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회적 실천을 위한 논리적 근거
(1)실천적 인식원리(四聖調
불교는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구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사성재(四뿔諸)인 것이다. 첫째 현실에 대한 올바른 관찰(苦諸) 둘째, 현실문제에 대한 원인 분석(集諸) 세째,현실문제의 해결 가능성으로서의 목표및 그에 대한 믿음(滅調) 네째, 현실문제의 원인을 제거하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실천방법(道諸)의 네단계로 나누어 인식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현실인식의 기본 명제는 고통(苦)이다. 고통이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반되는 결과인 것이다. 현실문제로서 고(苦)의 인식을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인간 모두가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고(四苦 :生老病
死)를 말하고 또 다른 하나의 측면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속에서 구조적 모순에 의해 파생되는 구조적인 고(構造的인 苦)를 말할 수 있다. 전자는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고통임에 반하여 후자는 그 모순구조의 특성에 따라, 어느 특정 계층 또는 어느 특정 지역에만 적용되는 고통인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나타날 때는 한쪽의 고통이 어느 다른 한쪽으로 전가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어느 다른 한쪽은 전가된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며 고통을 받지 않는 다른 한쪽은 고통의 일부분을 구조적으로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된 구조속에서 고통의 전가는 사회적으로 계충별로 나타나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파 제3세계 국가와의 신식민지주의의 형태로 그 고통의 일부 또는 전부가 전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적 고통의 구체적인 해결과 극복을 위해서는 사성제가 제시하는 실천적 사유로서 그 원인을 규명하고 그 극복을 위한 구체적 실천을 행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2)사회적 실천의 방법
중도(中道)는 초기불교사상의 근본교결이며 후세에 대승불교에 가서도 공(空)사상으로 발전하는 교설이다. 이 중도는 인식론적으로 유(有)나 공(空)의 두변C邊)을 여윈 중도와, 수행법으로서의 고(苦)와낙鷹)의 두변을 여윈 중도의 두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중도의 교설이 사회화 될 때 많은 오류를 범해 왔다. 중도를 기능개념이나 상태개념으로 파악해서 중(中)이 마치 산술적 의미에서의 중간을 말하는 것처럼 왜곡해 왔다. 중도의 참된 돛은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그 상황에서의 최선의 길, 가장 올바른 길인 것이다. 즉, 적중(的中)의 길인 것이다. 중도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정화 될 수 없다. 중도는 정해 놓은 길이 아니다. 오로지 그 상황에서의 최선의 길, 적중의 길이기 때문에 ‘정함이 있음이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도표I 참조) A에 있는 사람에게는 목척지에 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가라’고 해야 한다. 이때 ‘동쪽으로 가라’는 것은 A에게는 목적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며 측중의 길이다. 그러므로 중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B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B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이때 B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극단이다. ‘동쪽으로 가라’라는 것은 목적지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일 뿔인데 그 수단을 목적화 할 때 극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B에게는 확쪽으로 가라’ C에게는 ‘북동쪽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곧 중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땐목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강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뺏목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강물을 다 건너고 나서도 그 뱃목을 질어지고 간다. 이것은 햇목을 강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결과 발생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지혜로운 자는 강물이 앞에 가로
놓여 있을 때는 햇목을 준비하고 사막이 가로 놓여 있을 때는 낙타를 준비하고 산맥이 가로 막혀 있을 때는 말을 준비한다. 그러나 분명 강물과 사막과 산맥을 다건너고 난 뒤에는 몇목과 닥타와 말을 버리고 간다. 이것은 마치 옛 선사의 지월(指月)의 비유와 같다. 중천에 떠 있는 달은 보지 않고 가르키고 있는 손가락 끝만 보는, 그리하여 그 손가락 끝이 종국에 보아야 될 달인 줄 아는 어리석음을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중도는 사회적 실천의 훤리로서 사회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인식없이는 참된 중도의 실천은 불가능한것이다.
(3)사회구원의 논리척 근거(포교)
불교에 있어서 저간의 분위기는 사회적 실천을 강력히 주창하면 그것은 현실참여 불교이며 그들은 정치단체 내지 사회단체이지 종교단체가 아니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것은 개인척 기복j신앙에 머무는 소위 순수불교(?)를 지향한다는 이들의 입장이었는데 이는 실로 반사회적 반역사적 반민중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은 잘못된 사회의 구조 때문에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이들의 신음소리에는 귀를 막고 개인적 기복과 관념적 초월신앙의 신선주의를 최상의 불교인양 오해하는 것이 순수불교라면 이런 불교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신앙의 순수성속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참회, 그리고 일체중생과 하나가 되어 함께 고통으로부터 해탈(自他一時成佛道)하고자 하는 발원을 역사 사회속에서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불교일 때 비로소 인간해방과 사회구원이 동시에 이루져 온전한 불국토는 건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해방으로서의 사회구원은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현실적 고통(구조적 모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바탕위에 그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포교(布敎)라는 행위로서 실현하는데 이 포교행위는 불교의 근본목적인 해탈(=성불, 불국토 건설)과 합일되는 것으로 인간해방과 사회구원(해탈)의 실현에 있어서 당위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면(도표H 참조) 불교에서 이루고자 하는 최상의 목표는 해탈이다. 중생들이 해탈을 위해 기도,간경, 주력, 참선둥의 종교적 수행을 실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해탈을 위한 노력은 ‘개인해탈의 차원’이다. 그러나 흘연히 ‘나’ 개인만의 해탈로서는 진정
한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중생 모두와 상의 상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차적 해탈’을 증득한 것이니, 연기척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이것을 대숭기신론에서는 시각(始훨)이라고 한
다. 시각을 성취한 이들을 보살, 성문, 연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차적 혜탈의 깨달은 내용이 존재의 연기적 관계이므로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그 실천행의 방향이 주어진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보살행이며 구체적 실천과정에서는 ‘포교’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지옥이 일공하지 않으면 성불에 들 수 없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이 가능하며 또한 고통속에 신음하는 중생의 소리를 애태우며 경청하여 그 고통을 털어 주려는 관세음보살의 발원이 가능한 것이다. 중생 없는 부처 없고 부처 없는 중생이 없다고 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부처도 완전한 부처 일 수 없다. 왜냐 하면 아직도 고통속에 방황하는 중생이 많아 세계는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진정한 의미의 성불은 미혹에 허덕이는 모든 중생들이 모두 함께 해탈에 이를 때 가능하며 이 때에 비로소 ‘세계는 완성’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것을 본각(本뿔)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완성’되는 본각을 증득하려면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할 수 있도록 보살은 ‘포교’라는 실천을 통하여 미혹한 중생을-‘일차적 해탈’도 이루지 못한-이끌어 주고 미혹한 중생은 이러한 보살의 ‘보살행’에 가피력을 입고 성불을 향한 정진에 노력해야만 된다. 이럴진대 ‘포교’란 단순한 교세의 확장 또는 교리의 전파의 의미를 뛰어 넘어 불교의 궁극목표인 성불을 위한 실천항목으로서의 적극적이고도 근본척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하늘 속에 있다 구릅 사이로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중생이 아파하는 곳에 중생의 모순으로 나타나 그들의 고통의 극복을 위해 보살행(=포교)을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포교의 행위가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하여 질 때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사회 속에서는 구조적으로 고통을 전가하는 자와 고통을 전가받는자가 확연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참된 보살행은 자비섬에서 우러나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모든 선한 이는 기꺼이 맞아들여 받아 들이고(擬受) 모든 악한 이는 그 악한 마음을 마땅히 항복받아 받아
들이는(折代)’ 사회적 실천의 가치기준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교의 방향(=사회적 실천의 방향)은 인간해방(중생성불)의 차원에서는 잘못된 구조를 유지 존속시키며 고통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전가시키는 무리들을 마땅히 항복받아 구제하고 고통을 전가 받는 무리들에게는 기꺼이 맞아들여 구제됨이 온당하며, 사회구원의 차원에서는 잘못된 구조 그 자체를 혁파하여 올바른 사회구조를 구축하고 아울러 다수의, 고통을 전가 받은 이들을 현실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사회적 실천으로 그 방향이 결정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포교의 일차적 관심은 구조적 모순에 의해 고통을 전가받고 있는 이들(=민중)에게 기울어야 하는 당위성이 주어진다.
3. 민중 생활의 실태
민중은 체제나 사회의 제반 모순 구조에 의해 고통을 전가 받고 있는 다수로서 한국사회에서 대체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영세 상공업자, 그리고 투옥중인 지식인 학생 등의 양심수를 들소 있다. 이들은 모두가 잘못된 사회구조의 희생자들로서 그 잘못된 사회구조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은 다른 기회로 미루고여기서는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들만 제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료들이 ‘포교’ 에 원용되기 위해서는 포교담당자들의 보다 더 구체적인 인식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1) 노동자의 현실
“명생도록 최진 적 없이
이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 버렸어
임석 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속에
물건너간 수출품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봐\"
-박노해〈지문은 부른다〉의 일부-
①임금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300명이상의 노동자가 있는 경우는 대기업에속하기 때문에 고숙련노동자가 포함이 되어서 약간 높은 임금이나 생산직 노동자는 중소기업의 노동자와 임금의 수준이 거의 같다. 임금을평균해 보면 남자가 대충 15만원 내외이고 여자가 8만원 미만이다. 그러나 여기에 도매물가지수를 감안한다면 실직적인 임금은 보다 더 적은 액수라고 보아야 한다.
②노동시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시간 노동이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근로시간 단축과 주 40시간 근무제가 세계적인 추세인데 반해 우리 나라의 근로시간은 장시간이며 그것 또한 줄어들기는 커녕 더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위 표의 통계는 사무직 근로자동을 합한 것으로 생산직 근로자의 노동시간은 통계상의 숫자보다 훨씬 장시간인것으 로 생각되며 대충 잡아일주일에 6일 근무한다고 해도 하루 10시간 내외의 노동을 하는 셈이다.
③산업 재해
산재보상보험법의 적용을 받는 상시근로자 16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에 대한 통계이며 4일 이상e2년 6월까지는 8일 이상)의 요양을 요하는 재해를 대상으로 실제로 보상 혜택을 받는 재해만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실제 발생한 재해는 위의 통계보다 훨씬 많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충 살펴보아도 1 년에 1,OO0여명 이상이 사망하고 10여만명이 부상을 당하고 3,OO0여명이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노동자는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산업재해의 위협과 직업병에 시달리며 오늘도 ‘지문이 다 지워지는’ 고된 노동을 하고있는 것이다.
(2) 농민의 현실
①통일벼 정부 수매가 및 생산비
우리는 위 표를 자세히 살펴볼필요가있다. 언뜻 보아 정부수매가는 l975년의 l9 500원에서 l982년에는 55,970원으로 무려 287%나 인상되었다. 농수산부가 우리나라 농민의 소득이 눈부시게 향상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치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비를 보면 1975년의 20,220원에서 l982년에는 76,997원으로 약 388967} 인상되었다. 따라서 정부수매가에서 생산비률 헨 적자 폭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이것은 농가의 경제사정이 ‘절대적 가난’의 측면에서조차 향상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②비료값
대부분의 대 비료회사들이(영남화학, 진해화학) 외국회사와의 합작회사이기 때문에 외국 투자기업에게 유리하게 가격이 형성되어 국내비료가격이 국제가격에 비해 두배나 높이 책정될 수 밖에 없다. 또한 합작회사가 아닌 한국비료의 인수가격을 보아도(윗표 참조) 판매가격보다 높은 해가 하나도 없다. 이는 농민이 훌린땀이 외국기업에 고스란히 옮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농가빚
이 표를 보면 영세한 농가일수록 부채 중 사채의 비중이 높다. 물론 농협의 금리보다 사채의 금리가 높다.
즉 농민중에서도 금리가 낮은 농협의 자금은 부농이 쉽게 융자할 수 있고 가난한 영세농은 자금수요가 집중되는 봄에 부농에 밀려 금리가 높은 사채를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채의 용도를 보아도82년의 경우 가계소비에 충당하는소비금융이 36.7%에 이르고 있다 음식물비, 주거비, 교육비, 관혼상제비 퉁 가계지출에 충당하기 위해 부채를 지고 있다는 것은 경제적인 몰락, 즉 신분적인 천민화가 되는 것이다. 금리의 경우 사채고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채라고 하더라도 일반 금융대출의 금리 10%보다 높다. 농협 ·일반대출은 금리가 l3%로 더 높다. 대부분의 농가가 제 시기에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연체되는데 그 경우에는 이자가 18~21%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농가부채는 줄어들 전망은 보이지 않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농가소득의 궁핍화는 저곡가와 농산물 가격의 폭락의 한면과 부채의 계속적 증가라는 다른 한 면이 서로 맞물려 악순환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④ 이농 현상
위의 표를 보면 1960~70년대에 농촌인구는약 348만명이 감소했으며 농가인구는 약 373만명이나 감소하였다. 이러한 농촌, 농가인구의 감소경향은 196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였고70년대 전반에 약간 둔화되다가 l970년대 후반부터는 한충 급격하게 진전되었옴을 알수 있다. 이러한 농촌 농가 및 농업취업인구의 전반적인 감소와 함께 우리나라의 농가호수는 l967년을 정점으로 하여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농현상은 저곡가와 농가 빚의 증가로 인하여 농업분야의 열악한 구조적 위치를 강요당함으로서 농업내부의 농민충분해가가속화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3) 도시빈민의 현실
①유입형태
서울의 빈곤가구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 농촌, 영세민 출신의 도시 유입자라는 것이다. 유입자들은 전라도 충청도 등 농업이외의 다른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 출신이 많은데 이들은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수없고 서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상경한다. 이농민이 상경하는 특정을 살펴보면 전 가족이 직접 서울로 유입하는 경우가 많고 생산 연령충이 이전하는 비율이 높으며 농촌에 종사한 사람으로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으며 취업수준도 낮은 계층이 이동을 했다. 또한 이들이 서울에 거주하는 동안의 정착생활도 안전성을 갖지 못하고 자주 이사함으로써 거주가 매우 불안하였다. 이렇게 이사 빈도수가 높은 이유는 낮은 경제수준으로 최소한의 생활안정지의 확보를 위해 계속 유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울로 이주하게 된 동기가 경제적 요인이지만 농촌에서의 하위층 이농민들은 도시에서의 거주
기간과 생활의 질적 향상과 관계없이 오히려 빚을지는 가구가 많다.
②이농인구의 변모 과정(도시빈민화과정)
③생활실태
도시빈민은 직업이나 교육에 있어 그 수준이 낮기 때문에 소득수준 또한 매우 낮다. 가구당총소득은 10~20만원 사이가65%나 되어 이 액수로 4~5인이 살아가는 가난한 생활이다. 1인당 평균소득은 3만6천원으로 도시 월평균 생계비 25만 4천원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며 1인당 국민소득과 현저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반면 월명균 지출액수를 보면 15만 3천원이며 1인당명균지출은 3만 2천원으로 소득의 대부분을 지출한다.
지출에 대한소비구조를 보면 음식물비에 대한 지출이 57.5%이며 교육비, 의료비 둥이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의식주의 최저선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소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도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거주환경은 대지 20평이하가 88.7%로 현재 건축법상 최소 대지면적 27명 기준에 대부분 못미치고 있다. 주택 소유 형태를 보면 57%가 무주택 가구로서 전세가 40% 월세방이 I7%이다. 가구당 평균 방수는 1.6개이며 또한 변소 상수도 등 주거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시껄을 갖추어져 있지 않아 환경이 매우 불량하다. 부채를 지고 있는 가구는 70%이며 50만원 이상의 부채를 지고 있는 가구가 31.5%이며 1백만원이상도 15%나 되고 있다. 이렇게 부채를 지게 되는 이유는 의료비가 가장 많고 교육비 주택관계의 순으로서 의료보험혜택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다..
(4) 양심수의 문제
\"---상식적으로, 서울대학교에 다녀 가지고 잘먹고 잘살 수 있는데 왜 이리 고생하는가 이러면서 상당히 의아스러운 시각으로 많이 보는 듯한데 그것은 뭘 대변 하느냐 우리 사회가 자기만 위혜서 사는 이기주의 사회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읍니다.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함께 애정을 갖고 살아가는 이것을 위험시하고 있읍니다. 노동자들이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데 그걸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 노동현장에서 어려운 사람들과 고생을 같이 하면서 일한다는 거 그게 뭐가 문제가 됩니까? 어려운 법이론이 뭔지 저는 잘모르겠읍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것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오허려 도와가면서 살아 가는 것, 그것이 뭐가 위험하고 뭐가 파괴척이고 뭐가 과격한 생각입니까? 그런 생각을 갖어 보는것자체에 대해서 저는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을까? 하고 토론하고 얘기했읍니다.”
위의 글은 소위 위장취업이라고 해서 대학생이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구속된 한 학생의 법정 최후진술 중의일부분이다. 이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자기가 한행위에 대하여 정당하고 의연하다. 비록 실정법에 위배 되었을망정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더욱 열악한 현실의 이웃들을 위해 행한 일이기에 당당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람들을 ‘양심범’ 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양심범은 주로 다음 세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민중의 권익 용호, 역사발전, 사회정의를 추구하다가 투옥된 지식인충과 둘째는 노동현장 및 농촌 그리고 도시 변두리에서 생존권 투쟁을 위해 싸우다가 투옥된 민중 충과 세째는 학내 ·외에서 사회발전과 민중권익 옹호를 위해 싸우다 투옥된 학생충이다. 양심범이야말로 진정 중생이 아파하는 곳에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출현한 실천하는 보살의 한 모습인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처절한 그들의 조용한 외침을 새겨들으며 그들 앞에 차라리 사죄하고픈 심정이었다. 그토록 순수한 소망과 절절한 사랑을 부여안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가 강요했던 것은 무엇인가? 세속적 출세와부 귀명달을 가져다줄 것을 바라면서·그저 내몸 하나 다치
지 않게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그들에게는 그들의 뜻을 매도하는 정권 이상으로 우리 부모의 욕망이 고통스러웠으리라. 안중근과 융봉길을 위인이라 가르치면서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사량이라고 가르치면서 우리는 어쩌 저 아이들을 꾸짖을 수 있단 말
인가. 아들 딸이여 너희들은 이 어미더러 너회들을 버리라고 했지만 이 엄마는 너률 되찾기 위해 조국통일파 민주화의 그날을 기필코 살아 생전에 보기 위해 너회들의 그 엄청난 고통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려 한다.”
이글은 학생시위사건으로 구속한 한 학생의 어머니가 아들의 재판과정을 참관하고 난 후 느낀바를 적은글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고통의 어둠을 불사르고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 고통으로부터 벗어 나고자 하는 아들의 재판정에서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에 개인적인 안위와 영달만을 강조해 온 어머니는 그 자식에 의해 역사와 사회룰 관계속에서 새롭게 인식하게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아들이 고통의 현장에 현신한 보살이라면 자식을 통해 그 어머니는 사회와 인간을 연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일차적 해탈을성취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양심범의 문제는 그돌 개개인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 그리고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시대의 아폼인 것이다.
이상으로 거철게나마 민중의 현실을 개괄하여 보았다.
여기서 다루지 못한 더욱 본질적인 문제들이 있을 수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민중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척규명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삶의 기본적인 특성들만을 일별하여 현장포교 또는 민중포교에 원용 될 수 있는 일차적 기본자료로서의 역할과, 나아가서 불교에서 거의 전무한 ‘민중지향성’을 확립하는데 그 단초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4. 민중선교(포교) 의 현황
(l) 기독교(신·구교)
70년대이후 한국사회의 커다란 변화에기독교세력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사실이다. 이는 기독교가 그만큼 한국사회의 발전을위해 현실적인 고통에 대환 사회적 실천에 힘썼다는 반증인 것이다. 특히 70년대 이후부터 역사발전의 주체로 인식되어 온 민중에 대한 을바른 이해와 이름 민중의 현실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민중선교의 l차원에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사회적 실천을 했기 l때문에 가져온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도시 노동 농민 학생 청년 여성 l둥 사회전반에 생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급 자신들의 문제와 사회문제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도록 하여 정의롭고조효댐사회를 이룩하고자행동하는데 그목적”을 두고신·구교가합심하여 선교의 사명을다하려고「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를구성하였다. 이를중심R혹 교회일치의 정신으로 어느 종파에도 소속되지 않으면1도 모든 종파에 영향을 끼치는 위치를 확보하면서 맨중을 섬기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회현실에 뛰어들어 반민주적이며 반민중적인 제표와구조를 개선하고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 파정에서 발생한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 등의 소외된 민중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민중이 역사의 주역이 되는 나라를l이룩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그러나 보수주의l-즉 타계주의, 개인구원, 기회주의, 경건주의, 교회쿠의-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교회로부터 그리고 국가엔보와사회의 안정을 내세워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배세력으로 부터 내·외적 압력과 제약이 활력적 다 기능 수행에 커다란 도전이 되어 오기도 했다. 이 협의회는 신 ·구교의 단체를 회원으로 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그 회원 단체로는 카톨릭에서 카롤력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한국산업선교연합회, 한국도시선 교실무자협의회, 대한YMCA연합회, 함국특수지역 선교위원회, 한국기독청년연합회, 한국기독교 농민회를 비롯한 많은 단체와 개별적 인사들이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동, 농촌, 도시빈멘둥 현대사회의 고통의 현장에 대한 적극적인 선교를7P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한국사회의 발전에 대한 발언권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화다
(2) 불교
불교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현실사회쩨 대한 구체적 인식과 민중적 자각이 결여된 상태여새 종단적으로 민중지향적 포교는 실시되지 못하고 있대 그러나 소위 ‘불교계의 야권’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대학불교연합회, 민중불교운동연합동 두 단체에서 실천적인 민중포교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종단내의 압력과 지배집단으로부터의 탄압으로 인하여 그 확산이 어려움을 겪고있다. 특히 물질적 기반이 허약해서 체계적 포교로서의 사회실천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일부 청년 승려들이 이에 동참하고 또한 종단 내외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지켜보고있는 뜻있는불교인이많다는 것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한 단면이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첨가해 두고 싶은 것은 단위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야학, 그리고 민중의 구체적 고통의 현장에서 동참하여 현실관계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청년불자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규모나 인원이 극히 적은 편이라 구체적 언급은 어렵겠으나 분명히 해둘것은 이들이 불교적 입장에 서서 사회적 실천을 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5. 끝에
기충민중과의 괴리를 극복하고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장 불교를 지향해야 한다. 고동(苦)의 진원지로서의 현장인 산업공단지역 도시빈민지역 농촌지역이 바로 현장인 것이며 여기에 지역사회 사원을 만들어 현장의 조건에 타당한 구체적 프로그램으로 현실적 방편을 삼아 민중의 조직화와 포교를 담당하는 대승보살의 실천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땅에 살고 있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들의 구체적인 고통의 현장에서 불교가 그 이념 구현의 빛을 발할 때 불교적 구원은 그 실천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땅에 살아 남을 수 있는 존립의 근거가 유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