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에게 주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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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04월 98호
버스정류장에는 선재보다 나이가 서너 살쯤 아래로 보이는 대학생들 말고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댓 명이나 더 있었다. 장을 보고 돌아가는 시골사람들이었다. 장을 본 짐들을 손에 들고 있거나 머리에 이고 있었다.
“절까지 얼마나 됩니까 ? ”
“8킬로쯤 되지요. ”
열차 안에서부터 선재에게 자꾸 길을 물어왔던 여학생이 또 물어왔다. 서울에서 줄곧 시달려 왔다고는 하지만 여학생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쌍봉사, 참 좋은 절이지요. ”
“그 절 잘 아세요 ? ”
“하룻밤 잔 적도 있는 걸요 ”
“볼 게 뭐가 있어요 ? ”
“글쎄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탑처럼 생긴 대웅전도 특이하고, 절을 창건했다는 철감국사의 탑이나 탑비도 국보 문화재이지요. 저도 그 탑을 보러 가는 길이지요 ”
“정말이세요? ”
“그럼요, 옛날에는 굉장히 우람했던 거찰이었음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지요. ”
삼십 분쯤 기다렸을까. 버스가 털털거리며, 그래도 의기양양하게 달려왔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버스가 도착한 순간부터 운전수와 장꾼들이 실랑이를 벌였다.
“이봐요 돼지새끼는 태울 수 없소. 이 버스가 뭐 용달차인 줄 아시오? 안돼요, 안돼.”
“기사 양반 그 럴게 뭐 있소. 같이 좀 탑시다.”
그러자 돼지 새끼를 안고 있는 장꾼과 한 마을 사람인 듯 싶은 장꾼이 나섰다.
“타고 갈 수 있는 차는 이 버스 뿐이니까 좀 태워달라고 사정하는 것 아니오? 좀 태워주지 뭘 그래요.”
“글쎄 안된다니까요. 짐승 태워가지고 재수 본 날 없으니 내 사정 좀 봐주라 이겁니다.”
그러나 돼지 새끼를 안고 있는 장꾼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딧소? 당신 기분대로 세상 사는 거 아니란 말이요. 정 그렇다면 지서에 가서 이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따져봅시다. 내가 공짜로 태워달라고 그랬소? 돈 내고 태우겠다는데 왜 그러느냔 말이요. 돼지 새끼 태우는 값도 달라면 애기들 차비처럼 반값쳐서 내겠단 말이오.”
그제야 운전수의 기세가 살그머니 수그러들었다.
지서로 가서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말에 기가 꺽인 듯 하였다. 비로소 버스가 움직였다. 화가 치민듯 심하게 한번 짜증을 내듯 움찔하 더니 슬슬 달리기 시작하였다.
선재는 장문들 뒤에 서 있던 바람에 자리에 앉지 못하고 말았다. 장꾼들은 대부분 서서 가야 했다. 젊은 대학생들이 재빨리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파랗게 물결치는 들판에 눈을 주었다.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선재는 유명한 절이 있고 사적지가 있는 이곳의 길이 아직도 비포장도로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문명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이곳의 현실이 유배지의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였다.
버스는 앞뒤로만 뛰는게 아니라 좌우로도 휩쓸려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벌어먹을 ! ”
어느새 차창 밖에는 낭떠러지 아래로 시퍼런 저수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버스가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아서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나 여행온 대학생들은 마냥 들떠 있었다.
“야, 저것봐라 굉장한데.”
모두들 저수지 위를 나는 한무리의 새떼를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그런데 버스가 막 저수지를 벗어나 산모퉁이를 돌아설 무렵이었다. 버스가 크게 흔들리면서 염소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장꾼들 중에 염소를 몰래 데리고 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울음소리는 분명 돼지 새끼의 그것이 아니라 염소의 울음이었다. 잠시 후에는 여학생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염소 한마리가 차 안에서 껑충거리고 있었다. 염소가 뿔을 들이밀면서 도전적인 자세를 취할 때마다 학생들이 놀라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뒷자리를 버리고 운전수 쪽으로 도망쳤다. 운전수가 분통을 터뜨렸다.“정말 이럴 겁니까 ? 돼지 새끼에다 염소까지 ! ”당장에 운전대를 내팽개칠 것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장꾼들은 누구 한사람 대꾸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생들이 내준 뒷자리에 앉아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쌍봉사의 부처님처럼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선재도 염소 덕분에 어느 노인 옆에 가서 앉았다. 노인은 방금의 희비극을 연출한 장본인이었다. 노인은 그 염소를 두 팔로 껴안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위압적으로 날뛰던 그 염소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노인의 품에서는 온순했다.
문득, 선재는 국민학교 3학년 때 길렀던 염소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식구들의 건강을 위해서
젖짜는 염소를 친척한테서 빌려왔던 것이다. 선재는 저녁때마다 염소를 들판으로 몰고 나가 풀을 뜯기곤 하였었다. 그러면 염소는 다음날 아침 하얀 젖을 사발로 한 그릇씩 식구들에게 선사하곤 하였던 것이다.
“염소를 길러보실 계획인 모양이죠 ? ”
“이놈은 젖 짜는 염소가 아니오. 집에 있는 놈이 요즘 너무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그놈 시집 보내주려고 데리고 가는 거요”
새끼를 보기 위해서 숫염소를 사가지고 간다는 말이었다.
“절 마을에 사시는가요? ”
“아니 산속에서 내 염소식구들하고 더불어 살고 있소 ”
“식구분은요. ”
“모두 서울에 있소. ”
그러고 보니 노인의 얼굴에는 어떤 기품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거칠어 보이지만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선재의 예상은 틀림없었다. 버스가 절 앞에 도착했을 때 선재는 노인으로부터 좀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인은 전직 철학교수였다. 자신의 무소유 사상을 스스로 실천에 옮기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을 잊기 위해서 산속으로 도피해 와 있는 은둔자는 아니었다.
“내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나무와 새들이 내게 말을 해주지요. 그래서 이런 생활이 지겹지 않은 거요. 어떤 날은 떠가는 구름하고도 말을 트지요. ”
선재는 노인과 혜어지면서 뭔가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땐가 다시 만나고 싶어 노인의 주소를 물었다.
“편지라도 올리고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 구릅을 보시오. 머물지 않기 때문에 저 넓은 허공이 다 구름의 집이 되는 것 아니겠소 ? ”
“나그네에게 주소가 어디 있겠소.”
선재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그네에게는 주소가 있을 리 없었다. 선재는 노인에게 그냥 꾸벅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노인과 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