올바른 길이다. 우리는 함께 모일 것이다. 출가수행자 개인의 정진을 토양으로 공동체 수행과 공동체 실천을 향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