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과 현존성(現存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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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목정배
1986년 05월 51호
사악한 길로 이끌게 되니 그 최상은 천불(千佛)이 출현하여도 용서받지 못함은 당연한 일 일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견(%見)을 내어놓고 이를 여실한 생활로 끌어드리려 하는 사람들의 작회(作廳)인 것이다. 그런데 선문陣門)에서는 이러한 사견작회(%見作職)를 용납하지 않는다. 즉 「견성성불(見性成佛)하면 일득영득(一得永得)하니 스스로의 보장廣홉)에 의거하여 제 가보(家寶)를 운용하는데 어쩌 그 수용함에 한계가 있겠는가圖뺨心要)」라는 대목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절대적 완성자가 되면 한번 얻어 깨달은 것으로 영원히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무한동력으로 항상 일용할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현하는 무한동력은 아무리 오래 쓴다고 하여도 다함이 없는 무제한의 힘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심성을 참다운 견성으로 발현하게 한다면 그것은 무한 동력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한정된 동력을 쓰고 나면 다시 충전하거나 다른 연료로 바꾸어야 하는데 한번의 깨침으로 무한동력을 운용할 수 었다함은 바로 인간생활의 위대한 전기(轉機)가 될 것이다. 이러한 깨침이 자아에 정좌(定坐)함은 바로 그 자아는 무한한 청정성에서 생명 할것이다. 훤돈뼈願)이 선으로 성취하면 두번 다시 퇴몰하지 않는 불생무생(不生無生)의 경지에 침입하여 일체를 전용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안전에 현현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생명의 주체이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성을 잃고 일상의 수레에 이끌려가고 있다. 이것은 물질만능에 의해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물질로는 인간의 공허를 메울 수 없다. 잃어버린 자기는 오직 스스로의 심성 속에서 되찾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出家者)란 본질회귀(本質回歸)의 순례자」라고 한 것도 인간은 스스로만이 구제할 수 있고 자각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자각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떻게 수행하여야 하며, 자각하는 그 목척이 무엇이며, 중생은 영원히 중생인가에 대하여 「불법(佛法)에는 중생이 없다. 이는 중생의 허울에서 벗어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스스로 자아의 허물을 발견하여 본래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여 「법(法)이나 도(道)가 모두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며 경전이란 단지 참된 면목을 일깨워주는 방편일 뿐이니 이를 교외별전(敎外別홉)이라 한다」고 하였다. 어느 선사와 제자와의 대화에서도 보면 “스님은 어떻게 수행하십니까”하고 제자가 물으니, “배고플때는 먹고, 피곤하면 자지”라고 답하였다. “그런것은 누구나가 다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스님이 하시는 것과 같이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읍니까”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먹는다고 할 때 그들은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어서 스스로의 마음을 어지럽히게 하고 있기 때문이야. 또 그들이 잔다고 하는 것은 자는 것이 아니라 천가지의 일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나와 같다고 할 수 없어”
이 이야기는 더 이상의 결정이 필요하지 않다. 현대인은 문제에 엄매이고, 남의 사상에 가탁하여 살려고한다. 남의 사상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그것은 남이 깨달은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다. 불교의 교젤, 원증(圓證)의 세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교껄이고 사상이며 착함이나 완성으로 이끄는 방법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세계에 스스로 참입하고 스스로 증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길이 바로 선수행의 길이요 돈오돈수(賴뽑願修)의 길이다.
그러므로 선은 교수하는 것이 아니고 직시하여야 한다. 우주만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선이다. 다시 말 하면 인간 내면세계에서 밝아온 광명체인 것이다. 중생은 마음 밖에서 부처님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뭇 생명체가 하나라면 거기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본래 면목이 있는 것이다.
선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달관하려는 심행(心行)인 것이다. 현상은 대상을 상대하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본질은 생명의 근원을 투시함은 물론 선행(輝行)을 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으로 일치하는 본원력이 발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 구경으로 이룩된 힘은 불력(佛力)이요 보살력(홈훌力)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알음알이로 되는 인식적 논리이거나 또는 동정심으로 구원하는 윤리적 용사가 아닌 것이다.
선은 자기 생명의 실현임과 동시에 일체 생명의 명둥성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이나 논리, 사회적 상관 관계에서 부여될 수 있는 윤리적인 봉사가 아닌 것이 선이 질어져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무초건 가야 한다. 조건에 의미를 두거나, 조건에다자기의 면목을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선에 참업(參入)한것이 아니다. 다음의 자기에게 어떠한 일이 닥친다고 하여도 그 조건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현재의 모든 조건을 상대하면서 해결해가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불퇴전(不退홈)의 정진이며 문제의식에 살면서 그 문제의 해결사이다. 그러므로 선은 현존성(現存性)의 차원에서 역사적 존재로서 대아(大我)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를 책임의식으로 담당하는 행동선(行動輝)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선은 이와같은 행동선으로 대경을 척파하지 아니하였다면 과거의 역사 앞에서 오늘의 실존 앞에 사악한 행위가 난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선사(輝師)의 행동선이 과거의 시간 속에 일어났던 모든 문제들, 또한 현실 앞에 파생되었던 모든 불의를 혁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 지고성(至高性)은 엄격한 심검(尋劍)이며, 선의 보편성(普遍性)은 활달한 자안(慧願)이 되어야 한다. 선이 생활화하여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진심(質心)이 바로 선으로 회입(會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를 6조 혜능(慧能)은 “심지무란정(心地無폼L定)이라 하였고 서산(西山)은 “선시불심(輝是佛心)”이라 한 것아다. 선이 보편적인 생활로 투영된다고 하더라도 선이 바로 명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끽다거(奭茶去) 둥의 표현이 바로 향상일로(向上一路)나 조고각하(照顧빼下)의 그 지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선과 생활은 선일여의 생활을 의미활 것이다.
하여 오늘날처럼 생활선, 취미선, 건강선, 운동선 둥으로 잡다하게 분화되는 것을 계도하여야 할 것이다.
선이 정통적이고 순수한 것이 되지 아니하고 생활주변에서 우후죽순격으로 파생되는 O O선 둥은 취미생활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것 들이 잡다하게 중대하게 되면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를 매만짐과 같은 지해적(知解的) 선으로서 불교를 알고 있거나 미숙한 수행으로 해오(解惜)의 세계를 그리고 있을지 모르나 선의 참다운 세계는 참입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적인 것이 생활화 되기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척당하게 생활화 된것을 갖고 그것이 절대적 종교생활이라고 고집하면 안된다. 선의 어떤 경계가 생활에 일치한다 하여 선과 일여하였다고 하는 견해는 버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