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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와 출판문화-194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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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인수 1990년 04월 98호
들어가는 말
우리들이 어디에서나 만나는 것은 항상 “심리(心理)와 물리(物理)”이다. 이 마음의 ‘理”와 물질의 ‘理”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서장(序章)으로 있는 눈앞의 실재(寶在)이다.
물리와 심리는 각각 분리되면서 통합하고 또 통합에서 둘로 분리되는 오묘한 원질(原質)의 화음이다. 허황한 심리서 이론이 창출되어 물리를 알 수 있도록 하며 견고하고 굳은 물리를 통해서 심리에 접근해 나가는 그래서 “物”과 “心”으로 갈갈이 찢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황홀하게 피어나는 우주적 무도(舞蹈)가 바로“物心”이 갖는 “理”이다. 이 “物”의 “理”와 “心”의 “理”가 과연 하나인가, 아니면 둘인가.
그것은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둘로 나타나고 둘이면서 하나로 나타나는 오묘한 원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F·카프라 같은 사람은 “물질은 마음의 패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전물리학은 “物理”를 알기 위해 “物”속으로 들어가 많은 것들을 건져 올렸다.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건져올린 물리학의 수확이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고전물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피어난 현대물리학은 고전물리학을 파기하면서 춤추는 물리의 세계를 새롭게 밝혀 나가고 있다.
물리학 역시 心속으로 들어가 心理를 알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서 정신분석에까지 이르러 있다. 이와 같은 물리와 심리를 싸고 일어난 인류의 많은 업적들이 지적전통으로서 출판을 통해 오늘에 전승(傳承)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출판이라고 하는 인류의 지적전통의 축적기능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인류에게 출판이라고 하는 지적전통과 축적기능이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전승되어 오늘에 승계될 것인가.

한국불교와 문화창조 능력
불교는 요즈음 194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5년간의 위상을 검증하는 작업에 접근하므로써 문체를 합리적으로 추출해 내고 또 제기된 그 문제를 합리적인 방안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 45년 동안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얼마나 명확히 추출해 보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이 궁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고 해결방안을 창출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색으로서의 확실한 과정이 축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문화창조능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에 대하여 반박하지 못하고 있는 점 또한 사실이다.
문제의 추출능력과 문제해결을 위한 방안(方案)모색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곳에서 과연 어떠한 이론이 새롭게 일어날수 있을 것인가. 말이 다양하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고 뜻이 다의화(多義化)되어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곳에서 어떤 류(類)의 문화가 꽃 피어날 것인가. 한마디로 논의다운 논의가 없는 곳에서 문화가 피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불교가 마땅한 답변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점 또한 사실이다.
한국불교계에 “심리”나 “물리”와 연관된 진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교리(敎理)에 대한 논의는 얼마나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솔직하게 말해서 교리에 대한 논의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교리를 일의적(一義的)으로만 해석해 버리는 습관에 익어 다의적인 해석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다른 뜻으로 해석하면 훼불(毁佛)로 몰아세우기 때문에 일의적인 해석만이 횡행한다.
견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고 자기가 스스로 해석하는 것이다. 서울의 남산은 팔방(八方)에서 볼 수 있어야 당연하고 팔방에서 남산을 본 사람은 본대로 그 견해를 표명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 남산에 대하여 본 바를 각각 달리함으로 해서 남산에 대한 논의는 비로소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남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때 그 남산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범주에 틈입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남산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짐으로 해서 남산은 명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이 아무리 명산이라고 해도 그것올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 남산에 대한 소견을 일의적으로만 표명한다면 남산에 대한 논의는 활발해지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회에서 남산을 아는 사람이 자연적으로 적어질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는 남산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산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불교도 또한 이와 같다. 불교를 본 사람들이 각자가 본바를 다외화하여 소견을 밝혀야만이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고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서 불교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 불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으면 자연적으로 불교의 사회적 힘이 강해지는 것이다. 불교가 아무리 우수해도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많으면 불교는 아무런 힘을 못 갖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자연적으로 문화창조능력이 떨어지고 만다.
따라서 불교 주변에서 교리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말은 결국 불교가 문화창조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문화창조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출판문화가 일어날 것인가.

불교와 출판문화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都城出入)이 시작된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15년간은 교단(敎團)도 서지 않은 어려운 시기였다. 1910년에서 1945년까지 36년간은 또 일제의 우산속에서 탄압을 받았다. 1945년 광복과 1950년의 전란,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지속된 불교정화운동 등의 어지러웠던 시기들을 살펴보면 불교의 근대사는 질곡의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유일한 종단이 탄생한 후 한국불교는 근세조선이후 실로 5백여년만에 종지와 종통을 간추리며 피폐한 불교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에 산적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나가기는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다. 1962년 이후 불과 28년이 지난 오늘 모든 부면에 위상을 정립하라는 요청을 가하기는 무리인 것이다.
더구나 1876년 이후 불어닥친 서세(西勢)에 의해 기존의 모든 사상과 풍습가치 등등이 모두 쓸려나가 버린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불교가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남아서 국민정신 함양과 전통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 불교분쟁이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면 그 분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런지 모른다.
한국불교는 1962년을 기점으로 하여 도재양성, 포교, 역경이라는 3대 사업을 목표로 설정하고 종단발전을 위해 가능한 노력을 주선해 나왔다. 그때만 해도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불교서적은 손에 꼽힐 정도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가 한문으로 된 원전(原典)이 대부분이었다.
불교출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사실 불교출판의 기능과 역할은 백번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불교가 지니고 있는 이념은 물론이며 불교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둥둥 모든 방면이 불교출판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현현되고 또 이를 통해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상을 심어나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서포교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위력을 갖는 것임이 분명 하다. 그러함에도 불교종단에서는 가장 중요한 교리입문서 하나 종단차원에서 발간하지 않았다.
교단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포교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 문서인 것이며, 이를 이용하여 불교의 전수를 소개함으로해서 불교를 모르는 일반대중을 불교의 품안으로 이끌어 들이게 되고 나아가서는 심오한 사상과 비젼을 전달하여 정신개혁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교단에서는 출판사 하나 설립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는 일찌기 ‘기독교문서’, ‘성서공회’같은 교리전담 출판사를 설립하여 각종 기독교 서적을 간행하면서 기독교 전도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음에 반하여 불교계에서는 교단에서 직영하는 출판사 하나 설립하지 않고 지내는 실정이고 보니 과연 불교출판이라는 말을 쓰기마저 민망한 심정이다.
다행히 동국대학교 부설로 동국역경원이 있어서 장경(藏經)을 번역 및 책을 간행하고 있으니 불교출판의 기틀을 다져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역경원에서 번역에 착수하여 간행한 불서는 대반야경 l0권을 비롯하여 중아함경 3권, 잡아함 3권, 중일아함 2권, 화엄경 3권 , 열반경 2권, 본생경 5권, 불본행집경 2권, 구사론 2권, 전등록 3권, 선문염송 5권, 조당집 2권 등 도합 42권에 이르고 있다.
동국역경원의 장경간행사업이야말로 불교계에서 일어난 체계를 갖춘 출판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룩한 업적이야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내용의 것이다.
1970년 이후 불서간행에 뜻을 둔 몇몇 개인 출판사들이 불교의 저변확대를 위해 불자지송, 반야심경, 금강경, 열반경, 법화경, 화엄경, 기신론 등등의 불교서적을 간행하며 널리 반포함으로써 불서 출판 의 붐을 조성해 나가고 있지만 그 내용과 질적인 수준은 아직 미흡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정황이다.
다행히 불교서적 출판에 뜻을 지닌 스님이나 불자들이 개인적으로 출판사를 설립하여 급한대로 불교서적을 출판하고 있지만 불서출판 계획이나, 편집내용, 문장, 해석 등등이 각양각색인 관계로 어떤 통일성을 견지해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 또한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속히 교단차원에서 불서간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불서출판에 손을 써서 흩어진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우선 글을 중히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한국불교의 중심교단인 조계종단 주변에서는 글 하는 사람을 사람취급도 안하는 실정이니 앞날이 요원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불교에서 왜 문필을 가치없이 여기는지 알 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문필가를 대접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문필에 뜻을 두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며 문필에 뜻을 정한 사람이 많이 나와야 출판이고 뭐고가 이루어져 나갈 것이 아닌가.
지나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한국불교가 글을 평가절하 하는 풍조를 버리지 않고 이대로 나간다면 출판문화는 꽃피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문화창조능력을 완전하게 상실하고 말 것이다. 하루 속히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 해방되어야만이 “출판문화”라는 말이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불립문자인데 출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불립문자라는 말을 해석하면 “物”의 “理”나 “心”의 “理”를 문자를 벌어서 깨우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뜻이다. 결코 문자를 거부한다는 문자로서는 불가하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글을 멀리 한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니 지금이라도 속히 교단차원에서 출판사업에 손을 써야하지 않을까.