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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반포 상신리 사지(上莘里 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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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옛 절터를 찾아서 - 이재준 1990년 04월 98호
가람(伽藍)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그래서 터를 고를 때는 신성한 곳을 택해야 했다. 전국에 있는 많은 가람터는 대부분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자리잡았다. 오랜 불교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도 가람의 유지(遺址)가 남아있으며 폐허가 됐다 해도 옛날의 영화로왔던 잔영(殘影)이 어린다. 깨진 와면(互片), 밭이랑, 인가에 방치된 석조물(石造物)이지만 옛 선인들의 혼과 지혜가 어린다. 이 편린들은 우리민족의 값진 문화유산임에도 불구, 거의가 방치상태에 있으며 소위 개발로 인해 파괴 또는 일실 위기에 있다.
이 연재물은 이같은 옛 성적(聖跡)을 보호하고, 하나의 기와조각이라도 중히 여기자는 생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답사·집필은 이미 월간 공간「(空間)」을 통해 「한국의 폐사(廢寺)」시리즈를 통해 알려진 이재준씨(韓國美術學會員. 중도일보 논설위원)가 맡는다. 애독자 諸賢의 성원을 당부드린다.
〈편집자주〉

머릿말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상신리 속칭 「신수」라는 마을에 「전구룡사지(傳九龍寺址)」가 있다. 신수마을 동구(洞口)에는 충청도문화재 제94호로 지정돼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외로이 남아있어 옛 대도량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지(寺址)에 관해서는 지역학술기관의 여러 차례에 걸친 단편적 지표조사는 실시된 바 있으나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보고 논문도 나와 있지 않다.
이 사지가 소재한 상신리 일대는 봄·여름·가을에 걸쳐 많은 관광객이 내왕하고 있는데다 특히 마을입구에 이르는 현재 진행중인 도로확장사업으로 사지 일부 유구(遺構)가 교란될 위기에 있어 이에 따른 당국의 적절한 조치가 요망되고 있다.
짧은 시간 이 지역을 답사했을 때 몇점의 막새와 명문와편(銘文互片), 여러 문양의 평와편(平瓦片)이 수습되었으며 이 사지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자료가 되겠기에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치(位置)
대전 유성온천에서 공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승용차로 약10여분간 가면 동학사로 향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그대로 공주쪽으로 2∼3분 가다보면 서편에 작은 내를 가로지른 다리가 있으며 이곳에 「청룡사」라는 작은 입간판이 있다. 이 갈림길에서 비포장도로를 약10분간 달리면 절터가 있는 상신리에 이른다. 하루 수차례씩 유성서 시내버스가 왕래하고 있으며 상신리는 종점이 된다.
사지(寺址)는 시내버스 종점이며 당간지주가 소재한 동구에서부터 상신리 마을전역에 걸친 광범위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마을 어느 골을 파도 와편(互片)이 나온다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사지(寺址)의 역사와 이름
이 절의 역사와 사명(寺名)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절이름은 「구룡사(九龍寺)」라고 하는 근거는 오래전에 「구룡(九龍)」이라는 명문(銘文)기와의 수습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필자는 아직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면 이 사지의 초창(初創)은 언제였으며 폐사(廢寺)시기는 언제 였을까. 사명(寺名)은 구룡사였을까.
조선왕조 지리서의 대종(大宗)인 여지승람(麗地勝覽) 공주목(公州牧) 불우조(佛宇條)에 보면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절이 대략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계룡갑사(鷄龍岬寺)·등라사(藏羅寺)·가섭암(迦葉魔)·율사(票寺) 중심사(中心寺)·동학사(東學寺)·상원사(上院寺)-
이 내용을 보면 계룡산 주변에 구룡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조선전기 이전에 폐사(廢寺)됐다면 여지승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토대로 구룡사임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 사지(寺址)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사지(寺址)에 산란(散亂)한 각종 유물이라고 하겠다.
이중에서도 당간지주는 가장 중요한 유물이다. 그러면 이 당간지주의 정립시기는 언제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학계에선 통일신라 성대(盛代)∼고려초기의 소작(所作)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절터에서 수습되는 와편(互片)도 대략 통일신라 성대(盛代)∼고려말(末)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지(寺址)의 역사는 통일신라 성대(盛代)에 창건됐다. 고려말에 법등(法燈)이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지승람에 나타나지 않는 「九龍」명(銘)은 주목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이곳 법당지(法堂址) 주변에서 「거광(居光)」명(銘)(도판①) 평기와편을 수습했다. 이 명문(銘文)은 앞으로 연구할 자료라 할 것이다. 필자는 최근 공주교대 유원재(兪元載) 박물관장으로부터 이곳에서 백제기와편(片)이 찾아졌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이 가람터의 초창(初創)시기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지역이 갖은 입지적 여건-유성은 백제의 내사지현(內斯只縣)-으로 봐서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 주요 건물지 주변에서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片) 등은 수습되지 않았다.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이후 고토에 많은 가람을 조영했다. 그것은 백제유민을 위무하기 위함이었고 불교를 통해 민족의 화합을 꾀하려했던 것이다. 당시 신라의 귀족계급은 기왕의 백제 가람이나 사적(史蹟)에 대대적인 불사를 한 경우도 있다. 상신리 전구룡사지도 이 시대 유무의 수단으로 이뤄진 가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에서 나온 도판②의 평기와편은 신라인들이 통일직후 진주했던 서원경 성지(城地)-청주시 명암동 상당산성(上堂山城)-주변에서 수습한 기와와 비슷한 동질의 것으로서 주목이 되고 있다. 태토(胎土)는 거칠고 모래가 많이 섞인 경질(硬質)이긴 하나 세장(細長)한 수지문(樹技文)과 색깔이 통일신라초기의 작으로 보여진다.

가람배치
이 사지(寺址)는 계룡산 연봉(連峰)을 남망(南望)하며 동으로 가마봉, 북쪽으로는 느랭이 산을 뒤로 한 분지에 자리잡았다. 남쪽 대지(臺地) 아래로는 계룡산 맑은 계류(溪流)가 흐르고 있어 그윽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이 사지(寺址)의 가장 중요한 법당지(法堂地)는 이 마을 이영구씨집 주변 경작지(耕作地)로 추정되고 있으며 동네사람들은 이곳을 속칭 「법당골」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씨집 일체와 사랑채(古家)의 기단과 주초석(柱礎石)이 거의 사지에 유존(遺存)했던 잘 다듬어진 장대석(長大石), 계단석 등을 이용하고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법당지(法堂地)주변 밭에는 덜벙주초석(柱礎石)이 산재해 있으며 이곳에서 많은 통일신라 고려계의 평기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법당지 주변에 회랑지(回廊址)로 보이는 건물지가 있어 제대로 격식을 갖춘 가람배치가 아니었나 짐작이 된다. 법당지의 넓이로 보아 이곳에 중문(中門)과 금당(金堂)·강당(講堂)이 남지(南地)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치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법당지에서 서쪽으로 약 2백m지점 구릉에 이감봉씨(62)소유 밭이 있으며 주민들은 이곳을 「부도골」이라고 부른다. 이 일대에 남아 있는 주초석, 장대석 왼편으로 미루어 부도전지(浮屠殿址)가 아닌가 추정된다. 이 쇠집에는 부도탑재로 보이는 팔각의 탑신석(塔身石)이 절구통으로 개조돼 사용되고 있어 이 사지(寺址)의 파괴도와 주민들의 무지(無知)를 실감시켜준다.
이 사지(寺址)의 부속건물지는 당간지주 주변과 학봉분교 주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으며 지금도 기와조각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다. 민가가 거의 자리잡고 있어 일부지역을 제외하곤 발굴이 어렵게 됐다.
사지의 남쪽 개울건너 산허리를 주민 최영조씨(58. 농업)는 옛부터 「북다라매」라고 불렸다고 얘기했다. 즉 이곳에서 북을 치면 전 사암이 모두 알았다는 것이다. 종각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각종유물
이 사지(寺址)는 파괴도가 심해 현재 석조 유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간지주(충남 문화재 제94호)는 한쪽 지주가 상실됐으며 원형의 간좌(竿座), 지주(支柱)외면의 일반형식인 홈이 파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盛代)∼고려초기의 소작(所作)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널리 소개돼(더이상 언급않기로 함) 이곳에서는 2点의 암막새기와(도판③④)와 다수의 재미 있는 평기와편이 수습됐다.
두점의 막새는 모두 고려시대의 것으로 태조(太彫)의 당초문(唐草紋)이 두드러짐을 보이고 있다. 도판③은 학봉분교 옆 건물지 주변에서 수습된 것으로 반쪽은 경실됐으나 왼쪽부분은 잘 남아있어 전체를 파악활 수있게 해 준다. 왼쪽 끝에 보이는 굵고 날카로운 인동문(忍冬文)이 인상적이며 태토(胎土)는 거칠고 회흑색이다. 현폭(現幅)15m 천지폭(天地幅)7m 후(厚)3.2m
도판④의 암막새는 법당지(法堂址)앞 중문지(中門址)로 추정되는 곳에서 수습한 것으로 도판③의 막새보다는 시대가 조금은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당초문(唐草紋)은 비록 태조(太彫)이긴 하나 도판③보다는 가늘며 천지부(天也部)의 주련(周緣)이 확연하다. 그러나 연주문(聯珠文)은 보이지 않는다. 현폭(現幅)16. 5m, 천지부폭(天地部幅)6. 5m 주련폭(周緣幅)0. 7cm, 후(厚)2∼2.5cm
도판⑤⑥⑦의 기와는 평와에 연화문을 양각(陽刻)시킨 것으로 고려시대 다양한 평와(平瓦)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중 도판⑦은 길고 세장(細長)한 연꽃과 자방(子房)이 눈에 띄며 연화문을 굳이 막새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도판⑧의 평기와에는 중판의 원문과 기하무늬를 양각한 것으로서 당시 자유스런 와장(互匠)들의 여기(餘技)를 이해할 수 있다.

맺는말
이 사지(寺址)는 공주가 가까운 백제의 고토 (노사지현(奴斯只縣),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에 세워진 통일신라 성대(盛代)∼고려후기 시대의 대가람으로서 조선초 억불숭유책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주변에서 수습되는 불에 그을린 기와는 당시 사찰이 불타는 변을 당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라고 하겠다.
이 사지 고토에서 수습되는 각종 와편(瓦片), 막새로 보아 당시의 가람은 웅려장엄(雄麗壯嚴)했을 것이며 중문(中門) 금당(金堂) 강당(講堂)과 회랑(回廊)올 갖춘 대도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명(寺名)을 「구룡사(九龍寺)」라고 단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며 앞으로 보다 확대된 조사와 발굴조사 등을 통해 규명해야 할 것이다.
전구룡사지(傳九龍寺址)는 대전(大田) 근교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적(史蹟)이다. 한창 번성했을 때는 갑사(甲寺)와 동학사보다도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지(寺址)에 매몰된 법당지(法當址), 부도(浮屠殿地) 등은 파괴위기에 있어 긴급발굴과 보호조치가 절실하며 더 이상의 유구(遺構) 교필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쪼록 이 성적(聖跡)이 다시 복건(復建)돼, 향화(香火)가 올려서기를 기대하는 마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