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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비유품(譬喩品) 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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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0년 04월 98호
ㄱ. 불타는 집
방편품에서 설해진 개권현실에 의해, 지금껏 불교 안에 있었던 여러 다른 주장들이 하나의 일승으로 바뀌는 모습을 우리들은 지켜보아 왔다. 그것은 실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어서, 그동안 설해오신 온갖 가르침이 기실은 방편이었고, 그 방편이 궁극적으로는 진실로 돌아가고 말아, 방편과 진실이 다르지 않음을 밝히시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삼승의 교리에 매어오던 사람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 예상되니, 방편품의 취지를 이해한 이가 사리불(舍利佛) 하나 뿐이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에 다른 제자에게도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를 설하시니, 그것이 유명한 화택(火宅)의 비유다.
「사리불아 어느 나라 읍이나 마을 안에 큰 장자(長者)있어, 그 나이 이미 늙되 재산이 끝없어서 전지(田地)·저택·하인들이 많았다 치자. 그 집이 광대하되 오직 문은 하나러니, 많은 사람-일백·이백 내지는 오백명이 그 속에 살더니라. 집채 썩어 낡으며, 담장과 벽 무너지며, 기둥뿌리 썩으며, 디들보와 동자기둥 기울었거늘, 주위에서 일시에 문득 불이 나 이 집 태우니, 때에 장자 아들 열이나 스물, 혹은 서른 명이 집에 살더니라.」
비유는 이렇게 시작되는데, 이는 무엇을 뜻함인지 장자를 부처님의 비유로 본다면, 부처님에게는 무량한 지혜와 복덕이 있는 터이니까 「재산이 끝없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이 광대한」 것은 삼계(三界)를 집으로 삼으시는 까닭이며, 일승만이 삼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가르침이기에 「오직 문은 하나」 하셨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면 「일백·이백, 내지는 오백명이 그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것도 없이 큰 부호이므로 권속도 많았을 것이니, 그 수효는 백명이라 해도 좋고 이백명·삼백명·사백명·오백명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태대사는 일백을 「첫째의 백명」, 이백을 「둘째의 백명」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백」은 많음을 이른다고 보았으므로, 결국 다섯 가지의 많은 부류인 오도(五道)의 중생이 그 집(삼계)에 있었음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문면으로 보아서는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문구 하나하나를 마음 속에 갖추어진 실상의 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가는(觀心釋) 입장에 설 때에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오도」는 육도(六道)의 뜻이니, 아수라를 다른 다섯 세계에 섞여 사는 것으로 보았을 때에 성립하는 것이 오도인 까닭이다.
그러고 「집채 썩어. 낡으며, 담장과 벽 무너지며」 따위에 대해서도 천태대사의 해석은 자세하나, 요컨대 삼계(집)가 무상의 법칙 밑에 놓여서 항상 불안하다는 뜻이겠는데, 거기서 「문득 불이 나 이 집을 태운다」고 한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불이란 무엇인가. 불은 이 비유의 중요한 테마중의 하나이므로 뒤에서 항목을 바꾸어 자세히 언급하겠으나, 한 마디로 말하면 생사의 고(苦)다. 곧 부처님의 눈에는 생사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진상으로 비치신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는 「장자의 아들들 열이나 스물, 혹은 서른 명이」살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부처님(장자)의 아들이라고 규정된 점에서 볼 때 불법과 깊이 관련된 사람들일 것이 뻔하다. 그리하여 앞의 「일백·이백」의 경우처럼, 이를 「첫째 종류의 아들, 둘째·세째의 아들」로 받아들이면, 열명의 아들이란 보살이요, 둘째·세째의 열명의 아들이란 연각과 생문이어서, 곧 삼승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을 화택의 비유의 서론에 해당한다 하여 총비(總譬)라 하는바, 결국 무엇을 말함인가. 삼계(집)에는 오도의 중생들이 있어서 생심의 고(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를 구하기 위해 부처님(장자)이 출현하사, 먼저 방편의 삼승(서른의 아들)으로 교화하시다가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일승(하나의 문)뿐임을 밝히시니, 삼승도 일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승에서 베풀어진 방편이었던 터이므로, 부처님의 참뜻을 알고 보면 삼승이 곧 일승이어서 진실과 방편이 하나라는 것, 이것이 앞의 총비가 시사하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말씀이 간략하여 그런 취지가 충분히는 드러나지 못한 것 뿐이나 그러기에 뒤이어 자세한 비유가 설해지게 되니, 이를 별비(別譬)라 한다.


ㄴ. 불이란 무엇인가
앞에서는 말했듯 생사의 고가 불의 정체거니와, 그것이 「일시에 문득」일어났다 한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일시」라는 말은 그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됨을 시사한다. 옥석구분이라는 말처럼 불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나 태우듯, 생사는 현명한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무릇 생존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따르는 괴로움이니, 이것이 「일시에」의 뜻이다. 그리고 「문득」이라는 말은, 그것이 본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서슬에 갑자기 있게 되었음을(體無今有) 나타낸다. 그러면 무엇이 생사의 고를 있게 만든 원인인가. 십이 인연의 무명이 바로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사념처(四念處)에서 거론하는 네 가지 전도된 생각, 곧 무상한 생존을 영원하다(常) 생각하고, 고인 그것을 낙(樂)이라 생각하고, 무아인 것을 아(我)라 생각하고, 청정치 못한 것을 청정(淨)하다 여김이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를 불길에 비유한 이것과 흡사한 설법이 아함경에 있으므로, 그것에 의거해 생각해 보자.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타고 있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먼저 이런 사실을 너희들은 알아야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니들이여. 눈(眼)이 타고 있다. 그 대상(色)을 향해 타고 있다. 귀(耳)도 타고 있다. 그 대상(聲)을 향해 타고 있다. 코(鼻)도 타고 있다. 그 대상(香)을 향해 타고 있다. 혀(舌)도 타고 있다. 그 대상(味)을 향해 타고 있다. 피부(身)도 타고 있다. 그 대상(觸)을 향해 타고 있다. 마음(意)도 타고 있다. 그 대상(法)을 향해 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에 말미암아 타고 있는 것이랴. 탐욕의 불길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길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길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불교의 존재론에 해당하는 것이 여기에 나온 육근·육경이다. 연기의 도리에 서서 우리 자신을 문제삼을 때, 우리들의 생존은 시각·청각 따위 주관 쪽의 여섯 기능과, 형상·음향 따위 객관 측의 여섯 가지 대상이 결합되는 것에 의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 존재론의 요지니, 이것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설사 광대무변한 우주가 나와는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단정한다 하더라도, 이것 또한 주관 쪽의 생각일 것이 뻔하므로, 육근과 육경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못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육근·육경의 결합을 단순히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苦)로서 존재함을 뜻한다는 것이 「눈·귀 따위가 각각 그 대상과 함께 불타고 있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요, 덧붙여서 그것이 탐·진·치의 삼독 때문에 탄다고 밝히셨으므로, 이는 바로 사제 중의 고제·집제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주의할 것을 이것이 인생에 고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두가 고뿐임을 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인생에는 고만이 아니라 낙(樂)도 있음이 엄연한 사실인터에, 왜 그렇게나 염세적으로 세상을 보느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낙이라는 것도 범부의 착각이어서 낙에 대한 집착이 다시 고에 우리를 얽어매는 점에서 볼 때, 낙 또한 고의 한 양상인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인생을 완전한 절망이 아니겠느냐는 항의가 나올 만하지만 불교에서 보기에는 이런 절망은 필요불가결 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지지 않는 한, 참된 의미에서의 종교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살만하다 할 때, 우리의 현상황으로도 그럭저럭 생존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할 때, 그런 처지에서라면 무엇 때문에 종교를 필요로 하겠는가. 부처님께서 남들의 부러워할 만한 좋은 조건에 태어나셨으면서도, 감연히 그것 모두를 서슴없이 포기하신 것이 생에 대한 절망 때문이셨던 것처럼, 이 절망을 누구나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할 관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무지 탓에 절망하지 않는다 할 때, 그것이야말로 가장 절망적 상황인 것이니, 필요한 것은 절망에 좌절하지 않는 용기와 슬기일 것이다. 그러면 이 비유에서는 절망 속에 있는 중생에게 부처님이 어떤 손길을 뻗으셨는지, 그것을 다음의 별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