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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의 기능화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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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3년 11월 141호
대중 속으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쿠루소의 소 치는 마을에 머무르실 때였다.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연기법은 세존께서 지으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거나 말거나 그것은 법의 세계로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안다.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을 위해 분별하고, 연설하고, 개발하고, 현시한다.
말하건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무정과 관계된 행위에서 큰 괴로움이 쌓인다. 무명이 소멸하면 무명에 관계된 행위도 소멸한다. 그리하여 큰 괴로움의 쌓임도 소멸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비구들은 기쁘게 받아 지녔다.
「잡아함 제 299경」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세계의 진리를 깨치신 뒤에 그 깨달음의 내용을 중생에게 전할 것인지 아니면 법열을 간직한 채 그대로 무여열반에 드실 것인 지로 갈등을 겪으신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이다. 결국 부처님은 오랜 수행 끝에 얻으신 정법을 저자거리에서 중생에게 들려주어 삶의 무게에 짓눌린 많은 사람에게 빛을 주셨다. 무명으로 큰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위해 진리의 길을 열으신 것이다. 성도 이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그들의 근기에 따라 때로는 직접적으로 정법을 설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비유를 들어 우회적인 교화를 하셨다. 그러나 그 본질에서는 ‘정법’의 근간을 벗어나지 않았다. 방편을 사용하시되 내용을 희석시키지 않았다. 자칫 방편을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오히려 대중의 무명을 더욱 짙게 할까 우려하였다. 하여 제자들에게 포교의 길을 따나라 하시면 서도 반드시 계율에 의하고 정법을 올바르게 전하라고 당부하였다. 출가사문의 사명은 무명에 빠진 대중의 의식이 세계의 본질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바로 알게끔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대중의 의식은 사회 발전에 따라 점차적으로 상응하여 발전한다. 기본적으로는 사회의 생산력이 높아지면 인식도 따라가지만 때로는 의식이 사회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런 상관관계 속에서 의식은 어쩔 수 없이 사회가 주는 그릇된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실재하지도 않는 관념의 세계에서 허둥대다가 혹은 인간의 참 일을 못 찾고 눈앞의 허상만을 좇는다던가 하는 ‘무명’의 늪에 허덕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길을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출가사문의 사명은 오염된 대중의 의식을 진리의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다. ‘대중 속으로’ 포교의 길을 떠나라고 이르신 부처님의 교시는 대중에 물들지 말고 그들의 물든 의식을 감로甘露로 세척하려는 뜻이다.

포교의 시대를 맞아
80년대 들어 한국불교의 눈에 띄는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포교의 활성화라는 점에서 모두 공감한다.
구태의연한 종단의 분규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내홍을 겪으면서도 뜻 있는 소장 승려들의 포교원 개설은 80년대의 혹독한 정서를 굳건히 헤쳐 나가며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망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곳곳에서 우리는 전법도량의 일선에 있는 포교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몇몇은 큰 사찰의 후원을 업고 개설한 포교원도 있지만 대부분 오직 전법의 사명 의식만으로 홀홀 단신으로 대중 속에서 부처님 말씀을 훌륭히 전하고 있다.
더욱이 불교방송이 개국되면서 포교 활성화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포교원이라는 공간을 통한 포교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장르를 통해 개인적 포교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표현 그대로 ‘수행의 법열’을 글로 표현하려는 문화활동이 그 대중을 이루고 있지만 최근에는 사찰의 전통 음식을 대중에게 널리 알려 현대인의 건강에 대한 일조를 비롯하여 정서적인 동화를 통해 대중이 자연스럽게 불제자가 될 수 있도록 연구하는 스님도 여러 분 있고, 심지어 신도들이 모이는 법회 장소를 찾아 직접 통기타로 반주하며 자신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서 포교 활동을 하는 승려도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을 만큼 다채로워졌다. 또 서울의 인사동에는 거의 날마다 승려의 각종 서화전을 알리는 현수막과 벽보가 어지럽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듯 다양한 포교의 방편이랄까 혹은 활동이 주는 긍정성이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문화 활동을 하는 승려들에게 이러한 지적이 집중되고 있음은 이제 더 이상 포교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되는 제반 활동에 대해 제동을 걸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이미 작년 7월 중앙승가대학보인 승가대신문의 ‘경책 마당’이 이런 형태를 신랄히 비판한 적이 있다. 승려라는 신분과 승복이라는 외형적인 호기심을 이용하여 세인들에게 ‘깜짝 스타’가 되려는 현상은 결국 교화라는 방편을 내세워 ‘승려의 기능화’ 또는 ‘직업화’ 되는 추세라고 지적하면서 ‘깨침’과 ‘교화’의 본 분사를 망각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요즘 그야말로 ‘깜짝 스타’가 된 승려를 볼 수 있다. 일반인에게 더욱 관심의 대상 인물로 ‘O’스님이 대표적인데 교계의 많은 사람은 이 스님의 수필집에 담긴 내용이 출가 수행자의 진면목을 희석시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ㄱ’출판사의 상흔에 승려의 본 분사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은 자칫 본말이 전도될 개연성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통기타 가수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승려가 들려주는 노랫말에는 속가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심지어 사랑의 갈등을 담는 내용도 있다. 개인전을 여는 승려의 서화 가운데에는 언뜻 보아도 수행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남의 모방에 가까운 작품전이 대부분이다. 가장 흔하게 접하는 승려 시인의 시 대부분은 거의 출판을 위한 시집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태로 라면 시집 한 권 못 낸 승려는 뭔가 부족해도 단단히 부족한 승려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경계의 여론도 있다.

종단적 합의로 통제되어야
우리에게는 불교문화라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이것은 민족과 함께 지난한 역사를 함께 일구어 오면서 형성된 독특하면서도 일반 정서 화된 보편성을 갖고 있다. 회화작품에서 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이지만 그 본질은 전법에 있다. 대중에게 포교의 방편으로 사용하였으나 모든 것이 정법을 대중에게 전하는 어우러짐을 띠고 있다. 결코 세속화되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신심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정법의 구현이 어설픈 대중 인기 활동으로, 속된 문화를 모방하면서 불교문화의 질마저 저하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선우도량의 도법 스님은 먼저 종단 차원에서 확고한 사상적 토대가 확립되어 있지 못한 결과라고 진단하면서, 포교를 명분으로 수행자로서 할 일과 하지 못 할 일이 분간되지 않는 지금의 풍토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도법스님은 한 걸을 더 나아가 승려의 신분으로 버젓이 일간지에 개인의 운명을 봐준다고 알리는 사람까지 강력히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기구의 설치도 주장한다. 무엇보다 포교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종단적 합의가 시급하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어쨌든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다는 긍정성에 반해 승가의 품위와 위계를 흐리는 대중스타 활동은 삼가야 마땅하다.
무명의 굴레를 벗겨 주어야 할 사문이 오히려 대중의 무명을 부채질한다면 이러한 활동이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인으로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만큼 승복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낳지 않는가 한다. 승가의 화합과 계율 정신의 선양을 위해 어설픈 대중 인기 활동보다 좀더 깊은 수행의 울림이 표현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텔레비전 방송 출연이 비록 탐나더라도 ‘쇼 무대’보다는 ‘시사토론’의 초빙자가 될 수 있도록 대중의 현실적인 고통에 동참하려는 의지가 절실히 요구된다. 종단 개혁을 위한 서명운동에는 방관자이면서 개인전이나 음반 내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사문의 본분이 아니다.
사문은 대중에게 인기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사문의 권위를 존중할 귀의처이므로 수행력을 바탕으로 한 전법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