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승가의 새 바람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0년 04월 98호
주목되는 두 가지 현상
80년대를 마감하고 90년대를 맞이하는 최근 승가내에는 주목되는 두 가지 현상이 있다. 하나는 종단정화를 위한 결사운동의 주창이고 또 하나는 기존 ‘불교탄압’에 대한 강력한 부정과 ‘승가양심’의 제기이다. 전자는 전국의 30, 40대 비구스님 50여명이 3월 7,8일 양일간에 걸쳐 전북 금산사에서 발기대회 형식의 모임을 갖고 「대한불교 선우도량(善友道場)」창립준비 실행위원회(위원장·도법스님, 금산사 부주지)를 발족, 하안거 해제일(9월3일)후 15일 이내에 창립대회를 갖는다는 소식이다. 후자는 작년 ‘동국대 사태’이후 휴암스님이 「승가의 양심과 불교탄압의 문제」라는 소책자(국판·42쪽)를 전국의 사찰, 단체, 언론기관 등에 배포하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법전, 지명스님의 반론이 제기되고 휴암스님의 재반론이 발표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두 내용들을 좀 더 살펴보자.
1여년 전부터 크고 작은 모임 8차례를 거쳐 이루어진 이날의 금산사 모임에서 도법스님은 「결사의 필요성과 그 방향」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새 결사운동의 동기와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한국불교사를 볼 때 불교의 근본정신을 회복하며 정법의 혜명을 계승하고 출가 본연의 정신에 투철함으로써 출가의 본분을 다하고자하는 집단적인 비장한 결의의 실천들이 결사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불교를 돌아볼 때 이 시점에서 결사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절대적인 시대적 요청에 따르는 기운의 흐름’이다.
교단문제가 다루어질 때마다 막연한 제도적 차원, 교세확장 차원 그리고 즉시적인 효과를 노리는 졸속함의 되풀이였다.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입각한 숭풍을 진작시키는 신앙과 실천수행운동, 불교적인 세계관·인생관·가치관 그리고 사회역사 의식을 확립하는 사상운동, 십년 이십년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리 준비하는 작업, 사회·역사·미래 문제 등 전체적인 관계를 통찰하면서 근본적이고 원대하게, 현실적이고도 이상적인 방향을 잡으면서 우리 자신의 현실적인 역량에 맞게 끈기와 기다림으로 추진된다면 반드시 성취하리라』
휴암스님은 앞의 책자에서 『공 이전의 암울했던 독재하에서는 국민을 위해 바른 소리 한마디 한 일이 없던 불교계가 이제 와서 걸핏하면 대중의 위력이나 과시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청이나 높이고 있다는 것은 세속의 양심인으로서도 취할 수 없는 염치없는 거동이라고 생각한다. 뜻이 있는 젊은이라면 우리불교 ! 우리불교 ! 하기 이전에 이 세상의 불교가 오늘의 시대적 삶 속에 과연 어떤, 보다 가치있는 삶의 자세를 심어줄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걱정해야 옳을 것이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자신의 적이 외부의 다른 종교가 아니라 범람하는 물질주의에 우선하는 가치관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는 자신의 내부적 사정
속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명리에 급급하면서 자신의 바로 주변에 있는 동료와 이익을 함께 나누는 데는 인색한 사람들이 불교탄압의 목청을 드높이는 것은 일종의 위선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들 불교인을 김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불교인 그 자신들 이외에 그 누구도 아니었음을 지적하는 바이다.』

한 단계 진전되는 문제의식
그 간 한국불교에 대한 위기의식과 문제의식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이의 극복을 위한 노력도 각 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냉정히 진단컨대 한국불교의 미래, 그 중에서도 특히 승가의 전망에 대해서는 누구도 선뜻 자신있게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인 듯하다. 민중불교운동의 대두와 활동, 포교활동의 성공사례, 방송국 개국, 승가대 인가, 대 불사 등등의 현상적인 성과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이러한 현상들이 산적한 오늘의 한
국불교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밝은 미래를 약속해 준다고 보기에는 속단이라는 것이 중론인 듯 싶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번의 두가지 사건은 기존의 문제의식을 한 단계 진전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간의 불교계와 불교대중은 외부로부터 불교의 이익과 영역이 침해당할 때 그 반발의 목소리를 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들이 출가본연의 정신으로 볼 때 바람직스러운가 하는 문제가 아래와 같이 제기된 것이다. 『참으로 살아있는 종교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열렬한 정열을 상실할 때 그런 종교를 죽었다고 하는 것이지 숫자가 적은 종교를 죽어가고 있는 종교로 보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종교는 일체중생을 위해 자기를 잊고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를 재생시키는 역세속적인 길을 걷는 세계라고 본다. 그런데도 우리의 승가는 가치에 대한 신념은 결여돼 있으면서 자기 손익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자기 영역의 확대에 신경을 쓰는 의식상태에 맴돌고 있는 것은 종교의 수치이다』라고.
또 스스로를 되돌아봄이 없이 필요에 따라 탄압이라는 울분을 토로하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외침이 우리 승가의 진정한 자아각성의 본질을 오히려 왜곡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우리 승가의 대다수 구성원의 의식이 세력이 강한 승단이나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라면 불교는 절대로 종교로서 희망이 없고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종교본래의 가치와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구성원이 주류를 이루어 갈 때 우리의 승가와 불교는 미래 사회를 선도할 유력한 유망주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부의 종교탄압, 매스컴의 편파·왜곡보도, 이교도의 책동 등등에 전 불교도는 분노하여 궐기할 것을 주장하는 소리에 익숙한 불교도에게 이러한 주장들은 신선한 충격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분들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다만 총체적 인식에서 볼 때 10·27사태 등을 법난으로 규정치 않는 등 어떤 사회의 역사적 규명을 개인적 혹은 주체 환원적 책임으로 국한지음은 과학적 사고의 결여에서 나오는 단견이라고 생각한다. 지명스님의 『법난이 정부에 의한 부당한 탄압이 아니었다는 휴암스님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정의하는 문제와 그것을 수행자의 내적인 자성의 계기로 삼는 문제를 혼동한 데서 나온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출가란 ‘저마다의 큰 개혁이요, 순수한 열정으로 인생의 고뇌를 해결하는 진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규정한 「선우도량」의 스님들은 이러한 출가자들의 승가공동체는 ‘깨달음의 성취나 나눔의 덕행이 권리와 의무인 맑고 성스러운 곳으로서 인간의 이상이요 맑고 깨끗한 힘의 원천’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출가의지는 얼마나 이루어졌으며 불교는 산업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는가?』라고 자문하고 『부끄럽다』고 대답했다.
그간의 불교계가 자성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은 바 아니지만 교계의 양식과 양심이 있는 소장 중진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이러한 발기 취지문을 냈다는 데서 그 무게와 기대가 예전같지 않다. 특히 그전의 진보적 승가의 움직임이 구성원의 수행과 실천방식, 방향성 동에 일정한 문제점으로 인해 대중화의 벽이 두터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이번의 움직임은 그 구성원의 면모나 일의 진행방식, 방향성을 볼 때 대중의 큰 반향이 기대된다.

거듭남의 몸부림
휴암스님의 주장과 반론은 일간신문에까지 보도되는 등 외형적으로는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나, 10.26법난 등의 문제만이 반론다운 반론이 제기되었을 뿐, 전면적이고 총제적인 응답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데는 승가의 풍토가 이러한 논쟁을 하는 것 자체에 익숙치 않는 탓도 있겠지만 비판은 가능하나 기실 대안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다시 말해서 휴암스님의 문제 제기 자체가 ‘자성을 촉구하는 것’그 자체이므로 일부분 긍정을 안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형편에서 주로 주시만 하고 있는듯 하다는 것이다.
모처럼 정말 좋은 논쟁을 하고 싶었고 또 그럴 가능성이 이제 우리 승단에 어느 정도 조성되지 않았나 싶었다는 휴암스님은 『나는 나의 돌 던짐을 계기로 진실과 순수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마치 성난사자가 대평원을 만난 듯 나의 글속의 외침을 계기로 삼아 도리어 나보다 한술 더 떠서 한단계 높은 단계에서 보다 강도 높은 승가적 자아비판의 양심의 불길을 당겨줄 줄 알았다』고 기대감을 가졌으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고 후술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평가치 않는다. 눈에 보이는 반응만이 반응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처음 몇 년 동안 ‘불교탄압’에 대한 대정부 규탄의 목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일각에서 뼈를 깍는 자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다만 오늘날 불교를 바라봄에 있어 이제 불교는 불교 그 자체만으로 존속할 수도 없으며 존속해서도 안된다는 인식에서 오늘의 불교를 진단하고 반성함에 있어서는 사회·역사적 시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교탄압’이 휴암스님의 주장대로 운동권 젊은이들이 불교계의 대사회적 무관심을 자극하여 그들의 반정부, 반독재 운동에 불교적 에너지를 유도해 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채택한 것이 일차적 연원이라 하더라도 ‘불교탄압’의 구도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 만큼 불교인이 피부로 느끼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렇게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 해도 이번 휴암스님의 외침은 필요한 것이었고 진전된 문제제기라는 생각이다.
자성의 외침에 비해 대안과 전망을 내오기 위한 「선우도량」의 움직임은 한층 적극적이고 실천적이다. 승납 10년이상 30세에서 50세까지의 전국의 비구스님들이 문중, 정견(政見), 단체 등에 관계없이 새로이 결집하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젊어지기 위해 거듭나려는 아름다운 몸부림인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수행과 교단을 함께 염려하며 수행과 깨달음을 하나로 보는 공통인식을 해나가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는 길만이 불교의 올바른 길이다. 우리는 함께 모일 것이다. 출가수행자 개인의 정진을 토양으로 공동체 수행과 공동체 실천을 향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