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윤회와 중생의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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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04월 98호
인간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햄릿형이고 다른 하나는 돈키호테형이다. 사고하는 형과 행동하는 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속박과 해탈이 있을 따름이다. 속박을 원하는 형은 좀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자요, 해탈을 원하는 형은 남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여성적 성격이 모두 속박과 복종을 좋아하는 게 아니요, 남성적 성격이 무조건 해탈과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다. 여성적 성격을 메조키즘에 넣는다고 한다면 남성적 성격을 새디즘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렇게 본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네나 보살님네는 보다 여성적이요, 우리네 범부 중생들은 남성적이라고 본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그러기에 불보살이나 조사님네는 중생이 욕망의 사슬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고뇌를 대신 받고 사바세계로 뛰어들고, 범부 중생들은 어떻게든 그러한 욕망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대자유, 대해탈의 경지인 불보살의 세계를 갈망하고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불타나 그리스도, 보살님네가 이 땅에 온 것 자체가 자비심 때문이다. 그 자비심으로 인해 윤회하는 것이다. 중생들처럼 업연에 의해 윤회한다. 업연이란 욕망으로 연결된 고리만
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비심 바로 그 자체가 업이다. 이를테면 자비업(慧悲業)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욕망으로 연결된 고리로 인해 윤회하므로 욕망의 업연이다.
따라서 불보살이나 중생이나 모두 윤회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불보살님네는 자비의 업연 때문에 도저히 이 사바세계에 오지 않을 수 없고, 중생들은 욕망의 업연에 의해 이 고해에서 끌려다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윤회에는 능동적인 것과 피동적인 것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성자들이 윤회하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내어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고, 중생들이 윤회하는 것은 스스로의 욕망에 끄달려 피동적으로 윤회를 받는 것이다.
윤회는 시간과 공간을 전제로 하여 순간순간 이루어진다. 대체적으로 윤회라 하면 한 생애가 끝나고, 죽음을 맞이한 뒤에 태어나는 현상을 윤회니 전생(轉生)이니 하지만 그것은 일기윤회(一期輪廻)일 뿐이다. 사실 불보살이나 중생들이나 각자 겪는 윤회는 매순간 매 찰나마다 있다. 다시 말해서 순간의 영속이 바로 장구한 시간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늙음이나 죽음과 같다. 늙음이란 장년을 거쳐야만 시작되는 게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찰나찰나에 늙어가는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시작에서 그 종말까지 순간순간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시간이 멈추지 않듯 늙어감과 죽어감도 항구적이다.
그러면 무엇이 윤회하는가? 육안으로서도 분명히 볼 수 있는 육체인가. 아니면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본래면목인가. 육체는 본디 지수화풍의 유한적인 것으로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본처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육체가 윤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정신)이 윤회하는가. 마음이 윤회한다면 마음은 뭔가 잡힐 것이 있어야 한다. 만약 잡힐 것이 없다면 그것은 윤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회의 주체는 어떠한 틀을 지녀야 할 것이며 또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 속에서 활동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순간적 윤회든 일기적 윤회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윤회한다는 것은 거기에 시간적으로 전환하는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요, 공간적으로 존재해야 할 위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란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는 게 아니다.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윤회는 긍정할 수가 없다. 즉 육체적 윤회도 있을 수 없거니와 마음의 윤회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윤회는 없는 걸까? 육체적 정신적 윤회는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성자적 범부적 윤회는 어떻게 규명할까. 능동적 피동적 윤회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일기적 찰나적 윤회는 과연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만일 윤회가 없다면 인도의 학파 중 윤희전생을 부정하는 짜아르와 까학파처럼 방종과 안일에 젖어드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인생은 일회적인 것이니 아무렇게나 살다가 가도 괜찮다고 하는 논리가 우리네 삶에 적용될 수 있는 걸까?
반야심경에서 설한대로 오온(五縕)과 육근(六根)과 육진(六塵)과 육식(六識)과 십이인연(十二困緣)과 사제(四諸)와 팔정도(八正道)와 지혜(智慧)와 소득(所得)이 없다면 과연 무엇이 있어 윤회한다고 하겠는가?
한국불교, 특히 선종의 중홍조인 이웅존자(利雄尊者) 태고보우국사(1301∼1382)의 봉은선사(奉恩禪師)주지 설법에서 설파한 내용을 보자.
스승은 법당에 올라가 삼문(三門)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큰 도는 문이 없는데 여러 스님네는 어디로 들어가려 하는가? 쯧쯧( ). 원통문(圓通門)이 팔자(八字)로 열렸도다.”
불전(佛殿)에 이르러서는
“천 년 전에는 내가 당신이더니 2천년 뒤에는 당신이 바로 나로소이다. 아차, 거의 누설할 뻔 했는걸.”
하시고 세 번 절한 뒤에 태조전에서는
“당신은 삼한(三韓)의 할애비요, 나는 만법의 왕이외다. 옛날에는 서로 만나서 그 일을 의논했더니 지금은 우리 또다시 만나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됐소.”
하시고는 한 번 호통을 치시었다. 그리고 방장(方丈)에서는
“이 일없는 신(無事神)과 들귀신들의 굴(窟)에서 오늘에는 갑자기 우뢰소리가 땅을 흔들고 오는데, 모두 흩어지고 나면 어디로 돌아갈는지 모르겠구나.”
하시고 주장자를 들어 한 번 치신 뒤,
“사람들이 물가에서 흩어진 뒤에 모래밭 갈매기가 주인이 되어 오는구나.”
하셨다. 거실(據室)에서는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신 뒤에
“여기서는 부처가 와도 때릴 것이지만 조사가 오더라도 때릴 것이다”
하시고 또 한 번 내리치셨다.
큰 도(大道)가 문이 없는데 대중스님네는 어디로 들어가겠는가 하면서, 원통문이 팔자로 열려 있다 한 것은 바로 윤회를 초월한 도리를 긍정(許)한 것이요, 그 중간의 몇몇 착어(着語)는 윤회의 실태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맨마지막 한 구(句)는 쉽게 윤회를 얘기하고 믿어버리는 우(愚)를 범할까 염려해 모든 사념을 끊어 부정(遮)한 것이다. 윤회를 벗어난 참된 실상의 세계는 분명코 존재하나 이는 잘못 건드리면 천기누설이 된다. 이 극비의 세계는 스스로 깨달아 터득해야되는 것이다. 이미 말을 하면 실상의 모습( ? )을 그르쳐 버린다.
그렇다고 한다면 분명코 윤회는 긍정할 수 밖에 없다. 육체적 윤회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이합집산, 바로 그 자체다. 모든사물의 변화과정,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멸이 있는 게 아니라 변화해 갈 뿐이다.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습만을 달리할 따름이다. 윤회란 없는 데서 어떤 무엇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다시금 생겨나는 유무생사(有無生死)가 아니라 변역(變易)해 가는 과정을 말한 것 뿐이다. 이웅존자의 말씀대로 당신이 내가 되고 내가 당신이 됨이며, 사람이 변하여 갈매기가 되어 오는 현상이다.
정신적 윤회도 마찬가지다.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심리상태가 윤회다. 마음의 세계는 생멸을 긍정치 않는다. 마음 역시 변역만이 있을 뿐이다. 마음은 없어지거나 생겨나는 그런 현상이 아닌, 다만 바뀜이 있을 뿐이다. 역(易)의 원리가 바로 윤회인 것이다. 자연의 변화, 되풀이 되는 역사가 바로 윤회다. 부처님의 윤회는 변화의 원리를 분명히 인식하고 윤회에 뛰어들되 윤회에 걸리지 않을 뿐이요, 중생의 윤회는 변화의 원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에 그러한 변화하는 굴레 속에서 허덕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자들의 윤회는 능륜(能輪)이요, 중생들의 윤회는 소륜(所輪)이다. 굴러가는 바퀴살에 매달려 있으면 대상이 어지럽게 돌아가지만 그 바퀴살, 굴렁쇠를 조정하는 자는 편안할 것이다. 비유를 들면 자전거 바퀴살에 매달린 자가 중생이요, 그 자전거를 운전해 가는 자는 부처다.
부처는 중생이 자전거 바퀴살에 매달려 있지 말고 안장 위에 앉아 힘차게 페달을 밟으라고 가르치는 분이다.
지난 가을 일본에 갔을 때 구입해온 윤회교향악을 들으며 창문을 여니, 어느새 들비둘기가 봄을 물고 저만치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