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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 불교유적2 -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여, 다들 무위사로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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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3년 11월 141호
이태호·황호균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는 천도의식 수륙제
「신증동국여지승람」37 강진현 불우조에 따르면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한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수륙사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륙제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블록으로 환생하게 하는 재생의식으로서 적까지도 포용한 모든 전망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곧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제는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불교 의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은 극락전의 건립과 아미타삼존도, 아미타래영도 등의 벽화 제작과 조성 시기와 신앙 배경 등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극락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된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더욱이 1678년에 괘불지주가 세워지는데 이는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과 같은 난리 통에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 주는 대규모의 수륙제를 위해서는 야외 법회용 괘불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무위사에서 만든 괘불은 현재 찾을 길이 없다.
한편 ‘무위사 사적’에 따르면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위사란 사찰 이름은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태종 7년(1407)에 이미 나타나 있어 ‘무위사사적’의 엉성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임진, 병자의 양난에도 초연하게 전란을 겪지 않아 사찰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한 도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차츰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 몇 개의 전각만 남았다. 영조 15년(1739)에 해초 비구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그 무렵 무위사 주지는 극령克岺, 삼강에 수승은 설민雪敏, 서기는 찬희贊熙, 당사는 성증性憎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1934년에 극락전이 보물 제 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는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건립하는 등 여러 차례의 걸쳐 여러 보존 방법이 강구되어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수륙제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이 제격이다
자, 이제 일개 맹주에 불과하던 왕건을 도와 새 왕조를 연 선각 대사 형미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철원으로 가기 전, 팔 년 동안 몸을 담았던 그 절 집을 들어가 보자. 어쩌면 백제 스님의 혜현의 숨결이 월출산 어딘가에 배어 있을지도 모르니 눈과 귀는 물론 살갗의 땀구멍까지 열어 놓고 한발한발 다가가자.
근래에 볼품없이 지은 천왕문은 그냥 지나치자. 여기서 두리번거리면 시간 낭비다. 곧장 절 집 중심 축에 다다르면 월출산 한 봉우리의 산자락이 잘록하게 멈춘 그 곳에 주변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옴팍 지게 들어앉은 극락보전. 이미 일제 강점기에 국보 제 13호로 지정될 만큼 그 성가를 높였던 극락보전은 절의 중심 축에 놓여 있는 법당이다. 1983년 극락전 기와와 기둥들을 뜯어내는 해체 복원 불사를 하였을 때, 중앙간 종도리 장해에서 먹으로 쓴 글씨가 발견되었다. 이 명문을 통해서 1430년(세종 12)에 효령대군 등에 의해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3년 해체 작업을 할 때 마루바닥 아래에 전돌이 깔려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뒤에 전돌을 걷어 내고 나니 기둥이나 벽화에 습기가 많이 차서 부랴부랴 다시 전돌을 깔은 우습지도 않은 야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당의 기단 석축을 보니 어째 시원치 않다. 막돌로 어지럽게 쌓고 그 위에 반듯한 장대석인 갑석을 둘러서 마감한 이러한 기단은 법당의 연내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기단 주변을 발굴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것은 인연이 닿아야만 가능한 일로 아직은 기다려 볼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별스런 치장이 없는 주춧돌을 놓고 몇 백 년 묵은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과 지붕을 엮어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무위사 극락보전의 건축사적인 가치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의 양식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조선 초기 주심포 건물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건축 연대가 확실한 기준 자료라는 데에 있다. 더구나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공굴려 처지게 하여 편안함을 주는 점이라든지 지붕을 맞배 형식으로 한 것이나 공포를 여러 개 얹지 않은 주심포식 집으로 단정하고 엄숙한 맛을 지니게 하는 안목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단아한 이 법당의 기풍은 어쩌면 수륙제를 지내기 위한 정심한 배려 속에서 마련된 예배 광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나 극심한 가뭄으로 싸우다 죽거나 굶어 죽은 이들로 고을마다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을 때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려는 재생의식의 공간으로서 손색이 없게 법당 내부를 벽화로 장엄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의미가 다시금 되새겨진다. 조선 초기에 이러한 수륙제를 지내야만 한 사회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고려말과 조선 초의 잦은 왜구의 출몰과 기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데 왕건을 돕다가 궁예에게 목숨까지 잃어버린 형미스님의 망령은 수륙제를 지낸들 다른 망령들의 등살에 어디 감히 환생이나 하겠는가?

금박을 두텁게 입혀 버린 아미타 삼존불상
이제 법당에 발을 들여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글쓴이가 돌아다녔던 수많은 절 집들 가운데에 무위사의 경우처럼 법당과 불상과 후불벽화가 잘 조화된 곳은 이제껏 본 기억이 없다. 주변 산세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의 넉넉한 크기로 법당을 마련하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는데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절 집들처럼 위압감을 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 후불벽화에 그려진 대좌까지만 가리는, 그래서 예배하는 이들의 시각적 피로를 고려한 눈 높이로 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극락보전과 벽체에 그려진 벽화만이 국보로 지정된 탓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 삼존부처님에 대한 대접은 소홀하였다. 더구나 삼존불의 제작 시기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던 실정이다. 다만 벽화를 제작한 시기(성종 7년, 1476)로 내리는 것보다는 건물을 완성한 해(세종 12년, 1430)로 올려 보는 것이 순리이다. 요즘도 건물이나 기와 및 불상 조성은 동시에 하고 탱화나 단청은 몇 년 뒤에 하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이다. 물론 절 형편이 좋으면 한꺼번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청만은 건물을 완성하고 나무가 완전히 마른 뒤에 해야만 변색되거나 탈색되지 않고 오래 간다고 한다. 세종대왕릉에 세웠던 문 부인석의 조각 기법과 유산한 점을 들어 세종 연간에 제작한 부처님으로 보는 분도 있어 참고 바란다.(최완수)
나무로 만든 아미타 삼존부처님은 중앙에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고, 왼쪽에는 관음보살 상을,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을 거느리신 아미타 삼존 불상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서, 1476(성종 7년)에 제작된 후불벽화의 삼존상과 양식적 특징이 흡사하다. 그런데 이 불상을 몇 년 전에 얼굴 등의 살갗이나 의복에 한 가지로 금박을 입혀 표정이나 체온을 느낄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행위는 도피안사 철불이나 보림사 철불에서도 익히 보았던 바이지만 어찌 분금과 박금도 구별 못하는 아수라장을 연출한단 말인가.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를 번쩍거리게 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무지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노거사로 변신하여 벽화를 그린 파랑새
아미타 삼존부처님 뒤에 후불 벽에 그려진 후불벽화는 호화찬란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시대 초기의 새로운 수법이 나타난 걸작으로 국내에 남은 조선시대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후불벽화 하단에 쓰여 있는 화기에 따르면 1476년에 아산현감을 지냈던 강노지 외 수십 인이 시주해서 대선사인 해련 등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인근 고을인 성전면 성전리와 금당리 거목마을에 강노지의 후손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사실이 몇 년 전에 성춘경 씨에 의해 확인되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아미타삼존외에 여섯 나한이 등장하여 아미타불을 중앙으로 배치한 구도는 조선시대 초기에 새롭게 나타난 구도이다. 상하의 구별이 뚜렷한 2단 구도의 고려불화나 원형구도의 16세기 불화와는 달리 협시불이 본존불의 어깨까지 올라오는 과도기적인 모습이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반달모양의 옷자락과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리는 옷주름선, 오메가형으로 접혀진 통견의 착의 법은 고려 후기 단아 양식 불상의 착의 법을 계승한 것으로, 1459년과 1493년 사이에 조성된 수총사 아미타 금동 불감 불화의 주존의 착의법과 비슷하다.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 끈이 대좌 좌우로 길게 드리워진 점은 1465년의 관경 변상도의 본존불에서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 초기에 대두된 특징으로, 조선조 불상에 나타나는 독특한 의습 처리인 것을 알 수 있다. 협시보살 들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유려하고 힘있는 필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고려불화의 아미타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배치한 점은 고려 후기에 유행한 지장 신앙의 영향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붉은 색과 녹색을 주로 한 밝은 채색, 옷의 문양, 4각대좌 등의 영락장식은 1309년도의 아미타삼존도와 비교해 보면 좀더 단순해진 경향이 보이지만 여전히 화려하며 섬세하다. 단아한 형태, 밝은 채색, 구불구불한 필 선을 혼용한 옷주름선, 착의법, 장식된 대좌 등은 고려불화를 계승한 반면, 중심구도라든가 키형광배, 정상계주, 군의의 상단이나 매듭 끈 처리 등에서 조선시대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부각되어 나타난다.
극락보전 후불 벽 뒷면에 그려진 조선 초기의 수월관음벽화는 화면 전체에 관음보살이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화면의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의 주위를 물결로 표시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으로 연판과 같은 모양의 대좌 위에 서서 두 손으로 각기 정병과 버들가지를 살짝 잡고 있다. 관음보살은 넓적한 얼굴, 굵은 목, 넓은 어깨 등에서 전체적으로 강건한 남성적인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아미타불을 표시한 보관 위에서부터 흰 천을 내려쓰고 있는데 그 양쪽 자락이 어깨를 덮고 내려와 흩날리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천사의 모습을 표현한 강약의 변화 있는 묘선이 이루는 긴장감 넘치는 필치는 고려 말기의 의습 표현 양식처럼 번잡하지는 않으나 활달하며 유려함도 잃지 않았다. 흩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광배 주위의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강한 율동 감과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다. 관음이 내려다보는 인물은 수월관음도에서 등장하는 선재동자로 생각되지만 일반적인 동자의 모습이 아닌 승복을 입은 노비 구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자세와 표정은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염원이 매우 절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미타래영도는 원래 극락전의 서축 벽면에 봉안되었지만 지금은 떼어내서 새로 세운 보호 각의 유리창 안에 갇혀 있다. 이 벽화는 염불을 잘한 사람은 죽을 때나 수행이 깊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 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 화한 아미타내영도로서,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가 늘어선 독특한 배치구도를 보이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 아래위에 묘사된 구름을 배경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삼존불이 부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좌우에 각각 3보살과 그 위로 비구들을 그렸다. 고려시대 경변상도의 필선과 닮은 활달하고 구불구불한 양식이 짙게 나타나 있는 반면, 화면에 나한이 등장하는 등 세부 묘사에서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그밖에 설법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아미타여래입상도, 해수관음좌상도, 관세음보살도, 대세지보살도, 지장보살도, 비천선인도 등이 보호 각에 보관되고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한 노거사가 사십 구 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사십구일재 되는 날 주지 스님이 하도 궁금하여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는데,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상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고증해 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대선사 해련스님 등이 그렸다는 멀쩡한 화기조차도 보지를 못하고 벽화의 신묘한 그림 솜씨에 감탄이 지나쳐 신비함을 자아내려는 이들의 소행인 것을.....

대규모 수륙제를 위한 괘불 제작
법당을 나서니 정면에 연꽃 문양이 새겨진 네모난 석물이 눈에 띈다. 자세히 살펴보면 석등의 배례석으로 여겨지며 백제 불교 미술품의 맛이 난다는 이도 있어 철저한 조사가 요망된다. 또 괘불지주 한 쌍이 좌우에 놓여 있는데 좌측의 지주는 114센티미터 크기이다. 각각 위, 아래에 17센티미터의 구멍이 있고 우측 지주의 측면에 ‘康熙十七年戊午日口字生成也’라 명문 하여 1678년(숙종 4)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678년에 만든 괘불 지주는 당시 사대적인 상황으로 보아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과 같은 난리 통에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대규모의 수륙제를 거행하려고 만든 야외 법회용의 괘불을 걸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무위사에 석등 배례석과 괘불 지주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며 우리 모두 석등과 괘불이 어디로 갔는지 눈을 바로 뜨고 찾아 볼 일이다.

선풍은 끊기고 개발 바람만이 휑하게 부는 절집
선각 대사 형미스님의 말로처럼 황량하게 변해 버린 절 집을 나서면서 능력 있는 주지 스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천 년을 이어온 절 집이 하루아침에 흉악한 몰골로 변해 버리는 현실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주지 임기제의 폐해가 절 집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지 이미 오래다. 눈에 보이는 실적 쌓기에만 바쁜 나머지 그 이름도 오묘한 복짓는 불사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정녕 초발심 때를 잊으셨는지요.

이태호 선생님은 전남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황호균 선생님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