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
1) 선의 세 가지 분류(三種輝)
인연으로 생긴 바 온갖 것을
나는 바로 공이라고 이야기하네.
공도 또한 방편으로 지은 이름이니
이것을 곧 중도의 뭇이라 하리
因緣所生法 我說是空亦
흙是假名 亦名中道義
위의 게송은 용수보살의 중론송(中論題) 관사제품의 한 귀절이다. 비록 짤막한 한 게송에 지나지 않지만 이 법문은 천태에 의해서 연기 (緣起)의 핵심교의를 바로 드러내 보인 교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리고 이 게송은 방대한 불교대장경을 일관된 체계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작업g台敎휩j)의 한 기준으로 차태되어진 법문인 것이다(天台는 불타의 교설을 그 내용에 따라 훌數·通敎·別敎·圓數로 나누며 교화방식에 따라 順敎·漸敎·秘密敎·不定數로 나누는데 훌·適·別·圓의 구분은 위 게송의 緣起·空·假·中에 차례로 배대된다)
여기서 인연으로 생긴 온갖 것이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표현되고 있는 존재일반과 삼십철도품둥 수행법을 말한다. 즉 우리들의 현실은 의식 (心:受·想·行·識)과 존재(色)의 상호교섭으로 주어지는 생명운동의장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도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의식이 아니라 존재와 더불어서 생성되어가는 의식인 것이며 존재도 의식 너머에 홀로 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삶들의 실천력과 함께 주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곧 의식은 의식 아닌 의식인 것이며 존재는 존재 아닌 존재인 것이니 연기론은 존재일반(諸法)의 자기부정(無我)파 자기긍정(無常)이 본래 둘이 아닌 전체로서의 생명세계(中道)를 열어 주고 있다.
위의 게송에서 첫째 인연으로 모든 것이 생긴다는 구절은 온갖 것이 그것 자체로서만 그것일 수 없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스스로 그것일 수 없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소외의 관념은, 관계가 아닌, 관계의 열려진 해방성(本自空寂) 속에서만 관계성이 갖는 소외의 참된 의미가 드러난다.
즉 한송이 장미꽃(果)은 스스로 장미꽃이지 못하고(無我) 씨앗(因)파 물·땅·햇빛·바람(緣 :地·水·火·風)과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장미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미꽃은 씨앗·물·땅·햇빛·바람의 실체적인 쌓여짐(積聚)에 의해서나, 그것들의 기계적인 인과관계에 의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즉 장미꽃은 씨앗·물·땅·햇빛·바람 속에서 피어났지만 씨앗·물·땅·햇빛·바람 등은 장미꽃 속에 실체적이고 닫혀진 모습으로 들어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중룬송은 상대적인 관계성의 실체화나 인과의 기계론적인 이혜태도를 깨뜨리기 위해서 인연으로 생긴 법이 곧 공(空)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은 결코 존재부정(但空)의 의미를 갖고 있거나 선험적인 원리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
공은 존재에 관한 실재론적인 집착을 깨기 위해서 시설해 놓은 언어적인 표현인 것이니 중론송은 그것을 공도 또한 방편으로 세운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空亦空 : 質空)
\"상대적인 관계성의 실체화나인과의 기계론적인 이해태도를 깨뜨리기 위한 법이 공(空)\"
그러므로 공(空)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해석된 연기의 의미는 존재의 관계를 통한 자기긍정과 자기부정, 시간(生)과 시간의 초월(不生), 소외와 해방, 불완전과 완전을 동시에 통합해내는 역동척인 생명의 진실(中道實相)을 열어 보이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부정적인표현으로서 공(空)을 말해도 존재의 자기 긍정(假)과 부정 긍정의 통일(中)을 동시에 내포하며, 긍정적인 표현으로서 가(假)를 말해도 존재의 자기부정과 부정 긍정의 통일을 함께 거둬들이며, 중도를 말해도 존재의 자기부정 자기긍정을 동시에 싸안는다(圓顧三諸).
즉 온갖 것이 본래 스스로 있음이 아니므로(本自非有) 부정하되 부정하는 바가 없으며(破而不破) 온갖 것이 본래 스스로 없음이 아니므로(本自非無) 긍청하되긍정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立而不立)
또한 연기적인 불교의 세계관이 이와 같으므로 연기척인 세계관을 바로 깨달아 알므로 써 삶의 자유를 구현하려는 선적 실천의 길도 오용으로 표시된 현실 밖으로 탈피해 가지도 않으며 오온안에 내재된 어떤 불멸성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선은 오온(依他起표짧)에 관한 실재의식과 허무의식(遍計所執표짧)을 동시에 벗어남으로써 오온을 오온 아닌 오온뼈成賣性五훌)으로 되굴려 쓰는 실천의 길인 것이니 천태선사는 선의 연기적인 의미를 선의 세 가지분류를 통해 보여준다.
천태의 각의삼매(覺意三味)는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온갖 존재가 모두 삼매이니 온갖 것이 본래 항상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듭 삼매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선이요 둘째는 출세간선이며 셋째는 출세간상상선이다. 一切法皆是三摩提 以諸法本 來常寂不動故 復次三塵提略說有三種 一者世間二者出世間 三者出世間上上’
하지만 공·가·중(空·假·中)이 연기에 관한 별도의 의미체계 해석체계가 아니듯이 세간선·출세간선·출세간 상상선의 구분도 결코 단계적인 선정의 깊이를 지시하고 있지 않다. 천태선사는 세간선에 욕계정做界定) 사선(四輝)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색정四無色定)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출세간선에는 배사(背擔) 승처(勝處) 차제정(次第定) 초월삼매(超越三味) 삼십철도품 둥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출세간상상선에는 십력(十力) 수능 엄정(首뽑嚴定) 둥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데 세간선은 오온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든 있음에서 있음을 벗어나(從假入空) 휴식을 성취하는 선정이며 출세간선은 없음에서 없음을 벗어나從空入假) 온갖 것을 자기부정의 전체성속에서 창조적으로 굴려쓰는 선정이며 출세간상상선은 존재에 대한 부정과 긍정, 일과 휴식을 동시에 통합하는(空假平等) 선정이다.
그러나 실로 온갖 것은 본래 실제적인 있음이 아니므로 세간선의 닦음을 통해 그것의 실재성을 부정하되 부정한 바가 없으며 허무적인 없음이 아니므로 출세간선의 닦음을 통해 그것을 긍정하되 긍정한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선을 말할 때도 이미 출세간선과 상상선이 거기 함께 있으며 출세간선을 말할 때도 세간선과 상상선이 같이 있으며 상상선을 말할 때도 세간선과 출세간선이 동시에 더불어 있는 것이다.
2) 깨달음의 요건 깨달음의 작용(七覺支)
천태의 입장에 따르면 본멸경에서 밝히고 있는 칠각지(七覺支)는 출세간선에 분류된다. 그러나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세상에의 참여를 밝히고 있는 출세간선을 들어도 거기 세상에의 초월을 가리키는 세간선과 초월과 참여를 동시에 통합하는 상상선의 의미가 함께 있다.
즉 칠각지 가운데 쉼 (倚覺分) 선정(定覺分) 버림 (擔覺分)은 세간선에 해당하며 존재를 바로 가림繹法) 힘써 나아감(精進) 기뻐함(喜)은 출세간선에 해당하고 바른 생각(念)은 상상선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회·정·사각분은 삶속에 소극적인 휴식을 확보해 주고 대법·정진·회각분은 적극적인 활동을 열어 보여주며, 염각분은 휴식과 활동, 정(定)과 혜(慧)를 종합해주는 중도의 실천이다.
천태선사의 법계차제초문의 해석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철각지는 다음같이 그 내용이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1. 존재를 바로 가림 (擇法覺分) : 지혜로 모든 것을 살필 때 참되고 거짓된 것을 잘 가리어 허망하고 잘못된 법을 취하지 않으므로 존재를 바로 가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적인 선정관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의 입장이 아니라 불의와 모순에 대한 강한부정정신을 의미한다.
2. 힘써 나아감(精進뿔分) : 여러 가지 수행법과 세상에 이로운 좋은 법을 닦아 나아갈 때 이익 없고 부질없는 고행을 그릇 행하지 않을 것을 잘 깨달아 안다. 그리하여 늘 참된 법에 마음을 두어 부지런히 세상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늘려 나아가는 것을 힘써 나아감이라한다.
3. 기뻐함(喜뿔分) : 마음속에 기쁨을 얻었을 때 이 기쁨이 허위의식이나 잘못된 법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님을 잘 깨쳐안다. 곧 기쁨이란 참된 진리에 머무름으로써 생겨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기쁨인 것이므로 그것을 기뻐함이라 한다.
4. 쉼(精覺分) : 잘못된 견해와 번뇌를 끊을 때 모든 허위의식이란 쉬어 없애야 함을 잘 깨달아 안다. 그리하여 참되고 바른 선근을 손상시키지 않으므로 쉼이라 한다(인식주체의 실재의식 해방).
5. 버림(擔뿔分) : 마음으로 집착하고 있는 경계를 버릴 때, 버리는바 대상이 허망하고 거짓되어서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인 줄 잘 깨달아 알아서 다시는 따라가 생각하지 않는 것을 버림이라고 한다(인식대상의 실재의식 해방).
6. 선정(定覺分) : 대상에의 집착을 떠남으로써 모든 선정을 발할 때에 모든 선정마저 붙들어야할 실체가 없는 줄 잘 째달아 알아서 집착하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것을 선정이라 한다(선정의 실재의식 해방).
7. 바른 생각(念覺分) : 세상에의 초월을 통해서 세상에 참여하는 바른 진리의 길을 실천할 때에 (若修出世道時) 정과 혜를 균형 있게 조화시켜야 함을 잘 째달아 안다. 그리하여 마음이 침체되어 있을 때는 존재를 바로 가림 ·힘써 나아감·기뻐함 등 세 가지 째달음의 요건을 작용하여 침체된 마음을 바로 살려낼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이 들떠 있을 때는 쉼, 버림, 선정 등의 세 가지 깨달음의 요건을 작용하여 그 률떠 있는 마음을 거둘 것을 생각한다. 곧 바른 생각이란 두 가지 치우쳐 넘치는 것 가운데서 치우친 것을 조화시켜 나가는 치우침 없는 생각을 말한다(定慧平等).
위와 같은 철각지 해석의 입장에 서면 우리는 쉼, 선정, 버림을 통한 휴식의 확보와 존재를 바로 가림, 힘써 나아감, 기뻐함을 통한 적극적인 활동의 전개와 바른 생각을 통한 선정과 지혜의 종합을 통해 깨달음의 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경도 철각지를 닦으므로써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뜻으로 철각지를 보게 되면 철각지란 바로 째달음에 들어서기 위한 요건의 성격을 띄게 된다. 즉 철각지가 원인이 되어 깨달음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는 비록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지만 원인이 먼저 실체적으로 주어지고 결과가 미래의 어느 때 원인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은 언제나 결과가 이루어짐을 전제로 하여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서의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니(가령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썩어 버리면 씨앗-싹의 인과관계는 성립되지 못한다) 원인 결과는 어느 한쪽이
\"칠각지란
깨달음과 열반의
작용이며 발현이다\"
한쪽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결과 와 같이 상호 동시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각지의 닦아감도 존재의 참 모습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성취되기 전에는 그 닦아감의 과정이 깨달음의 요건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성취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철각지는 깨달음의 요건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니 본경에서 밝히고 있는 철각지 열반의 명제는 열반 철각지의 명제와 동시적으로 이해해야만 그 바른 뭇이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철각지가 깨달음과 열반의 성취요건이 된다는 말은 칠각지란 깨달음과 열반의 작용이며 발현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지명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깨달음이 철각지 실천의 주체 밖에 대상화되거나 철각지라는 실천행위를 넘어서 미래 속에 외재화된다면 우리들은 진리에 대한 무한추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삶의 완성은 현실 속에서 구현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벽선사도 그의 전심법요 (傳心法要)에서 뼈를 깎고 피를 내는 괴로운 행도 그 자체로서는 깨달음의 원인행위가 되어질 수 없고 존재의 참 모습을 바로 보아 무심 (無心)을 성취하는 것만이 궁극적인 깨달음의 완성(賴뺨願修)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혜문(慧聞) -혜사(慧思)-지의(智體)로 이어지는 천태선(天台輝)의 종지도 중도관(中道觀)을 성취하여 바른 마음에 머무를 그 때(初옳心住)가 바로 깨달음의 외재화에서 벗어날 때이므로 초발심주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이 성취되어진다(初훌心足是成正훌)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태선의 종지에 의하면 중도적인 지혜를 성취하게 될때 삶의 과정은 곧 완성속의 파정이 되어지며 삶들의 실천 그 자체가 깨달음의 발현이 되어지는 것이므로 비롯과 마침, 과정과 완성은 끝내 둘에 아닌 것이다. 열반경은 이러한 뭇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중도를 바로 보아 처음 바른 마음에 머무름과/궁극적인 깨달음의 성취는 둘이 없지만/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 가운데/처음 바른 마음에 머물기가 어렵도다.
옳lL畢竟二不別 如是二心前心難
3) 철각지의 천태적 이해(뿔意三陳)
천태선사의 각의삼매는 우리들의 현실경험의 장언 식(識)의 참모습이 바로 불성이며 마음 바탕을 되살피어 머뭄없음을 아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고 하였다(識之實際是正因佛性 反照,心源 nT因也) 그러므로 인식주체(意根)를 살피어 자성이 없는 줄깨쳐 알면(생활意) 주-객의상호운동속에서 움직임 없는 삼매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천태선사는 철각지를 식의 참모습을 반조하여 해탈을 성취해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여섯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들음을 인한 철각지(因聞七뿔) 둘째, 딱음을 인한 철각지(修行七覺) 세째, 진여에 계합된 철각지(會理七覺:空) 넷째, 방편을 일으키는 철각지(起方便七覺:假)다섯째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철각지(入法門七覺:中) 여섯째, 궁극적으로 원만한 철각지(圓極七覺:妙覺)이다. 들음을 인한 철각지란 선지식의 설법을 듣고 철각지를 얻음을 말한다. 곧 의식-존재로 주어지는 온갖 것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는데 평소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것을 알지 못하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고 존재일반의 실재의식에서 해방힘어 마음의 휴식을 얻고 철각지를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비록 온갖 것과 모든 삼매가 공하여 나고 멸함이 없다고 이해하였지만 허위의식이 계속 일어나 그 생각에 휩쓸릴 때 철각지로 수행하여 온갖 것이 본래 나고 멸함이 없음을 확실하게 깨치는 것, 이것을 닦음으로 인한 철각지라 한다.
위의 두 가지 인연으로 존재일반의 참모습을 깨치게 되면 진여(륨如)와 같아지게 된다. 그러나 진여는 곧 진여라는 독자적인 명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철각지의 실천행 자체이므로 진여에도 머물지 않게 되면 이것이 세번째 진여에 계합된 철각지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진여에도 머물지 않아야 뭇삶들을 보살피고 건져내는 끝없는 실천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니 그러한 실천을 일으키되 그 실천행 자체에 머뭄이 없고 행함이 없게 되면 이것을 방편을 일으키는 철각지라고 한다.
다시 위와 같이 진여와 같아지되 진여에 머물지 않고 끝없는 행을 일으키되 그 행에도 머물지 않으면 존재의 참모습에 깨쳐 들어가 모든 삼매를 얻되 삼매의 모습도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연히 삶의 과정 속에서 완성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니(自然流入十住十行十向十地及等覺淸짧輝中) 이것을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철각지라 한다.
궁극적으로 원만한 철각지란 위없는 묘각때생활)을 말하며 배옴이 끊어진 철각지(無좋七覺)를 말한다. 곧 그것은 중도관을 성취하고 보면 삶의 모든 과정이 결국 깨달음의 전체적인 발현이며 역사의 다양성이 통일속의 다양성임을 나타내고 있다.
천태선사에 의한 이러한 철각지의 해석이 겉으로 보면 여섯 가지 상이한 단계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철각지의 여섯 가지 구분은 점차적인 과정을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처음 들음과 수행은 째달음
“ 중도관을 성취하고 보면
삶의 모든 과정이 결국
깨달음의 전체적인 발현이며 ”
을 얻도록 하는 방편에 해당되지만 다음의 진여, 방편을 일으컴, 법문에 들어감이란 공관, 가관, 중도관의다른 표현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다시 공관속에 이미 가관 중도관이었고(質如非質如) 가관속에도 공관 중도관이 함께 있으며(無住無行) 중도관 속에도 공판 가판이 같이 있다면(雙照二諸) 천태의 철각지 해석은 선정의 연기척인 모습을 바로 드러내 보인 교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도 보살이 흔재의 참모습을 깨쳐 바른 마음에 머무르게 될 그때 불타와 다륨없는 공덕을 얻어(若能훈起홈提心 則能動修佛功德) 쉬임없는 실천의 길에 들어서게 됨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若能動修佛功德 則得生在如來家若得生在如來家 則善修行巧方便보살이 바른 마음에 머물러서
불타의 공덕 부지런히 닦게 되면 곧 바로 여래의 집에 태어남이네생사 없는 여래의 집에 태어나면 세상 위해 묘한 방편 널리 행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