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맞이한 부처님 오신날분명 봉축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팬지 모르게 우울해지는 요즈음의 기분은 잔뜩 찌푸리고 있는 하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는 기본 생존권 보장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고 사회의 제방에서는 그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크고 낮은 목소리로 사회의 민주화와 정의 실현을 외치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침묵만 지켜왔던 불교계가 부처님오신 날이라고 해서 높은 목소리로 부처님 찬양만 한다면 그야 말로 반역사적 행위의 표본이 되고도 담을 만한 수치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차제에 불교는 한국사회속에서 자기 몫을 하지 못한 과오를 준엄히 반성하고 부처님 오신 참 뭇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역사 사회 속에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오신 참 뭇은, 고통 받는 중생을 그 고통의 현장인 역사 사회 속에서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게 하고 참 생명의 해방을 성취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당시의 인도사회는 계급적으로는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는 사성제도가 존재하였으며 도덕적으로는 생(性)의 문란과 향락적 문화가 만연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크고 작은 국가가 통폐합되는 하청으로서 국가간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러한 역사현실 상황에서 부처님께서는 계급현실에 대해서는 잘못된 사회질서인 사성계급의 혁파를 주장하셨고 문화현실에 대해서는 감각적이고 지말 적인 향락적 가치를 버리고 진리를 향하는 참된 가치에 의지하기를 갈파하셨으며 청치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함께 잘 살수 있는 명화적 화합을 주장하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참 생명의 해방을 위해서는 현실척인 고통-역사사회속에서의 구조적인 문제까지도-을 벗어나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시면서 보여 주셨다. 그럼 현대사회에 있어서 참 생명의 해방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잘못된 체제로 인하여 파생된 계급문제, 여기에서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기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어 계급간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개방사회인 자본주의 체제는 소비를 미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중전달매체의 발달로 인한 대중조작이 가능해져서 이로 말미암은 소비 향락적 문화의 폐해는 비로소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무리\' 로 전락하게 한다.
다음으로 국가간의 정치적인 문제는 총칼을 사용하는 전쟁의 형태가 아니다 뿔이지 전쟁 아닌 전쟁은 처절하리 만큼 치열하다. 자국(自固)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는 수탈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공존 이라는 말은 허울 좋은 넋두리일 뿔이다. 그러므로 동지(自固民)가 아니면 모두가 적(他圖民)이다. 이럴 진대 지금의 사회적 상황이 부처님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히려 부처님 당시의 상황보다도 더욱 열악한 상태이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공해문제, 온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탄두 등 문제의 심각성은 그 극에 달하고 있다. 온산공업단지의 괴질병 발생과 소련의 원자력공장 폭발사고는 그 단적인 예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 오신 참 뭇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참 생명의 해방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의 혁파인 것이다. 사회적인 정의를 구현할 때 현실적인 고통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고통의 현장에서의 실천행이 없이는 불가농한 일이다. 자! 여래의 사도 (使徒)여 길을 떠나자, 고통의 현장으로. 그리하여 그 모든 현실적인 고통을 물리치는 용기 있는 보살행의 실천, 이것만이 부처님이 오신 참 뜻을 오늘에 되살리는 판건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맞을 부처님 오신날은 불교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현실척 고통을 함께 벗어나려는 도반으로서의 모든 중생들의 대축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